자존은 꿔서 쓰는 것이 아님에 대하여
어머니와 통화했다. 노년을 눈앞에 두게 된 후 별다른 희노애락 없이 둥싯둥싯 흰구름처럼 사는 어머니는 전래없이 화가 난 기색이었다. 말이 놀란의 데뷔작 '메멘토'만큼이나 조리없어서 몇 번이나 되묻고 나서야 어머니가 몇 시간 전 겪은 일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지금의 당신에겐 티비 시청과 나이를 먹어가며 점차 중후한 멋마저 겸비하기 시작하는 외아들 외에 유일한 낙이라 할만한 대중 목욕탕을 다녀왔다. 나이들어 '손아구'에 힘이 없는 어머니는 늘 그랬듯 세신사에게 몸을 맡겼다. 헌데 할 일을 마친 세신사가 '자주 오는 언니에게 해주는 써어-비쓰'라는 명목으로 어깨 아래 무성한 것을 말끔하게 밀어버린 것이다. 어머니의 말대로라면 마치 '날마다 겨드랑 털만 깎으면서 살아온 것 같은' 딱히 틀린 것만은 아닐 표현대로, 그 손놀림이 어찌나 능숙하고 신속했던지 몇박자 늦게 상황을 알아차리고 황급히 피해 부위를 더듬은 손끝엔 이미 한 오라기의 거스름도 없는 매끈함 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어머니는 벌컥 치솟아 오른 화가 목에 걸려 제대로 항의도 못했다. 눈썹이나 머리칼도 아니고, 이제는 '보여줄 놈조차 없을(이 또한 어머니의 표현이다)' 그깟 특정부위 체모의 손실에 화를 내야할 합리적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던 것이다.
해서, 난 한참동안 수화기 너머로 불뿜듯 분노를 쏟아내는 어머니에게 세신사 대신 화받이를 했다. 그러다보니 생애 한 번도 가져보지 않았던 낯선 의문을 목도하게 되었다. 별 대수로울 것 없는 '써어-비쓰'가 되어버릴 만큼, 왜 그게 없는 것이 표준이 된 거지? 수백 수천 대를 거친 자연선택의 결과물일 터인 겨드랑이 털이 언제부터 수치스러운 것이 된 것일까?
딱히 관련 지식이 없고 알고 지내는 인류 사회학자도 없는 나는 스스로의 간접 경험을 되짚어 예의 의문의 실마리를 구해보고자 했다.
19세기 북미 대륙을 배경으로 한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 주인공은 길 잃은 인디언 여자를 그녀의 부족으로 데려다 준다. 백인 주인공을 경계한 부족민들은 혼절한 여자를 제대로 넘겨받는 대신 팔을 잡고 질질질 끌고 가는데, 그 때 그녀의 팔 밑에 서부 대자연의 웅장함이 흐드러진다.
20세기 초 유럽발 여객선을 배경으로 한 영화 '타이타닉'에서 무명 화가인 주인공의 연습장에는 불란서 여인들을 모델로 한 누드화가 그려져 있는데, 대부분의 작품들의 어깨 아래 풍성함이 흥청망청이다.
20세기 중반 중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 '색, 계'의 여주인공 탕웨이는, 음, 뭐, 주지의 사실이다.
그토록 멀리갈 것도 없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머니의 반만 하던 어린시절, 즉 20세기 말 대한민국에서만 해도 그렇다. 엄마손을 잡고 버스를 타고 가던 내가 문득 위를 올려다보면, 남녀할 것 없이 버스 손잡이를 잡은 팔 아래는 하나같이 풍요로웠다. 웃음이 매우 헤펐던 나이였음에도 딱히 우습게 느껴본 기억이 없다.
그렇게 적어도 이 나라에서 겨털이 수치스러워진 순간을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의 어느 순간으로 특정할 수 있었으나, 문득 핵심은 그게 아니다 싶다. 그깟 겨털의 유무따윈 중요한게 아니다. 중요한 건 자존이다. 나는 딱히 자연 그대로의 무성함이 아름답다 말하지 않겠다. 반대로 깔끔히 정리한 매끄러움이 아름답다 말하지도 않겠다. 그저 그렇든 말든 무신경할 수 있는 자존만이 아름답다 하겠다. 자존이란, 결코 꿔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짧지 않은 숙고 끝에 이렇든 저렇든 상관없다는 결론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난 기회가 된다면 전신왁싱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얼마 전 오랜 친구가 집에 놀러왔다. 최근 여자친구가 생긴 것과 관련 있는지, 그는 오자마자 별다른 안부인사도 없이 전신왁싱을 했다고 자랑이 떠르르했다. 삶의 질이 한 단계 올라갔다고 호들갑을 떠는데 지나치게 맞장구 쳐주면 시술 부위를 보여주겠다고 덤빌까봐 그저 성의없는 추임새만 넣어줬다.
하지만 잠시 후, 방 안에 울려퍼진 그의 방귀 소리는 내게 끝모를 감동을 주었다. 방금 전까지도 부정적이었던 왁싱에 대한 인식을 송두리째 바꿀만큼, 언젠가 나도 전신왁싱을 해봐야지, 그래서 저런 소리를 내봐야지 결심할 만큼 아름다운, 마치 비취를 깎아 만든 대금처럼 징철한 소리였던 것이다.
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