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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y for Player One 4

3. 우리는 다른 물구나무로 섰고

by 사과와 돌멩이 Dec 22. 2024


24.12. 22





Ready for Player One


3. 우리는 다른 물구나무로 섰고


(1) 팬텀 공간 도식


앞서 팬텀 공간 도식을 소개하며 몇 가지 헷갈릴 수 있는 이해 방향에 대해 언급하다 글을 끝냈다. 이제 본격적으로 '조현병의 가설적 장애'를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그 내적 논리의 도식화 차례다. 다만 내가 현재 상정하고 있는 '이해의 맥락'은 여전히 기본적인 것으로서, 앞서 예시를 들어 설명할 때도 임시방편의 성격에 가까운 것이지 글 자체로만 봤을 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관념이 지시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도식 자체에 매달려 하나하나 파고드는 우는 최대한 범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가 '체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그 미묘한 분위기에 도박을 거는 게, 이 시리즈의 자세 중 하나다.


  복기도 할 겸, 다시 일반 팬텀 공간을 소환해 보자.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03-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03


 우리의 체험은 이런 도식으로 설명 가능하다. 앞서 생략했던 여러 논의들 중 실감을 위해 몇 서술을 보태보겠다. (보다 상세한 설명을 할 예정이다. 이게 잘 전달된다면, 체험→도식에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조현병의 가설적 장애'로 나아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라고 생각해주길 바란다.)


 내가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체험이 그 예시다. 현재 나는 담배 중독자가 되고 말았다(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다). 이 체험은 의식되지 않는 모종의 '상황 의미', '신체 감각' 등등 의식하려면 알 수 있는 여러 순간순간 속에 배치되어 있다. 쉬운 이해를 위해 '담배 땡긴다'고 말하는 그 충동을 자극하는 보이지 않는 요인을 트리거라고 부르자. 나는 주로 일어나서 커피를 내리는데, 에스프레소의 크레마를 맛볼 때가 트리거다. 논리를 이해하거나 언어를 연상시키는 '표상-지각 의미부여' 활동 중 하나인 독서는 트리거가 약하다. 근데 쓰는 행위를 할 때는 강한 트리거가 산재해 있다. 이런 일상의 순간들 속에서 나는 그저 뭔가를 하다 '담배'가 떠오르고, 아무런 통제-브레이크 없이 그냥 핀다.


 '담배를 피우고 싶다'라는 체험을 도식 위로 올려보자. a는 모종의 트리거가 작동되어 조절된 강도 a 중 어느 부분이다. b는 담배다. a-b가 만나 나의 체험 '담배를 피우고 싶다'가 구성된다. 이때 b는 그저 '담배'일 뿐이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돗대네?' '(전자 담배를 피우므로) 배터리가 없네?', '(건강을 의식하며)아 이제 슬슬 끊어야 하는데' 같은 여러 관념들이 마치 꼬리처럼 '강도에 따라' 줄지어져 있는 담배다. 이것들은 대개 '현실 지각'의 성격이 강하다. 특히 '건강'은 오해하기 쉬우나, 이는 기본적으로 '죽음 회피 행동'의 구조이며 내 신체를 근거삼아 모종의 감각 반응(통증이나 기침, 이상 증상을 '흡연'으로 연결시킬 때)으로 '지각'된 표상이다. 즉 눈앞에 당장 대상으로 나타난 게 아니지만 그것은 '처음에 지각'된 이후로 줄곧 내가 표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내용이다.


 이 표상과 지각의 차이를 보다 상식 선에서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사르트르나 후설, 아니면 좀 더 현대로 와 관련 차이에 대한 철학적 접근으로 그 이해를 첨예하게 접근하는 건 일반인에게 있어 불필요할 것이다. 필요할 때만, 이해를 구하면 된다. 따라서 '표상'이란 자신 안에서 떠올릴 수 있는 '의미-관념' 전체다. 기준은 눈을 감고 혼자 떠올릴 수 있는 그 '느낌'에 두면, 대체로 헷갈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아 끊어야 하는데...'는 표상이지 않은가? 맞다. 여기서 헷갈릴 수 있다. 이 표상은, 지각적 성격이 강한 표상으로 '죽음 회피'적 성격이 강한 표상이다. 그러나 나의 체험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것은 표상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건강상 위험을 알려주는 지표를 검사표로 받는 상황으로 가 보자. 고혈압, 혈당과 같은 수치가 비정상으로 나온다. 그걸 보는 순간은 '지각'이다. 그때 들어온 '지각'이 아마 아주 오랫동안, 당신의 표상으로 심심찮게 떠오를 것이다. 이것이 과도하게 일상 의식을 지배할 때 우리는 '건강 염려증'이라고 부른다.


 표상-지각의 관계는 무 자르듯 잘리는 관계가 아니라는 게, 우리네 상식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체험을 출발삼는다면, '지각'의 순간은 분명하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충동이 올라와서 담배를 찾는 행위는 '지각'이다. 그때 나의 표상은 '담배 어딨지?'에 가까울 것이다. 지각된 담배가 발견되고 그것을 피우기 시작하면(사실 전자 담배는 이제 '피운다'보단 '찐다'거나 '흡입'이 맞는 거 같다) 이제 내 의식에 '담배를 피운다'는 체험은 밑으로 가라앉는다. 그러나 나의 신경계는 니코틴과 작용을 일으키고 있을 것이고 그걸 난 의식하지 않는다(못한다). 표상-지각은 이처럼 역동적이고도 그때그때 처리되며 마치 시소와 같다.


 지각이 강할 때, 내가 앉은 시소의 반대편이 '뜨게 된다'. (이것은 Wauchope의 생명론으로부터 야스나가 선생이 전제하는 논의다) 왜냐하면 강한 지각에는 그에 상응하는 강한 표상, 즉 a의 에너지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담배 피우고 싶다'에서 현실적 지각의 강도가 낮다는 건, 그냥 손쉽게 피우는 것이다. 근데 담배가 떨어지면→사러 가야 해→밖은 추운데→옷 입어야 돼→귀찮은데... 표상이 아주 순식간에 처리될 것이다. 이 처리 과정 속에서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충동 또한 그에 상응하는 강도만큼 올라가야지, 나는 '담배를 피울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가로막혀진 부하를 느낄 것이고, 그 상태를 나는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 어머니가 추운 날 담배 피우고 오는 걸 보고 '추운데 고생한다..'하는 말을 한 적이 있다. ㅋㅋ. 끊으라는 말을 이렇게 에두른다.)


 이 관계를, a→b에 적용했을 때 '패턴의 비대칭성'과 연결되어 a≥b로 표현하는 게 우리네 '일반 체험'이다. 우리는 늘 b에 대해서 그에 최적화된 a 에너지를 쓰거나, b의 부하에 따라 a의 강도를 조절한다(운동-헬스를 생각하면 이해가 더 쉬울 수 있다). 그런데 그 역전된 관계를, 우리는 절대 체험하지 않는가? 했을 때 그것은 '죽음'이기에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막대한 b를 지각하자마자 당신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회피해(혹은 지각하지 않음으로써) a보다 강해지는 걸 막을 것이다. 생명체에게 있어 a<b의 상황이란 오직 '죽음'뿐이다. 아무리 강한 b라 해도 우리는 a를 조절함으로써 b(=에너지 요구 값)가 자신의 에너지 출력 값을 넘지 않게 행동한다. 현실 도피, 현실 외면, 당장의 자기 처지 등 소위 '자기 객관화'란 말로 이해해도 좋다. 우리 정신은 그저 주어진 현실 모든 걸 '지각'하는 게 아니다. 그 지각조차도 이미 걸러진 지각이다. 걸러진 지각을 우리는 '의식'한다는 게 중요하다(이미 대중화된 여러 인지심리학-신경생리-뇌과학 담론으로 이해에 큰 무리는 없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살면서 a<b의 체험 공간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게, 도식 3-1이 의미하는 것 중 하나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따라서 내가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체험은 a≥b 안에서 그려진다. 그리고 a-b의 관계는, 거의 '한 몸'이다. 순식간에 그것은 합쳐져 삼각형 XYZ 부피에 놓이는 것이고, 그 부피에 놓인 게 곧 우리의 체험이므로 밑에 타원-선으로 그려진다. 이 타원-선은 무미건조한 타원이 아니라 앞서 설명했듯 '패턴'이다. 여기서 '도식'만 봤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오해 하나를 덧붙이겠다.


 만약 a-b를 따라 그어진 선분이 선분 XY 위로 점을 찍는다고 했을 때, 그러한 점들이 대응되어 타원-선으로 연결되는 것이라면, 수직선이 의미하는 '강도'에 따라 타원의 가장 왼쪽 부분은 max a-b이고, 그것이 출발인가? 그러면 우리의 체험 공간의 도식으로 우리의 체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저 패턴에 따르는 것인가? '가장 강한 a=b에서 점차 줄어드는 강도'가 체험인가?


 이 오해를 위해 덧붙여야 하는 논의가 있는데, 요약하면 타원이라는 '체험 공간'을 우리 체험의 '무대'로 이해하면 편하다. 그 무대 위에서, 우리의 체험이 펼쳐진다. 즉 내가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체험을 도식으로 나타내면 위의 도식과 같겠지만, 그 안에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건 '담배를 피우고 싶다'가 '지금 당장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세상을 없애버릴 거야, 라는 무지막지한 분노로부터 "담배를 피우는" 순간까지의 스펙트럼 체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스펙트럼을 '체험 공간'이라고 기술했을 때, 우리의 체험은 그 무대 위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이 '도식'으로 표기됐을 때 실제 우리 일상에서 어떤 도움이 되는가? 하는 건 바로 '자성' 능력이다.


 예를 들어 나의 어머니가 나에게 강한 어조로 '담배 좀 그만 피워'라고 짜증과 불쾌 섞인 말을 한다고 치자(실제로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때 나는 상대의 분노를 '지각'함과 동시에 나의 a 에너지는 상승해 대응할 것이다. 메시지는 '금연'이지만, 나의 반응은 '왜 나한테 짜증내'라는 분노일 것이다. 당연히 그 표상 안에는 '건강을 생각해서 하는 조언'과 '담배가 해롭다는 가치관을 자꾸 확인해야 하는 어머니의 '에너지''도 있을 것이다. 또 이것이 처음이라면, 나는 '알겠어..'라고 말하며 상황을 회피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상황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면, 나는 결국 a 에너지 상승으로 향할 것이고, 상대 또한 그럴 것이고, 이 악순환은 맞물려 '상한'까지 나아간다. 나의 아비는 알콜중독자였다. 술을 끊으라는 우리 가족의 말에 그의 공격성과 폭력성을 예시로 들 수 있을 거 같다(일단 여기서 a에너지가 분노일 경우 그 상한이 어떤 '현실'을 만들어내는지는 다루지 않겠다).


 만약 내가 어머니의 말에서 이러한 '에너지 간 관계'에 이해를 하고 있다면(패턴 사고 방식을 갖고 있다면), 상대가 왜 그런 부정적 감정을 표출하는지 분간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안에서 나에 대한 에너지 관계 또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며, 내가 스스로 해야 하는 노력과 상대방과의 관계 위에서 해야 하는 노력을 분간해 조율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저 도식은, 외따로 고립된 단순한 도식이 아니라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서로의 관계에서 각자의 패턴으로 발생하는 '복잡한 것'이다. 이 복잡함은 나의 '체험 공간' 위 체험 뿐 아니라 상대도 마찬가지다. 이 안에서 벌어지는 다채로움은, 나에게 있어 충분히 '이해'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체험 패턴 공리를 전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해되면, 알아볼 수 있다. 알아볼 수 있으면, 다르게 피할 수 있다(마주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체험 공간이라 부른 저 타원을 잘 알아보는 게 중요하다. 앞선 글에서도 소개했듯, 저 타원은

브런치 글 이미지 3

 이런 구조를 갖고 있다. eE→Ff다. 복기하자면, eE는 '나'로 묶고, Ff는 대상이다. 해당 표기의 '점 위치'는 개념일 뿐 '구체성'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순서를 나타내기 위해 드러낸 것이다. e, E, F, f다. 이것이 우리의 체험 공간 '성질'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체험은 대체로 이 성질을 띤 것이 된다.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담배Ff를 피우고 싶다eE'로 말이다. 대상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패턴으로도 이해 가능하다.


 이 도식들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우리의 체험 공간은 '팬텀 공간'과 연결되며, 그 관계를 해부한 것이 위의 도식이라는 것. 또 우리 체험에는 강도라는 '거리감'이 있으며, 앞서 가장 강한 a=b라고 한 것이 eE쪽이라는 것. 그러나 a≥b에 따라 a>b인 것의 상한은 우리의 질적 에너지a가 가장 강한 것이므로 eE쪽이라는 것(즉 자신의 감정, 정서, 기분 등 질적 의미를 가장 크게 느끼기 때문에 체험에 있어 마치 '나'인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는 것, 꿈의 생생함 등등). 중요한 건 상대에게도 그러한 체험 방식이 있으며, 아무래도 상대에게 '나'는 Ff로 나타난다나는 것.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건, 나의 eE라는 질적 의미가 상대에게는 원리적으로 '자신의 것'은 아니라는 것. 그러나 방금 말한 '나인 것처럼'의 능력 덕분에 상대의 것이라도 자신의 것으로 느낄 수는 있다는 것이다.


 그저 도식뿐이고, 기하적 구조뿐이지만 이런 체험적 의미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체험→도식→체험이 이뤄져야, 도식의 의미도 살아나고 우리 체험을 팬텀 공간으로 기술하는 의미도 살아난다.


  



이것으로 얼추 개요는 다룬 거 같다. 야스나가 선생은 표상-지각을 다루는 논의를 할당하셨지만, 일반적인 상식 선에서 필요한 부분만을 다루고 넘어가고자 한다. 이제 '분열병을 위한 가설과 공식'을 다룰 차례다. 야스나가 선생의 말마따나 '마침내 추론을 위한 준비가 완료'되었다, 고 자신감있게 말하고 싶지만 내 글에서는 그럴 수 없다. 다시 언급하지만 가능하면 원문을, 여기서는 '상식 제고'가 주된 목표임을 염두에 두길 바란다.


 그 전에 야스나가 선생이 비판의 어조를 날카롭게 세웠둔 대목 중 새겨 들을 내용을 보고 가자. 당사자의 생생한 이야기이므로 인용을 하겠다.


분열증의 체험 공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과제는 모든 정신과 의사의 머릿속에서 꿈에도 잊히지 않는 것이다.

...

먼저 밝히고 싶은 것은, 여기서 다루는 것은 ‘이론적’ 틀이라는 점이며, 구체적인 분열증 환자에 대한 전인적 이해 서술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신과 의사에게는 본래 모든 것이 이 전인적 서술에서 시작된다. (워쵸프의 인식론에 따르면, 이 순서가 맞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 자체도 일정한 가설적 도식(이론) 없이는 불가능하다. 어떤 이론적 편견도 없다고 자부하는 사람의 서술에도 이미 무의식적인 틀이 숨어 있을 것이다. 정상인에 대한 상식적 틀에만 의존해 출발할 경우, 거의 모든 분열증 관점이 빠졌던 것처럼 결국 이해 불가능한 것(예: 하이델베르크 학파)으로, 정상인에게 자명한 것이 더 이상 자명하지 않은 것(예: 블랑켄부르크)으로 인식의 지평 너머로 내버려질 수밖에 없었다.

...

덧붙이자면, 본질 외의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역설적이지만) 치료의 중요한 부분은 본질 외의 부분을 성실히 채워가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비판은 단지 안이한 착각에 대한 것이다. (전문가는 대체로 괜찮겠지만, 대중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궁극적인 본질은 물론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현상을 보는 엄격한 자세는 가져야 한다.

...

 병의 원인을 모른 채 병자는 단순히 뇌 질환으로 치부되거나, 혹은 반대로 심각한 신경증 정도로만 여겨져, 여러 가지 독단적인 심인 이론의 낙인 — 사회적 본능의 선천적 결핍이라든가, 유년기 모자 체험의 상처라든가 — 을 찍히게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에는 병자의 삶의 전략이나 의식적인 은폐로까지 간주되기도 했다.
 증례에 따라 그러한 역동이 존재할 수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논자들은 이것을 일반화하고, 분열병자의 발병 전 능력이나 자질이 우리 '정상인'과 본질적으로 다른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정말로 (양심의 가책 없이) 단정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이러한 설들이 신체 인과론자들보다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겉보기에는 '인간적'인 이론일수록 (그 발상이 선의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병자를 부당하게 깔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병자는 지금, 실제로 병에 걸렸기 때문에, 이렇게 되면 변명이 통하지 않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

병자라 할지라도 (이 핸디캡을 안고서도 살아가야 하는 주체가) '삶의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이 그리 이상한 일인가? 그것이 병자의 개선이나 치유를 악순환적으로 방해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그럴 때 우리는 그 문제에 정면으로 또는 측면에서 대응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병의 원인은 아니다.

...

(조현병의 가설적 장애 도식)이 형태의 인식이 궁극적으로 정확한지, 더 나은 이해 방법이 나올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이 가설의 방법론과 구조는 명확한 자각 아래에 있으며, 그로 인해 한계 또한 분명하고, 감정적으로 교리화될 위험은 오히려 적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189~199(부분 인용)


 부연은 불필요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핵심은 이렇다. 이론적 틀이라는 의미, 그것은 이론을 갖고서 실제 타자의 체험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오만하지 않는 것. 무엇보다 실제 체험은 전인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이것을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한여름 더위 아래 사람들의 얼굴에서 벌레가 기어다닌다고 말한다 할때, 그런 표현을 하는 나의 체험은 이론적 틀('패턴'-일반 체험 공간)로 이해했을 때 그 의미가 보다 살아날 수 있다. 그런데 단순히 헛것을 봤다, 오바한다, 말같지도 않다, 멋부리기 위한 비유일 뿐이다 식으로 보는 건 '이론적 틀'이 없는 것이다. 그런 방식은 오히려 자신의 체험에 대한 이해 수준 문제이며,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으로부터 상대의 체험이 부정되기도 한다. 문학, 특히 시를 쓰는 나에게 있어 이 '비대칭성'은 아주아주 익숙하고도 어쩌면 평생 마주해야 할 관계성이기도 하다. 어떤 시구를 보고서 그 체험이 '언어를 위한' 체험인가,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체험인가 무 자르듯 자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쓰는 자도 그걸 자를 수 있을 만큼 자를 수 있고, 읽는 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큰 틀에서 봤을 때 이것은 궁극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이다. '이론적 틀'이라는 건, 이 일반적인 비유에서 우리 모두가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출발한다는 도식을 갖고 있기에 서로 간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는 데로 이끄는 것. 만약 그것이 없다면, 과연 '체험'을 이해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삶의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는 문장도 핵심이다. 나의 아비가 알콜중독자였던 건 그런 자신의 파탄이 놀랍게도(!) 생존 전략이었단 것이다. 누가봐도 그건 마치 죽음 충동처럼 스스로를 파괴시키는 행위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게 그리 이상한 일인가? 나의 아비는 나약한 인간이라서, 의지가 약해서, 스스로 중독에 빠져들고 나오지 못하는 인격 결함이 있어서 '중독자'가 된 것인가? 이건 병의 결과를 원인으로 혼동하는 판단이다... 자신과 무관한 타인이 사회적 '약자'로 나타났을 때 그를 자신의 표상으로 처리하는 일종의 편견에 대해서 일갈하라치면 얼마든지 할 수는 있겠지만... 여기서는 이 정도로만 말하고 넘어가겠다. '자신의 체험으로 출발한다'는 말을 동의해 주실 수 있길. 야스나가 선생의 말을 주의깊게 보면, 그가 얼마나 '생명'을 소중히 다루는 의사 본연의 사명감을 책임감 있게 갖고 있는지를 느끼실 수 있을 것이다. 무수한 학자들이 우를 범하듯, 자신의 '학자 정체성'을 위시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격이 아니다. 그런 그의 입에서 제시된 '이론'이다. 이 정직함이 전달될 수 있다면 메신저로서는 기쁠 것이다.


 




(2) 가설적 장애 유형 4가지


본론이다. 처음 야스나가 선생은 '패턴 역전'을 갖고서 조현병의 내적 논리를 위한 가설적 이해 모델을 제시했다. 이후 '팬텀 단축'이라는 이름으로, 도식으로 표기된 팬텀 공간에 '단축'이 발생해 '조현병을 조현병답게 만드는' 원리가 가설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후 '탄성체의 탄성률 저하'라는 설명으로 귀결됐으며, 말년에는 여기에 머물러 이로 가설적 장애를 설명했다.


 내가 파악한 맥락으로 핵심은 이것이다. '가설적 장애'를 도식으로 이해하기 위해 발전된 용어의 변천사 속에서 핵심은 eE-Ff다. 이것만큼은 변함이 없다. 따라서 이 체험 공간을 핵심으로, 이 체험 공간이 어떤 이유로 인해 일반 체험 공간과 비교했을 때 어긋나는가, 역전되는가, 단축되는가, 배후화되는가 하는 '방식의 문제'가 앞선 개념 변천사다. 그러니 말년에 이른 방식의 문제(이는 곧 설명의 방식이다)로 출발해 보자. 먼저 이 기본 도식을 보고,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10-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10

 

 다음의 설명을 보자.


a’계의 물질적 왜곡–응력 관계를 지탱하던 생리학적 상수가 변하고, 그 변화는 동일한 왜곡에 대해 이전보다 약한 응력만 발생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가설이다.
(응력: 물체가 외부 힘의 작용에 저항하여 원형을 지키려는 힘)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생리적 상수가 존재했고, 그것이 절대 불변의 것이 아닐 것이라는 점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결과'만 있으면 이후의 기능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추론에는 문제가 없다.

a’계는 외부로부터의 입력과 a계 사이에 끼인 두꺼운 고무판(탄성체—탄성 공간)처럼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 가설은 고무판의 탄성률이 저하된다는 것으로 대응될 수 있다.

탄성체 공간은 응력(힘)과 왜곡(거리) 간의 관계가 팬텀 공간의 삼각 도식과 동일한 모양의 삼각형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이러한 유추가 가능하다. (자기율이나 전기율도 이와 같은 원리로 설명되지만, 탄성률이 가장 이해하기 쉽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14~216

 

 이제 우리는 팬텀 공간에서 a'계라는 '탄성체' 가설을 이해해야 한다. 조현병의 가설적 장애는 바로 이 탄성체의 '탄성률'에 문제가 생겨서 펼쳐지는 체험 공간이다. a'계에 대한 '탄성체' 설명을 다른 책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곁들어 보자.


 a와 a’ 두 계를 비교해 보면, 의식의 발원지, 자발성의 원천과 같은 a계보다는, 물질성, 주어진 것의 필연성을 대표하며 자유를 제약하는 a’계가 의학적으로 더 중요하게 보인다. 그것은 바로 의식 공간을 담당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몸'이다. 이 계의 기능, 즉 뇌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극에 따라 b에 해당하는 양을 측정하는 이 '매질'의 기능에는 일정한 생리학적 상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 상수가 본래 a와 삼각형 그림의 형태를 결정했었다. 이를 전제로 하여 a계의 기능이 그것에 대항해 체험의 거리 시스템(공간 도식)을 구축해 왔던 것이다. "이 상수가 갑자기 병적으로 감소하게 되는 것"이 바로 조건이다.

a’ 공간을 일종의 기본적인 긴장을 품은 탄성체 내부의 공간으로 상상하면 이해하기 쉽다. 실제로 탄성체에서는 스트레스(강도)와 스트레인(변형 = 길이, 거리)의 관계가 삼각형의 상관도를 그리게 되어 상황은 유사하다. 즉, 가설은 ‘a’ 공간에서의 탄성률 저하'로 비유될 수 있다.

이 이상을 주체(a계)는 직접적으로 알 수 없다. (주체가 여러 신체 기능의 암묵적인 '상수'를 직접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흔한 현실이다. 주체는 각 근육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도 모르고, 단지 운동의 최종 결과, 예를 들어 손끝의 움직임만을 인식하고 있다.) 시지각의 예를 들자면, 주체는 언제나처럼 a의 위치에 있기를 바라지만, 이는 마치 연을 날리는 것과 같고, ‘a’에 해당하는 더 멀리 있는 거리로 상이 이탈한다. 이 분열은 초기 강도와는 상관없이 구조적으로 필연적으로 동반된다. 주체 입장에서는 친숙하고 친화적인 a 공간의 외부에 눈에 보이지 않는 틈을 두고 멀어진 그림자 같은 현실 세계의 층을 보게 되는 것이다(여기에서는 관련된 논의를 생략하고 있으며, 증상의 실체를 알지 못하면 이것이 어떤 임상 상황에 해당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소위 '이인증' 체험형과 잘 부합한다).

- 精神科医のものの考え方: 私の臨床経験から, 安永浩, 2002, 金剛出版, p54~55


 즉 여태 일반 체험을 해부하는 팬텀 공간 도식에서 a와 b(a')에서 '탄성체'에 해당하는 부분을 다시 a'로 표기해(그렇게 표기해도 문제가 없으므로) a와 a'의 관계에서 이 a'에 문제가 발생한 경우를 고려하는 것이다. 당연히 a계에서도 '탄성체'와 같은 모종의 기능에 문제가 생긴 경우도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은 타당하고도 흥미로울 것이다. 그러나 일단 야스나가 선생은 a'계의 문제만을 염두에 두고 논의를 진행하고 있으며, 이로부터 도출되는 이론적 결론과 실제 체험을 고찰하다 보면 당연히 언젠가 누군가는 a계의 이론적 도식도 도출해낼 수 있고, 종합적으로 발전되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팬텀 공간론'의 형태가 아닌 무언의 이론이 나올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야스나가 선생도 이를 바라고 있으며, 자신은 언제든 '그것이 더 올바르다면 나는 언제든 갈아탈 마음이 있다'고 밝히기도 한다.


 우리가 이해로 나아가기 위해 지금 필요한 건, 저 '탄성체'라 불리는 a'계의 가급적 생생한 이해일 것이다. 저것이 무엇인가? 했을 때 우리의 팬텀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상호성을 분해하여 외따로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정으로부터 출발하는 게 지금 주어진 최선이다. 너그럽게 '있다고 해 보자'로 일단 동의를 구한다.


 그나마 내가 이해한 바에 따라 제안할 수 있는 예시는 이것이다. 우리의 팬텀 공간 안에서 '탄성체'의 감각을 실제 체험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경우는 바로 '갑작스럽게 놀라는' 체험이다. 당신이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 요리를 한다, 핸드폰을 한다, 영상을 본다, 음악을 듣고 있다, 일을 하고 있다 등 '주의력-집중력'이 특정 지각 대상에 한정되어 그 외의 대상들이 당신에게 칩입하는 것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느낄 때, 갑자기 당신을 놀래키는 상황이 일어났다고 치자. 당신은 화들짝 놀라며 순간적으로 급상승하는 a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순간적인 심장 박동 수 증가, 아드레날린 분출 등 신체 반응은 지각되지 않을 것이며 그에 따른 종합적 의식 상태인 '흥분'만 기저에 깔릴 것이다. 이때 놀래는 대상을, 당신은 놀라는 순간에 거의 동시에 파악하기에 이른다. 친구의 장난, 가족의 인기척, 차량의 급정거, 타인의 몸짓, 떨어진 물건, 큰 소리 등 그게 뭔지 재빨리 파악할 것이다. 파악한 그 순간 그 대상이 당신에게 어느 정도 에너지를 요구하는지 '순식간에' 조율될 것이다. 그렇게 당신은 '놀랐다'는 감정의 여운을 느끼며 서서히 안정을 되찾을 것이다.


 a'계를 탄성체라고 가정하는 걸 이 예시로 어느 정도 감을 잡으실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놀라는 순간은, 당신의 a'계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그 행위에 걸맞는 탄력으로 유지되고 있었는데 그 탄력을 순간적으로 수축시키는(a의 에너지를 과도하게 상승시키는) 외부 입력 값에 대한 일종의 무방비다. 하지만 당신은 당연히 의식을 활용해 입력된 에너지를 처리함으로써(그와 함께 탄력이 다시 회복되면서) 안정을 되찾게 된다. 이 예시를 통해 우리 의식에 탄력이 있다는 걸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근데 만약 이 a'계의 물질적 '왜곡歪'의 탄성률이 저하되거나 밀려나간다면? 그 가정 상황이 바로 '가설적 장애'의 시작이다.


 여기서 a'계의 물질적 '왜곡'이라고 표현한 부분을 내가 이해한 대로 설명하면 이렇다. 우리가 현실 지각을 할 때 우리의 정신 안에 그 지각 대상을 위치지우는 과정에서 그것을 '왜곡'이라 부를 수 있다. 이는 인지심리학이나 신경생리, 뇌과학에서 도출된 '인지 과학'적 내용을 알고 있으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오늘날 대중에게 이런 상식이 보급되어 있어 좀 더 유리한 측면도 있다. 핵심만 말하면, 우리 눈과 시각 정보 처리를 담당하는 뇌의 특정 부분까지의 생물적 계에 만약 왜곡이 없을 때 우리는 온갖 파장으로부터 지각 대상을 완전히 이질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이다(본다는 행위가 본질적으로 달라진다). 이 왜곡으로부터 우리는 '색'을 인지할 수 있고, 세상이 '이렇다'라는 온갖 체험 감각이 발생한다. 즉, 세상이 실제로 그렇게 있는 게 아니라 세상이 있고 그걸 '그렇게' 인식하는 우리의 '기관 협응'이 있다. 이 사이에서 발생하는 게 '왜곡'이다.


 정 이해에 무리가 간다면, 그냥 '탄성체' 고무 공과 같은 우리의 인지 시스템이 있다고 치고 넘어가 보자. 중요한 건 이 탄력의 문제이며, 이로 인해 도식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그로부터 도출되는 실제 체험은 어떠한가의 이해다.




 (a) 제1공식 Af-F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16-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16

 

 자... 숨 한 번 고르고 시작하길 바란다. 하나씩 천천히 설명해 보겠다. 야스나가 선생은 두 가지 경우를 고려한다.


이제 외력이(b의 압력) 본래 상태 그대로라고 가정해보자. 이때 가설의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 엄밀히 말하면 두 가지 경우가 가능하다.

(a) 외력이 공간적으로 이동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부드러워진' 고무판을 압축하여 침투해 들어와 어떤 지점에서 멈춘다. 그때 고무판의 내부 장력은 이전과 동일하게 복원되지만, 거리상 침투되었다는 사실은 남아있다.

(b) 외력이 이동하지 않는 것이라면, 거리상으로는 이전과 동일하지만 고무판의 내부 장력은 저하(약화)된다.

이 모델은 두 가지 경우 모두 해당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주체의 관점에서 외력의 위치 평가(거리 평가)가 어떻게 변하느냐이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15~216

 

그냥 보면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으니, 최대한 이해가 어려운 입장에서 서술을 이어가겠다. (a)는 쉽게 말해 '탄력'은 문제 없어, 근데 탄성체가 이동됐어, 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고무줄'로 일단 시작해 보자. 손바닥 위에 놓인 고무줄은 고리 모양이다. 이걸 손가락으로 각각 잡아 확 땡긴다. 팽팽해지다가 무리한 '한계'를 넘어가면 당연히 끊어지겠지만(그래서 어느 한쪽이든 당신의 손가락 방향으로 그 탄력에 상응하는 대가{고통}를 느끼겠지만) 당신은 적당히 당겼다가 최대한 동시에 놓는다. 당신이 아무리 동시에 고무줄 양끝을 놓는다 해도 고무줄은 좌우 어느 쪽이든 한쪽으로 이동된 방향에서 다시 원래 모양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게 (a) 상황이다. 즉 처음에 비해 고무줄은 위치가 이동되었다. 이것을 '거리상 침투되었다는 사실이 남아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b)의 상황은 고무줄을 불로 가열하는 것이다. 고무 성질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지금 나에겐 없으므로, 단순히 고열로 인해 고무라는 탄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상황을 가정한 예시다(고열과 탄력의 반비례 관계가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면 죄송하다). 이때 고무줄은 위치적으로 그대로지만 탄력이 변질되었다. 그 상황이 (b)다.


 (a)에 '탄력'이라는 내부 성질에 문제는 없다. 다만 외부 '위치'가 문제다. (b)에 위치라는 외부 조건에 문제는 없다. 다만 내부 '성질 저하'가 문제다.


 이 두 경우의 문제를 고려하며 야스나가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a)의 경우에는 내부 장력 a’는 이전과 동일하게 복원되었으므로, 이 장력에 의해 투영된 a’적 거리 평가는 이전과 동일하다(도식 3-5의 L2). 그러나 실제로는 고무판이 축소된 만큼 후퇴하여(‘자’에 더 가까워져) 있다. a 에너지는 이를 무시할 수 없으므로 그만큼 레벨이 상승한다. ('거리적으로 축소된 만큼'이 생리학적으로 어떤 변화에 대응하는지에 대해서는 지금으로서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존재할 것임은 의심할 수 없다. 그리고 a측에서는 이를 방치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 이 점이 생체와 단순한 물리적 고무판의 차이이다. a는 독자적인 출력 원천을 가지고 있으며, 관습적인 출력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이 '축소'를 감지하고 이를 기존의 기준 사선에 따라 계산하여 필요한 대응 출력을 도출해낸다.)

따라서 a에 의한 거리 평가(도식 3-5의 L1)와 a’에 의한 거리 평가(L2) 사이에 차이(분열)가 생긴다. 지각상의 b 거리는 a’에 따라야 하므로 더 먼 지점인 L2에 위치하게 된다. 그렇다면 a에 의한 평가의 끝점인 L1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무것도 없다. 주체에게 가장 직접적인 실감인 a계 팬텀 공간의 끝은 말하자면 공허를 가리키고 있다. L1과 L2 사이의 균열은 정상 지각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것(a와 a’는 반드시 일치해야 하므로)으로, 매우 역설적인 균열이다. (이 위치 관계를 도식 3-5의 삼각형 도식으로 그리면, 체험선상에 나타난 균열은 PQ의 분리와 상응한다. 이 경우 사선 CX는 저하된 탄성률에 대응하는 기준 사선이다.)

주체는 당연히 '가설'로 인해 발생한 장애를 알지 못한다. 사실 이 점이 지금 설명한 균열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주체가 이 장애를 알고 있었다면, CX로 표시된 새로운 팬텀 공간에서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하면 a와 a’가 분리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전체적으로는 어떤 변화가 발생한다. 이는 분열병의 경우 만성적 순응 형태로 논의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세부 사항은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하지만 주체는 장애가 잠재해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옛 기준선에서 사태를 처리해야만 했다(a’에 대해서도 a에 대해서도). 점 P와 점 Q의 분열은 바로 그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1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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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동이 생길 수 있으니 도식 기호에 대한 부연을 좀 하자면, (イ)는 (a)로,  (ロ)는 (b)로 표기했다. L1과 L2의 틈을 가리키는 일본어는 '열극裂隙'으로, 분열할 때의 '열', 간극이 있다고 할 때의 '극'이다. 단순 직역하면 '찢어진 간격'이다. 쉽게 '분열'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이제 설명을 하나씩 따라가 보자. 1) a'계가 원래대로 복구되었다. 이것은 L2의 타원 체험 공간이다. 2)그런데 사실 거리상으로 축소되었고, '자'쪽으로(타원의 왼쪽을 기준으로) 줄어들었다. 그 줄어든 타원이 L1이다. 이때 L1의 타원 오른쪽 끝 점을 따라가 보면 삼각형의 빗변에 해당되는 a의 강도가 있다. L2에도 해당되는 강도 a가 있다. L2에 비해 L1의 a에너지는 '상승'되어야 한다. 이를 야스나가 선생은 'a 에너지는 이를 무시할 수 없으므로 그만큼 레벨이 상승한다'고 말한다. 이 레벨 상승에 대한 이후 설명을 보면 이해가 잘 안 갈 수 있다. 쉽게 이해하려면, 우리의 a는 언제나 늘 에너지를 낼 수 있고, 이 에너지에 기반해 '체험'이 가능한데 그 '균형을 조절'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대응 출력'이다.


 만약 정상적이라면, 이는 단순하다. 외압 b라고 앞서 가정했으므로, 그것은 이전에 내가 예시를 들었던 '담배를 피우고 싶다'에서 '담배가 없는' 외압이다. 아까 굳이 상세하게 설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외압을 지각하면(a'에 입력되면) 나는 그에 맞춰 당연히 a에너지를 올려 대응한다(담배를 사러 간다는 에너지를 쓴다). 이 상황이, 가설적 탄성률 장애 (a)에서는 탄성체가 거리적으로 축소되었고, 그에 따라 (불가피하게) 대응되는 a 강도가 요구되어 주체는 그 에너지를 상승시키는 것이다. 그랬을 때 지각상의 b 거리는 a'에 따라야 하므로 L2에 위치한다. 그런데 a에 의한 거리 평가는 L1이다. 만약 정상 체험으로 예시를 든다면(이건 분명 해선 안 될 예시다...), '담배가 없다'의 체험 공간에 분열이 일어나 공허한 담배가 느껴지는 것(담배가 없는 게 아니라 '담배'라는 실체감이 분열된 것)이 아닐까...(역시 억지로 도식→체험을 하려니 이런 발상이 나타난다. 앞서 야스나가 선생이 '전인적 이해'를 끊임없이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쉬운 이해를 위해 억지로 대입한 데에 양해를 구한다)


 이 상황은 '매우 역설적인 균열'이다. 주체는 당연히 이 가설적 장애를 인지하지 못한다. 이후 설명이 야스나가 선생의 통찰인데, '만약 알고 있다면, CX로 표시된 새로운 '팬텀 공간'에서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고, 그렇게 하면 a와 a'가 분리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가 이 장애를 모르기 때문에, 본래 '기준선'에서 '사태'를 처리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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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도식을 다시 보면, 주체는 높은 a에서 미끄러진(강제적으로 저하된) a'를 지나 체험 공간에 투영된 걸 지각하기에 '분열된' 두 체험 공간 위에서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타원의 eE-Ff를 떠올려 구조를 의식해 보면 도식 3-6이다. 타원의 끝에 위치해야 할 f가 F보다 앞에 놓이는 '균열'이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사태의 방식은 '근본적인 전제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관습적인 도식으로 사태를 처리하는' 데서 이뤄진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18-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18

 야스나가 선생이 말하길, 생명체에게 이러한 '습관성의 고집'은 일반적으로 매우 강한 게 자명한 사실이다. 이 고집으로부터 L1과 L2의 분열이 일어나고, '원래라면 하나의 점이어야 하는 것이' '거리적인 복시'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실제로 두 개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실감 공간의 끝 f와 그 틈을 사이에 두고 외부로 이탈한 이미지, 즉 형해화된 대상 도식 F로 분열된 것'이다. 즉, 'F가 f를 넘어서는 새로운 상황'이 발생한 것이고, 정상적인 형태인 AFf대신에 Af-F라는 새로운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여기서 하이픈(-)은 그러한 역설적 균열을 의미한다.


 Af-F 체험 공간과 가장 적합한 임상 형태는 '이인증'이라고 한다. 이인증을 체험하는 환우들의 말 중에는 '유리판 하나가 가로막힌 것 같은', '어딘가 비현실적이고 그림자 같은'이 있다. 사람을 '마리오네트', '짚인간', '고무 인형' 등으로 진술할 때도 있다. 이 역설적 균형 상황을 보다 더 이해하기 위해 야스나가 선생이 들은 예시는 '알-껍질' 비유다. 이전 논문에서 '생달걀'로 예를 들어, 그것은 원래 껍질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흰자 부분이 수축하여 껍질과 박리가 생겨 난 공간으로 풀어냈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19 / 자기 자신, 박리, 껍질-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19 / 자기 자신, 박리, 껍질

 이것이 앞서 탄력은 그대로지만 탄성체가 거리적으로 문제가 생긴 가설 장애 (a)의 도식이다. 그렇다면 탄력에 저하가 생긴 경우인 (b)는 어떨까? 야스나가 선생은 이 차이가 매우 미묘한 것이지만 '깊이 파고들면 의외로 흥미로운 점이 나올 수 있다(임상적으로도 대응될 수 있다)'고 말한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20-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20


 앞서 도식 3-5를 보며 (a)와 (b)의 경우가 같이 표기되었단 걸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식 3-8은 (b)의 경우다. 당연히 도식만 보면 뭔 차이야? 하실 것이다. 설명을 보자.


(b)의 경우는 도식적으로 훨씬 간단하다. a’는 단순히 약해지고, 더 멀리 떨어져 있으며, 이미지는 그곳에 투영된다(도식 3-8의 L3). a는 관습에 따라 그대로 남아 있다(L2). 그 결과로 생긴 균열은 (a)의 경우와 동일한 성격을 가진다. 주체의 체험(착각) 방식은 (a)의 경우와 완전히 동일하게 추론할 수 있다. 약간의 차이점은 전체가 다소 멀리 평행 이동한 것과, (a)의 경우처럼 a의 강제적인 상승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더 큰 논점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우선 (a)와 (b)의 차이가 크지 않다는 포괄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20~221


 따라서 일단은 별 차이가 없다는 식으로 넘어가도록 하자. 정신 운용(특히 언어로 표기된 체험)에 미묘하고도 민감한 인식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분명 이 미묘한 차이가 얼마나 체험적 차이를 야기하는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가를 찾으려면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 도식에 대한 이해-인식의 뼈를 갖춘 작가를 나는 여태 단 한 명도 발견한 적은 없다. 그저 부분적으로 찾아 비교함으로써 흥미로운 차이가 도출되는 비교문학적...).


 



 이제 임상 사례를 두고서 제1공식 Af-F의 체험 공간이 어떤 성질들을 나타내는지 야스나가 선생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대표 증상으로는 '이인증'이다. 다만 제4공식까지 제시하는 이후 공식들에 있어 기초가 될 수 있는 이해이므로 좀 더 상세히 다루고 넘어가길 권장한다고 말한다.


 먼저 '따라다니는(붙어다니는)つきまとい' 성질이라고 직역한 성질이다. 이 성질은 쉽게 말해 '체험 공간적 성질'이다. 즉, 앞서 나타난 역설적 균열이 자신의 체험에 늘 따라다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아무리 '주의를 집중해 지각 체험을 강하게 해도, 주의를 약하게 해 체험을 약화시켜도' 동일하게 따라다닌다. 결국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증상 자각이 된다.


 두 번째는 '대지의 이탈(벗어나 달려나가는)大地逸走' 성질이다. 이 성질은 본래 '팬텀 공간'을 위한 가설 체계로 나아갈 때 야스나가 선생이 '착각 운동'에서 힌트를 얻은 데서 연관된 것이다. 이는 인용으로 대체한다.


 우리는 평소에 교대로 발을 내딛으며 걷고 있지만, 발의 길이와 지면까지의 거리는 거의 자동적으로 측정되고, 확인되어 하나의 운동 도식과 운동 습관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발을 내리려 했을 때 갑자기 발이 단축되었다고 가정해보자(그리고 주체는 이를 알지 못한다고 하자). 내디딜 것으로 예상한 곳에서 발이 땅에 닿지 않거나, 예상했던 만큼의 저항이 없을 것이다. 주체는 그 순간 당황할 것이며(휘청거림을 느낄 것이다), 이때의 운동 착각의 방향은 '갑자기 대지가 가라앉았다'는 방향일 것이다.

이 비유에서, '단축된 다리'에 비유되는 것은 팬텀 공간(a)이고, '대지'에 해당하는 것은 관습적인 거리로 위치한 '대상'이다. 이 비유가 우연히 적절했기 때문에 인상적으로 보이는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착각 운동에서는 '움직인다'고 느껴지는 것이 평소에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쪽이라는 점이다. 이로 인해 이러한 체험의 충격성과 주체를 혼란스럽고 당황하게 만드는 성격이 있다.

좀 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운동이나 거리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어느 한쪽을 기준으로 삼아(그쪽을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여) 측정된다. '대지'란 그렇게 기준화된 쪽을 의미한다. 인간은 대지에 대해 움직이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그러나 이는 본래 그리 간주하는 것이 더 편리하고 합리적이기 때문일 뿐, '대지가 계속 움직이고 있다'고 간주해도 절대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인간은 이미 대지를 불변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운동 측정을 그 기준에 따라 '구성'하고 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항상성'이란 일반적으로 이러한 이미 결정된 구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구성'의 전제가 된 조건이 잘못되었을 때(그리고 주체가 그 오류를 알지 못한다면) 구성이 견고하고 잘 이루어졌을수록 그 구성 구조 전체가 흔들리고 동요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이 '지반이 미끄러지는' 듯한 충격은 이인증의 경우에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존재한다. 더 나아가 후술할 전형적인 분열병 체험 방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필수적인 핵심 중 하나이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이 마치 유동하는 모래처럼 움직이기 시작하는 상황을 상상하며, 그 감정에 이입해주길 바란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22-224

 

 다음은 자아 수축감이다. 이 성질은 대상 도식(대지)의 이탈감과 상대적인 것으로, '본래 일상적인 자아 소속감을 가진 공간'이 '이탈된 면'과 분리되어 수축하는 듯한 감각이다. (착각 운동-상대성을 놓치지 않으면 이해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는 외부 세계에 대해 자기 자신(자아 도식)이 '약해지거나 움츠러드는' 느낌이 될 수 있으며, 외부 지각에 의해 '침입당하는' 자극에 대한 반응(a 에너지의 강제적 상승 효과에 의한)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야스나가 선생은 '대지 이탈감에 의해 가려져 눈에 띄지 않을 수 있고, 반대로 대지 이탈감을 가려 더 두드러지기도' 한다고 말한다. 더해서, 그 다음 성질은 이런 '대지 이탈감'과 '자아 수축감'이 동시에 공존하는 성질이다. 다만 이것이 실제 환자에게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는 포착하기 힘들 수 있다. 이에 대해 야스나가 선생은,


진행된 분열병형 체험에서는, 후술할 여러 기제가 더해져 더욱 격렬해지고(특히 자기 신체 의식의 국면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자명하게 자신을 신체 공간 내에 두었던 것이 흘러나가고 유출되는 두려운 감각을 체험하게 된다. 동시에, 역설적으로 외부에서 압도당해 자신의 '실체'는 수축되고, 세계가 유입되고 침입해오는 감각을 느낄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공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빨려 나가면서도 동시에 빨려 들어오는 감각). 이러한 현상들조차 이 이론적 이해에 비추어보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결론이 된다.

이와 같은 역동적 성질은 이 책과 같은 방식으로 처음 정의된 체험 공간의 성질로서, 기존의 어떤 개념으로도(예를 들어 자아 경계선 같은 가상 경계선을 그리는 것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25


 라고 말한다. 마지막은 f-F와 '패턴 역전'과의 관계다. 이것은 본래 야스나가 선생이 '패턴 역전'을 시작으로 '팬텀 공간' '단축' 등을 거쳐 '탄성체의 탄성률 저하'로 나아간 데에 따른 맥락이 있어야 이해되는 성질이다. 다만 이 시리즈에서 그 상세 논의를 스킵했으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도식적으로 역설적인 것처럼 기술될 수 있는 이러한 체험 공간이 실제 당사자의 체험에서 그렇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그렇게 나타난 것일 뿐이다. 이 논의에서 사용되는 '칼집 패턴' 개념은 본래 언어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와 더불어 라캉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야스나가 선생의 논문에서 활용된 개념인데, 큰 틀에서 보면 세부에 속한 내용이므로 건너뛰도록 한다(중요도가 낮다는 의미는 아니다). 소쉬르의 S/s 관계로부터 시작된 특정 철학 이론 유행에 관심이 많다면 참고할 만하다.


 중요한 메시지는 '분열병 체험에서는 착각으로서의 패턴 역전'이 발생한다는 말이다. 전인적 이해에 있어 불필요한 오류를 피할 수 있으므로, 이 부분은 좀 다루고 넘어가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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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a와 a’의 대조에 해당하는 점은 하단 삼각형 안에 위치하게 되며(점 P), 이는 정상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a<b의 영역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역시 '패턴' 역전인 것인가? (도식 3-10)

그러나 이것이 착각이라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세 분명해진다. 즉, 이때의 (a, a’)는 사실 새로운 상황, 변화된 '탄성률'에 해당하는 새로운 삼각형에서 고려해야 하며, 그 경우에는 P가 CX 상에 위치해 결코 역설적 영역에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 그 메커니즘은 두 가지 중요한 요점으로 축약된다. 첫 번째는 주체가 이제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기준선을 여전히 환상처럼 고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앞서 언급했듯이, a’라는 것이 a에서 보면 B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외부에서 보면 A처럼 행동하는 이중성이다. (A→B 사이에 위치하는 모든 도식은 — S(기표)도 마찬가지였듯이 — 이러한 이중성을 가질 수 있다는 일반적인 이해도 이 기회에 인식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즉, a’는 a에 대해서는 정상적인 '패턴' 상태에 있다(이는 실체적으로 그렇다). 그러나 외부에 투영된 b(이는 a에 해당하는 것으로, 환상의 기준선에 의해 투영된 환상적인 (b))에 대해서는 a’<(b)가 된다. 이것이 곧 환상적인 '패턴' 역전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제 이 사태가 이렇게 이해되었다는 것은, 순수 논리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었던 그 a<b라는 상황이 (분열병에서조차) 실제로는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솔직히 나에게도 안심이 되는 점이다. 그렇게 비유클리드적이고 이차원적인 상황이 쉽게 실현된다면, 인류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착각, 즉 가상의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앞서 논의한 '패턴' 역전에 대한 이해가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방향성이 여전히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점을 보증한다. 동시에 임상적으로는 더 현실적이고 완화된 형태로 나타나므로, 그 적합성은 더욱 높아진다. 병자는 '패턴'이 역전된 것처럼 보이는 측면(a’<(b))과 그렇지 않은 측면(이 경우 사실상 역전되지 않은 a>a’)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다. 우선, 그것이 착각이라면 착각을 벗어나거나 반착각적인 실제 대처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실제로 "병식이 없다"는 말도 단순히 표면적인 진단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임상가들은 피부로 느끼고 있다시피, 병자는 (매우 급성 상태가 아닌 한) 착각을 하지만 동시에 현실도 인식하고 있으며, 그 나름대로 그것을 구분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더 현실적이고 유연한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28~230

 

 이 대목의 핵심은 '이론적으로도 역설이 아니다'다. 그렇기에 실제 조현병 환우가 '병식을 가지지 않는다'고 단정짓지 않을 가능성, 착각과 현실 인지 간 넘나듬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여지, 무엇보다 그러한 상태에 놓인 실존적 주체가 어떤 '감정'을 지니는지에 대한 헤아리기의 출발. 이러한 것이 중요하다. 본래 '분열병을 분열병답게 만드는' 내적 논리를 이론으로 세우기 위한 야스나가 선생의 여정에 있어 과연 '조현병의 체험'을 일반인이 체험할 수 있는가?에 '불가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실정이 있었다. 그러나 '정상적인 패턴'이 분명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 불가능이 희박해지는 걸 인정할 수 있다(생생한 표상화를 할 수 있는 이성 사용자라면 엄밀히 말해 그러한 '불가능한 세계'가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에 대해 당연히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실제 현장에서 겪게 되는 '불가능한 체험'의 인식을 우리가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가가 관건이고, 오히려 그러한 방향으로 좁혀질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바로 이 미묘한 역설에 의식이 놓여 있었고, 이걸 기준으로 삼아 지금까지 이르렀기에 나의 직관을 더 믿을 수 있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사적 이야기지만, '나는 왜 조현병 환자를 보면 오히려 인간답게 느끼는가?'라는 어디가서 말할 수 없는 이 기묘한 '공감'에 대해 이론적 힌트를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철학이든 문학이든 인간 정신에 대한 이해도를 근거삼아 펼치는 활동에 있어 나에게 불만족스러웠던 건 바로 이러한 '전인적 이해'였다. 어떠한 철학에서도, 어떠한 문학에서도 그 이해도의 심층을 성숙한 인격자로 보여주는 사람이 없었고, 그러한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는 상징 세계라 부를 수 있는 '신비의 세계', 융의 정신 세계에서도 그러했다. 어쨌든 이는 앞으로의 내 과업이다. 내 눈에는 우리 정신이 어째서 그러한 정신으로 현실에서 살아가는지, 그 뼈대에 점차 살과 피가 구성되는 어떤 방향이 포착된다. 돌아와 말해, '조현병'은 지금 우리 시대, 사회에 있어 그러한 '병'으로 진단되는 것이다. 당연히 훗날 그것은 다르게 인식될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


 




 다음으로 넘어가 제2공식 ((ab))-F 차례다. 여기서 오늘은 이만 글을 끊기로 한다. 지금 떠오르는 순서로는 공식을 차례차례 다룬 뒤, 마무리를 지을 예정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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