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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언니 Apr 27. 2024

차갑고 엄격한 아빠

 아빠에게 수많은 장점이 있지만 사실 자식들에게는 다정하고 따뜻한 분은 아니었다.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는 아빠에게 사랑을 받았던 기억의 조각들이 있지만, 대학생이 되고 이후 나도 내 삶을 살게 되면서 아빠와 살가운 대화를 나눠본 것은 손에 꼽힌다.


 아빠는 8~90대가 되면서 나를 볼 때, 혹은 일상 생활에서도 인상을 쓰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아빠를 보는 것이 좀 언짢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의 나이가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노화와 신체적 고통을 겪고 계셨던 것 같다. 그러나 과묵하고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길 원하지 않는 아빠는 어디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보신 적이 없다. 그리고 여전히 한강 산책로를 하루 3번이나 걸으실 만큼 활동적이셨으므로 아빠가 육체적인 고통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빠의 몸은 서서히 기능을 다하고 있었다.


'아빠는 날 사랑하는 걸까? 왜 이렇게 나를 보면 인상을 쓰시지?'


30~40대의 나는 여전히 아빠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딸이었다(아마 영원히 그러겠지 ㅎ). 그래도 두 손녀를 볼 때만큼은 환하게 웃으셨다. 하지만 평소에는 예전처럼 편안한 표정이 아니고 늘 못마땅한 표정이라 마음이 쓰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빠가 우리를 사랑했던 방식을 곱씹곤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식들 먹여살리겠다고 직장일을 묵묵히 하신 아빠

어린 시절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면서 신나하던 아빠

목공 숙제나 전기 회로 연결 숙제를 도와주던 아빠

집안 전기 공사는 비록 미관상 예쁘진 않아도(ㅋㅋ) 뚝딱 해내서 신기했던 아빠

나를 안고 일본어 자장가를 불러주시며 재워주신던 아빠

어린 시절 북한산이나 계곡에 가면 맛있는 닭백숙을 끓여주던 아빠

해외출장을 다녀올 때면 예쁜 스웨터나 신기한 문구류를 사오시던 아빠

내가 피아노를 전공한다고 했을 때 말없이 지원해주시던 아빠

중학교 때 귀한 그랜드 피아노를 사주신 아빠

예고시절 춘추복과 하복 블라우스를 매일 다려주시던 아빠

책상에 앉아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있으면 화장실을 다녀오시면서 흐뭇하게 보시곤 춤을 추며 나를 웃기려 했던 아빠

새벽잠이 많은 엄마를 대신해서 엄마가 전날 밤 쌀을 씻어 놓으면 매일 아침 조용히 전기 밥솥 버튼을 눌러주던 아빠

6살,2살 두 아이들이 떼를 써서 넋이 반쯤 나가 있는 나의 등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면서

"자식 키우는 게 다 그런 거여" 하고 구수하게 위로해주시던 아빠


이런 따뜻했던 기억들을 곱씹으며 아빠는 나를 사랑했을 거야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봐도 아빠는 엄격하고 차가운 성격을 갖고 있었다. 왜 그럴까? 나는 아빠보다 한참 나이어린 숙부들의 따뜻한 모습을 보며 가끔 그것이 궁금했다. 큰 딸아이와 외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며 나는 아빠를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어느덧 16살이 된 큰 딸아이는 가끔 나의 마음을 너무나 이해해주며 내 마음을 치유해주는 대화를 나눈다. 나는 대화 후에 아빠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아빠에 대한 섭섭함이 많이 풀렸다.


아빠가 엄격했던 이유는 딸아이 말대로 아마 1929년생이셔서 그랬던 것 같다. 즉 여전히 조선 시대 엄부의 모습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스터 선샤인에서 고애신(김태리 분)의 할아버지 같다고 할까? 그 할아버지도 손녀를 누구보다 사랑하나 결코 다정하진 않으시다. 아빠도 비슷했던 것 같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친할아버지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엄격하고 꼿꼿해 보이셨다. 아마 아빠도 비슷한 사랑을 물려받았겠지.


마음이 여리고 감수성과 예술성이 풍부한 아빠가 다소 차갑고 팩 토라지는 성격이었던 건...

아마도 지켜야 할 사람, 아빠에게 의지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인 것 같다. 중농 집안에서 태어난 아빠는 형제 중에 처음으로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이었고,  9형제의 장남 노릇을 했다. 아빠는 공부를 아주 잘 하진 않았지만, 생활력이 강하고 똑똑하고 성실했다. 중농집안이라고 하지만 농촌 살림이 그렇듯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다. 아빠가 일본 유학을 다녀왔지만 명문대를 졸업한 것은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아빠는 직장일을 뼈빠지게 하며 형제와 가족을 보살폈다.


신경쓸 것이 너무 많고, 책임질 사람이 너무 많으면 자연스럽게 가족조차 부담스러워지지 않을까? 더구나 아빠는 마음이 여려 힘들어 하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성격이 못 된다. 그리고 누구에게 나 힘들다고 하소연 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려온다.


아빠는 현재 산소마스크를 쓰시고 요양병원에 계신다. 1달여전 발병한 폐렴이 쉽게 낫지 않는다. 나도 우리 가족도 알고 있다. 아빠의 손을 잡을 수 있는 날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 새벽에 아빠 생각을 하며 글을 쓰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다녀온지 얼마 안되었지만 오늘도 아빠에게 가려고 한다. 우리집에서 병원이 멀어서, 나는 주로 요양원에 계신 엄마를 돌보고 아빠 케어는 다른 형제들에게 맡겨왔다.


그러나, 오늘은 꼭 아빠에게 가보고 싶다. 별일 없이 조금만 우리 곁에 더 계시길. 그치만 욕창까지 시작된 아빠, 너무 힘들면 이제 가도 돼. 아빠가 안 계시면 나는 든든한 울타리가 없어진 기분이겠지만, 이제 나도 어느덧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으니 아빠 뜻대로 건강하게 성실하게, 착하게 잘 살아볼게. 그리고, 우리 언젠가 하늘 나라에서 꼭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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