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류 소비를 줄이는 것이 개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보호 방법"이라는 말이 있다. 지구온난화를 초래하는 온실가스의 20%를 축산업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자동차 사용을 절반으로 줄이는 것보다 고기 소비를 반으로 줄이는 것이 지구온난화 방지에 효과적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폴 매카트니는 2009년에 '일주일에 하루라도 식탁에 육류 요리를 올리지 말자'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의 말을 따라 나도 몇 달 전에, 목요일을 '고기 먹지 않는 날'로 정한 적이 있다. 남편의 동의도 구했다. 일주일에 하루쯤이야, 처음에는 쉽게 생각했다. 하지만 목요일에 고기를 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까지 몇 주 걸리지 않았다. 냉장고에 남아 있는 고기를 먹어치워야 하는 날이 목요일이거나, 남편이 깜빡 잊고 그날 닭강정 같은 고기류 포장 음식을 사 오거나, 무심결에 주문한 피자에 고기가 들어있거나, 아기한테 고기를 먹이려다 보니 나도 먹고 있거나, 그런 식이었다.
그럼 하필 목요일만 그런 것이었냐 하면 그게 아니라, 일주일 중에 고기를 안 먹는 날이 거의 없다는 걸 그때 알게 됐다. 적잖은 충격이었다. 나는 닭고기가 그렇게 맛있는 음식인지 잘 모르는 사람인 데다가 굳이 나누자면 고기보다는 풀을 조금 더 좋아하는 쪽이기 때문에 평소에 고기를 그렇게 많이 먹고있는 줄 몰랐다. 치킨이나 피자, 족발을 좋아하는 남편의 영향을 받은 탓도 있지만, 그런 것보다 사실 이제는 고기가 일상 속 메뉴에 너무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탓이 더 크다. 하루 세끼 먹은 음식 중에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거니와 배달 음식 같은 경우만 봐도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아기 디데이 달력 귀퉁이에 적어놓았던 '고기 먹지 않는 날'
그렇게 한동안 '고기 먹지 않는 날'은 지켜지지 못했고, 그야말로 운이 좋아야 고기를 안 먹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마음 한 귀퉁이에 찝찝한 마음이 쌓였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채식 요리책을 쓱 들춰보게 된 건 그런 전과 때문이다. '고기를 안 먹어야지' 생각해도 막상 '그럼 뭘 먹지?' 하며 막막했었기 때문이다. 책을 펼쳐 채식 음식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날로 3권을 빌려왔다.
<채식 밥상>, <오늘 조금 더 비건>, <채식은 어렵지만, 채소 습관>
<채식 밥상>은 심플하게 요리 레시피만 나와 있는 책이다. 먹고 싶은 음식을 따라하기 쉽다.
<오늘 조금 더 비건>은 비건 요리 레시피를 유쾌한 네 컷짜리 만화로 즐길 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채식이 맛없다는 것은 편견이고 고정관념"이라고 했다. 채식요리를 맛있게 즐기는 저자의 모습을 보면서, 채식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충만한 세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채식은 어렵지만, 채소 습관>은 내가 실천해야 할 방향을 정확히 알려줬다.
매일 먹던 그대로 먹어도 괜찮습니다. 채소만 조금 더한다면요.
책 표지에 쓰여 있는 말이다. 저자도 자신이 채소 소믈리에이긴 하지만 채식주의자는 아니라고 한다.
저는 먹고 싶은 걸 먹고 싶은 만큼 다 먹어요. 하지만 뭔가 먹을 때마다 채소도 많이 먹습니다. 평범한 일상에 '약간의 채소를 더하는 일'을 한 것뿐인데 무기력함과 피곤함이 사라졌고, 입맛이 저절로 건강하게 바뀌었어요.
그러면서 딱 일주일만 해보면 자기 말에 공감하게 될 거라고 한다. 물론 '채소만 조금 더한다면 매일 먹던 그대로 먹어도 괜찮다'는 말은 환경적인 측면에서 한 말이라기보다 건강적인 측면에서 괜찮다는 말이지만, 묘하게도 '고기를 덜 먹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나를 자유롭게 해 줬다. '고기를 덜 먹는 것'에만 쏠렸던 관심이 '채소를 더 먹는 것'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채소를 더 먹으면 결과적으로 고기를 덜 먹게 될 테니까. 채소의 쌉싸름한 맛을 좋아하는 덕분에, 앞으로 채소를 많이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외려 즐거웠다.
어글리어스 채소 박스.
며칠간 책에 있는 레시피 중 표시해 놓은 45가지 가운데 6가지를 만들어봤다. 구운 애호박, 구운 가지, 애호박 고추장찌개, 팽이버섯전, 대파 버섯 볶음밥, 채소 월남쌈으로, 요리라고 하기엔 소박한 것들이다. 구운 애호박이나 구운 가지 같은 경우에는 썰어서 마른 팬에 구운 다음 소금과 오일을 더하면 끝이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맛이 어찌나 좋던지, 밥을 푹푹 퍼서 허겁지겁 먹었더랬다. 구운 가지의 쫄깃한 맛을 이날 처음 알았다.
또 팽이버섯전도 이번에 얻은 수확 중 하나다. 이것도 만들기가 쉽다. 한입 크기로 나눈 팽이버섯에 밀가루를 얇게 뿌린 다음 달걀물에 적셔 노릇하게 부치면 완성이다. 베어 물 때의 식감과 향이 말도 못 한다.
팽이버섯전. (요린이가 만든 것이니 참고만 해주세요ㅎㅎ)
맛있고 간단한 채소 음식은 요린이도 춤추게 하나보다. 앞으로는 어떤 걸 만들어볼까 생각하면 두근두근 설렌다. 만들기 쉬우면서도, 먹어보지 않았던 음식들이라서 더 그렇다.
안타깝게도 채소 맛을 모르는 남편은 시큰둥하다. 오늘도 채소 월남쌈을 만들어 먹는 내 옆에서, 단짠 매콤한 제육볶음을 만들어먹었다. 전에는 자극적인 음식을 만드는 남편에게 잔소리를 했겠지만 오늘은 제육볶음에 넣을 양파와 양배추를 한가득 썰어줬다. '채소만 조금 더해도 충분하다'는 채소 소믈리에의 말을 기억한 덕분이다. 그러고 보니 채소 맛을 모르는 남편이 좋아했던 채소 요리가 하나 있다. 바로 버터에 감자를 데굴데굴 굴려서 만든 알감자 버터구이(휴게소 감자)다. 알감자가 없어서 감자를 4등분 해서 만들었다. 아무래도 버터맛 때문에 좋아했던 것 같긴 하지만, 남편이 좋아할 만한 채소 요리를 더 찾아내는 것도 남몰래 가진 나의 계획 중 하나다.
남편도 좋아한 채식요리, 알감자 버터구이. (팬을 흔들어서 구워야 한다는데 주걱으로 뒤적거렸더니 모양이 이렇게 됐다)
이렇게 채소를 조금 더 먹는 일이, 건강에는 도움이 된다 쳐도, 환경에도 도움이 될까? 물론 도움이 될 터다. '완전한 비건 1명보다 불완전한 비건 10명이 낫다'는 말도 있다.
이번에 채식주의자의 단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채식주의자의 단계
프루테리언
과일, 견과류, 곡물 허용
비건
과일, 견과류, 곡물+ 채소 허용
락토 베지테리언
과일, 견과류, 곡물,채소+ 유제품(우유) 허용
오보 베지테리언
과일, 견과류, 곡물,채소+ 달걀 허용
락토 오보 베지테리언
과일, 견과류, 곡물,채소, 달걀, 유제품(우유) 허용
페스코 베지테리언
과일, 견과류, 곡물,채소, 달걀, 유제품(우유) + 생선 허용
폴로 베지테리언
과일, 견과류, 곡물,채소, 달걀, 유제품(우유), 생선+ 닭 허용
플렉시테리언
과일, 견과류, 곡물,채소, 달걀, 유제품(우유), 생선,닭+ 소, 돼지 허용
바로 소와 돼지를 가끔 먹는 플렉시테리언도 채식주의자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아무 때나 먹고 싶을 때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게 아니라 스스로 정한 원칙에 따라 채식 중심의 식사를 하는 것을 뜻한다. 고기를 완전히 끊을 자신은 없지만 이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플렉시테리언 되기'를 꿈 노트에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