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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vergreen Apr 15. 2023

2023년 4월

"난 그때도 어렸었는데 말이에요."


금요일,

아이 둘을 시댁에 맡기고 남편과 둘이 보내기로 했다. 얼마만에 오붓하게 둘이 보내는 건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큰 딸의 사춘기로 인해 남편도 어지간히 속이 타들어 갔나보다. 남편이 마실 소주 한병과 평소에 맥주를 먹는 나에게 무언가 독한 걸 먹이고 싶었는지 복분자 소주를 사다 놓았다. 니맛도 내맛도 없는 복분자주를 분위기에 취해 홀짝 대다보니 어느새 기분이 알딸딸해 지는 찰나,


"여보. 그런데 있잖아.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 봤어. 물론 아이가 말을 더럽게 안 듣는 것도 있지만, 그래도 말이지.

아빠도 하나하나 지켜보며 잔소리 하고 엄마도 말 하나하나에 반응하고 짜증고 있으니

아이는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다. "

"여보, 내가 뭐 맨날 그래? 그런것도 아니잖아! 내가 지를 어떻!"

"여보, 당신은 엄마잖아. 그래도 엄마잖아."

기분좋게 함께 먹었던 초밥이 명치에 턱, 아니 다시 목구멍으로 올라온 것 같다. 복분자의 취기도 순식간에 휘발된 것 같다.


'엄마. 무슨 엄마들한테는 무슨놈의 기대치가 이렇게도 높아. 엄마라서 밥도 차려 내야 되, 엄마라서 집안일 티안내고 다 해야되, 오은영박사처럼 모든 감정을 '어머나 그랬어요~그랬구나~'하며 AI처럼 다 받아 줘야 하고 지금도 또 내가 문제라는 거네. 엄마, 엄마 엄마.'

입을 닫아버렸다. 어차피 내 몫이라는 것도 다분히 잘 알고 있었지만 남편의 입에서 저렇게 나오니 나를 질책하는 것만 같아서 듣기 불편하다.


"계속 말해봐. 그래서."

"여보. 내가 혼낼게. 내가 아이를 따끔하게 감정을 빼고 혼내볼게. 한 쪽이라도 아이의 감정을 받아줘야 하지 않을까. 둘 다 아이를 쪼으기만 하면 아이가 숨을 쉴 곳이 없잖아.

정말 미안한데 당신이 아이가 입을 열 수 있도록 들어주면 안 될까?"


'혼내는 게 더 쉽겠다. 저 꼴을 보고 꾹 참고 대화를 하라니.'

삐딱해 진다. 하지만 나도 답을 안다.

한참을 어색한 분위기에서 침묵하다 복분자 주를 다시 들이키며 내가 말을 이어 갔다.



"하긴 당신이 그래도 이성적이니까. 당신이 감정 빼고 훈육해줘. 내가 노력해 볼게. 아이가 미운 짓 해도 못 본척 넘어가고 대화를 이어가 볼게. 해 볼게."

"그래, 여보.  우리 같이 해 보자. 이 또한 지나가겠지."



그 날 밤,

나는 흔들리던 이가 빠지고 시뻘건 피가 철철 흘러넘치는 꿈을 꾸고 새벽 다섯시가 되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누군가의 말처럼 '예민한' 나는 누가보면 별것 아닌 일들을 어쩌면 심각하게 부풀리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모녀간에 관계에서 큰 판의 변화가 생길 것인지 모를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음날,

기분 전환 하러 가자며 여주의 아울렛으로 향했다. 이 곳은 지금 사는 곳과 거리도 가까울 뿐더러 남편이 좋아하는 브랜드가 있어 자주 가는 곳이다. 지난달에도 다녀간 이 곳에서 오늘따라 갑자기 카드 행사가 눈에 띈다.

오늘 이 카드를 꼭 만들어야 상품권도 받고 너무 좋을 것 같다며 카드 부스에 들어가 카드 추가 가입 절차를 밟던 중,

나이가 50 중반즘 되어 보이는 한 아주머니께서 등록된 주소를 보며 놀라신다.



"어머, 이 동네에 사세요? 저도 이 곳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어요."

경기도 여주에서 경상도의 한 동네를 안다고 하니 신기해서 셋다 눈이 똥그래졌다.


카드 정보를 입력한 탭의 처리 속도가 늦기도 했지만 아주머니께서는 무언가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지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말을 이어 가셨다.



"제 고향은 청주에요. 그런데 부모님의 이런 저런 사정때문에 저만 고등학교를 그 지역에서 하숙하며 보냈었죠. 제가 고등학생즘 되니 다 컸다고 생각하셨나봐요.


그런데 말이에요. 제가 자식을 키우면서도 느끼지만 말이에요.

고등학생도 아기란 말이에요.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그런데 왜 그때 저를 그곳에 보내 놓으셨는지 이해가 가질 않아요.


난 그때도 어렸었는데 말이에요. 부모님의 사랑을 그리워 하는.


그 시절 DDD전화라는 게 있어서 100원을 넣고 엄마 목소리를 들었어요...."


눈물이 나오려 한다.

내가.

DDD전화 세대도 아닌 내가 87학번이라는 그 아주머니의 여고생 시절이 고스란히 떠올라 목이 잠긴다.



고작 열 셋인 내 딸 아이.

다 큰 줄 알고 자고 일어나면 방 정리도 좀 제대로 하길 바랬고

숙제도 스터디 플래너 미리 작성하면서 제대로 하라 윽박질렀고

친구들과의 교우관계도 원만히 지내고

돈도 계획적으로 쓰길 바라고

독서도 평일에 틈틈히 해서 지적으로 성장하길 바랬던

완벽한 이상주의자 엄마 밑에서

너는 어떤 생각으로 살았을까.



너도 고작 어린 아이인데 말이다.

너도 그 아주머니처럼 엄마의 따스한 목소리를 듣고파 했을 것이고

엄마 품에 안겨  어리광도 부리고 싶어 했을 텐데...



코끝이 찡해진다.

짧은 순간 만남을 뒤로하고 카드 부스를 나서는데 아주머니께서 부르신다.

"저기요! 제가 드릴 건 이것밖에 없어요. 초코렛 드릴게요!"


초코렛을 각자 하나씩 받아 들고 나니

엄마의 사명을, 아빠의 사명을 온전히 잘 감당하라는 징표같이 여겨진다.



비장하게 주머니에 넣고 걸어가는데 딸에게서 전화가 온다.

"엄마! 마라탕 먹어도 된댔잖아! 근데 할머니가 안먹는대! 진짜 인간의 존엄성 따윈 없는 이 집!

진짜!"

"할머니가 안드신다면 못먹는거지! 왜 또 짜증이야!"

"아니 엄마가 또 왜 짜증 내냐고!"



끊고 나니 손에 든 징표같았던 초코렛에게 부끄럽다. 멀었다. 딸과 편하게 대화하는 엄마가 되기란 많은 훈련이 필요할 것 같다. 뭐 내 인생에 쉬운게 어디 있었나. 나는 또 이 힘든 과정을 훈련할 것이 몇년 후에는 나와 딸의 이야기를 웃으며 회고하며 글을 쓰고 있겠지.



학교에 기간제 교사를 하느라 태어나자마자 할머니집에 3년 맡겨 놓았던

나의 분신같았던 딸아이가 예쁘게 양갈래 머리를 하고

고운 원피스를 입고서 할아버지 차에서 내려 내게 달려오는 모습을 떠올려 본다.

"어어어엄 마아아아아~!"

평일은 아이를 그리워하며 사진을 바라보며 눈물 짓다 잠이 들었고

금요일 퇴근하고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평생 사랑을 주겠노라며 다짐했었다.

그때 넌 내게 내 세상 전부였었고 내 우주였었는데 말야.



어쩌면 내 주변엔

누군가 완벽하게 예비해 놓은 사람들이

완벽한 타이밍에 나타나

나에게 가야 할 길을 툭툭, 넌지시 던져두고

'이렇게 살아봐라'하고 길을 안내해 주시는 것만 같다.



책상 위 두개의 초코렛을 먹지않고 딸아이와 나의 관계가 개선될 때까지

뜻을 정하고 마음을 다잡고

입을 다스리며 행동을 고쳐야겠다.




여전히 내 세상 전부이자 우주인 아이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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