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만화방] 구리귀신(9) 사라진 아내

일제강점기에는 어떻게 연락했을까?

by 심야초

남편이 캄캄한 유치장에 갇힌 사이, 내연남 '쫄쫄이'와 함께 원산해수욕장으로 떠나버린 억척.

그녀는 유치장 방문은커녕 남편에게 편지 한 장 남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걸까요?


오늘은 일제강점기 시절 사람들의 소통 방식을 살펴보겠습니다.


편지, 전보, 전화가 공존하던 시대

당시 일상 소통은 우편, 전보, 전화가 공존하는 과도기 체계였습니다. 사람들은 사연의 길이와 긴급성, 비용과 접근성에 따라 서로 다른 통신수단을 선택했습니다.


편지는 느리지만 결정적이었습니다. 감정과 사연을 길게 담을 수 있어 연애편지나 결별, 유언 같은 중대한 메시지에 자주 쓰였습니다. 경성의 여학생들이 기숙사에서 고향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유학생들이 조선의 약혼자에게 보내는 이별 통지서도 모두 편지였습니다.


전보는 빠르지만 압축적이었습니다. 전신망을 통해 수시간에서 하루 내 도달할 수 있었지만, 자수 제한과 비용 때문에 핵심만 간결하게 보내야 했습니다. "급병. 즉시 귀가하라" "합격. 축하한다" 같은 식이었죠.


전화는 즉시 소통이 가능했지만 제한적이었습니다. 교환원을 통한 연결로 즉시 통화가 가능했지만, 1920년대 보급은 아직 제한적이어서 모든 가정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은 아니었습니다.


유치장과 감옥에서는 어떻게 바깥세상과 연락했을까?

구리귀신이 유치장에 갇혔을 때, 그는 어떤 방법으로 바깥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을까요? 일제강점기 유치장 생활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면회: 하루 한 번, 30분 이내

현재도 경찰서 유치장 면회 규정을 보면 1회 면회 시간은 30분 이내, 하루 3회까지 가능합니다. 하지만 1920년대는 훨씬 더 제한적이었습니다. 당시 일제는 3·1 운동 이후 '문화정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보통경찰제 도입으로 오히려 감시와 통제를 강화했습니다. 1919년 헌병경찰관 14,341명에서 1920년 경찰관 20,083명으로 늘어났을 정도니까요.

유치장에서는 가족이나 지인이 면회를 신청하면, 경찰관 입회 하에서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면회 시간도 지금보다 훨씬 짧았고, 대화 내용도 모두 감시받았죠. "언제 나올 수 있나요?" "집에 편지 왔어요" 같은 간단한 대화 정도만 가능했습니다


편지: 검열을 거쳐야 했던 유일한 소통 수단

유치장에 있는 사람이 바깥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편지였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엄격한 검열을 거쳐야 했습니다. 수감자가 쓰는 편지는 모두 경찰관이 먼저 검열했습니다. "법률과 질서의 파괴 기타 형벌 규정에 저촉되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고 의심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서신검열이 가능하다"는 규정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구리귀신같은 경우, 유치장에서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려고 해도 "언제 나갈지 모르니 기다려달라" "걱정하지 말라" 정도의 당당한 내용만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바깥에서 유치장으로 보내는 편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족들이 "집에 무슨 일이 생겼다" "급한 일이 있으니 빨리 나오라" 같은 구체적인 내용을 쓸 수 없었죠.


전화는? 꿈도 꾸지 못했던 시대

1920년대 전화 가입자가 조선인 기준으로 5,000명 정도였으니, 유치장에서 전화 사용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변호사와 통화할 권리" 같은 개념도 없었고요. 급한 일이 있어도 가족들이 직접 경찰서에 찾아와서 면회를 신청하거나, 편지로만 소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의 감옥 통신망

흥미로운 것은 독립운동가들이 감옥에서도 나름의 비밀 통신망을 만들어냈다는 점입니다.

공산주의 운동가 박헌영의 경우를 보면, 감옥에서 석방된 뒤 고향집에서 요양하는 척하면서 비밀리에 동지들과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심지어 1928년에는 아내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하기까지 했죠.

8725_1.jpg 박헌영과 부인 주세죽.

또한 재한선교사들이 본국에 보고한 문건을 보면, 일제강점기 당시 감옥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소식이 편지, 전보, 비망록 등 다양한 형태로 해외까지 전해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내일 오후 2시에 명동역 1번 출구에서 만나자"


지금 같으면 카카오톡으로 간단히 보낼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1920년대에는 어떻게 약속을 잡았을까요?


당시 젊은이들은 주로 편지로 약속을 정했습니다. 경성의 모던걸과 모던보이들이 본정(현재의 명동) 거리의 다방이나 백화점에서 만나기로 할 때도 며칠 전에 미리 편지를 보내야 했죠.


"이번 일요일 오후 3시에 조선호텔 로비에서 만나요"라고 쓴 편지가 상대방에게 도착하려면 보통 하루에서 이틀은 걸렸습니다.


급한 일이 생겨 약속을 변경하거나 취소해야 할 때는? 전보를 보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급용. 약속 연기. 편지 따라감'이라는 식으로 핵심만 간결하게 보냈죠. 하지만 전보는 비쌌고, 자수 제한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어려웠습니다.


전화는 어떨까요? 1920년대 조선인 전화 가입자는 5,000명 수준에 불과하다고 이미 말했었죠? 부잣집이나 신문사, 관공서 정도에만 전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화 있는 집 앞으로 와서 기다린다"는 편지를 먼저 보내고, 정해진 시간에 그 집 전화를 빌려 통화하는 방식을 썼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불편했을 텐데, 당시 사람들은 이런 느린 소통에 익숙했습니다. 삼천리 잡지에 실린 기행문을 보면, 신문기자가 5일간의 휴가를 얻어 묘향산 여행을 갈 때도 미리 편지로 숙박업소에 예약하고, 기차표도 며칠 전에 구해두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느린 소통 체계가 때로는 큰 운명의 갈림길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바로 오늘 소개할 구리귀신의 이야기처럼 말이죠.


1925년 7월 8일, 원문으로 만나는 구리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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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귀신 (9) 부부생활《시대일보》1925.07.08

구리귀신(9) 부부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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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억척(아내)이 편지를 써두고 갔단 바람에, 냉큼 (편지를) 뜯어보았으나

하녀: 마님께서 가실 때에 이 편지를 드리라고 하셨어요.

구리귀신: 편지?! 어서 이리 내라.


해석: 남편에게 편지를 남긴 억척

하녀는 마님이 전해 달라며 남긴 편지를 전달하고, 구리귀신이 성급히 손을 뻗는 동작을 맞물려 배치하여 긴박감을 즉시 끌어올리며, 편지의 내용이 곧바로 사건을 촉발할 단서임을 예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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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슬픔이 넘치는 유언장이 틀림없어서

[편지 일부 내용]

경찰서 구류간(유치장)에 가 있는 구리 대감이여. 첩은 이 세상을 비관하여 원산해수욕장으로 향합니다. 나의 의오빠(맥락상 쫄쫄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로 누명을 받고 원통해서 같이 죽기로 하였사오며, 더욱이 구두쇠로 유명한 당신의 아내가 되기가 남부끄러워서 그러하였습니다.


해석: 극단적 선택을 예고하는 억척의 편지

편지 종이가 화면을 거의 가득 채우는 클로즈업으로 제시되어 글자 자체가 서사의 주인공이 됩니다. 모서리를 움켜쥔 손의 긴장감은 방금 전 컷의 성급함과 연결되며 독자가 편지를 막 펼쳐 든 당사자의 심리를 따라가게 합니다. 빽빽한 필체가 ‘원산으로 향한다’는 결심과 남편을 향한 원통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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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편지를 가슴에 안고 슬피 울다가

구리귀신 : 어이구- 이것이 마지막 유언서로구나. 어쿠- 이를 어쩌면 좋으냐. 하나님 맙소사-


해석: 아내의 편지를 안고 눈물 흘리는 구리귀신

구리귀신은 편지를 가슴에 바짝 움켜쥔 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신체 동작으로 절망을 먼저 보여줍니다. 끊어 읽히는 탄식은 당혹에서 부정, 체념으로 미끄러지는 감정의 단계를 청각적으로 상상하게 합니다. ‘마지막 유언서’라는 단정은 상황 판단을 비극의 극점으로 밀어 올리고, 곧이어 ‘이를 어쩌면 좋으냐’가 무력감과 책임감을 동시에 부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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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할 일 없이 원산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길을 떠났다

구리귀신 : 가기는 가지만 그동안 죽었으면 어떻게 하나 다- 내 죄야.


해석: 자책하며 원산으로 향하는 구리귀신

‘할 일 없이’ ‘눈물을 흘리며’ ‘길을 떠났다’는 연쇄 표현은 원산으로 향하는 구리귀신의 처진 어깨와 잘 맞물립니다. “가기는 가지만”이라는 머뭇거림은 목적지로 가긴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할 결과에 대한 걱정과 우려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동안 죽었으면'이라는 최악의 상정은 독자의 시선을 다음 화에서 나올 원산으로 끌어당겨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다 내 죄야”라는 결말 독백은 책임을 자기 내부로 돌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편지 한 장이 만든 운명

억척은 남편이 없는 동안 내연남 '쫄쫄이'와 함께 원산해수욕장으로 떠나버렸고, 구리귀신에게는 한 통의 편지만 남겨둡니다.


이번 에피소드를 통해 보면, 1920년대 사람들에게 편지는 단순한 소통 수단을 넘어 운명을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보나 전화로는 담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과 상황 설명이 편지를 통해 전달되었고, 그 한 장이 구리귀신을 원산으로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지금 시대였다면 어떨까요? "여보, 나 쫄쫄이랑 원산 갔어. 미안해"라는 문자 한 통이면 끝났을 일이죠. 구리귀신도 곧바로 전화를 걸어 "당장 돌아와!"라고 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1920년대는 달랐습니다. 유치장에 갇힌 구리귀신은 전화를 받을 수도 없었고, 편지 한 장에 담긴 절망적인 메시지를 받고는 원산까지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죠.


결국 편지라는 느린 매체가 만든 시차가 이야기의 핵심이 됩니다. 말이 늦게 닿는 사이 마음이 먼저 떠났고, 사람들은 발로 확인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원산으로 떠난 구리귀신의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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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전파관리소, 일제시대 전파감시

[포토뉴스]옛날에는 어떻게 연락하고 다녔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NUxPc_kR4k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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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인사이트] [연재기획-통신은 소통의 역사다 ②] 해방 전후 전기통신, 잿더미 속에서 일군 성과

국가기록원 일제강점기 체포와 수형, 그리고 기록물

■역사산책 21-멀리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전화(2)

1949년 이전에 '우체국'이란 이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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