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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샘 Oct 21. 2020

엄마가 되기까지

난임 진단을 받다

엄마, 엄마는 경이로운 이름이다. 그러면서 많은 책임감을 주는 이름이다. 난 결혼하면 자연스레 엄마가 될 줄 알았다. 내 나이 36살, 난 당연히 엄마가 되어 있을 나이라고 생각했다. 엄마 나이 36살, 난 9살. 9살 난 날 키우는 엄마는 참 커 보였는데, 내가 어느덧 엄마의 나이가 되어있다. 그런데, 난 따로 키우는 아기가 없다. 난 소위 난임 여성이다.


20대의 삶을 돌아보면 정말 열심히 살았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난 이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쇳물이 철철 나오는 단칸방을 자취방으로 얻어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쇳물이 나오기에, 씻기가 어려워 헬스장을 등록하고 헬스장에 가서 세수도 하고 샤워도 했다. 운동은 안 하고 씻고만 나오니 헬스장 아저씨 눈치도 보였지만, 그럴 정신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얼른 씻고 직장으로 향한다. 직장에서 일이 마치면 거의 밤 11시. 버스가 끊기면 어두운 길을 뛰어 집으로 도착한다. 헬스장에서 씻고 집에 온다. 노곤한 머리를 베개에 누이면, 눕자마자 잠이 든다.


직장에 적응하기도 힘든데, 직장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나의 무능력함을 뼈저리게 느낀 여러 사건을 통해서, 나는 독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 직장은 학교이고, 난 교사이다. 외부의 시선에서 보는 교사라는 직업은 '안정적인 직업, ' '방학이 있는 직업'이다. 그런데 직접 교사가 되어 보니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학창 시절, 늘 모범생이고 조금만 노력하면 칭찬받던 내가 학교 현장에 갔더니 철저한 부진 선생님이었다. 소규모 학교에 발령받고 학생들만 가르치면 될 줄 알았지만, 쏟아지는 업무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혼자서 많은 일을 습득해야 했고, 선배 선생님들께서 가르쳐 주셔도 난 마치 깨진 독과 같이 배우지 못했다. 그 당시 나의 별명은 '꼴찌 선생님'이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녹록지 않았다. 여린 성격으로 학생들을 지도하자니 학생들이 잘 따라주지 않는 것 같았다. 자꾸만 위축되었다.


난 그런 내 모습이 싫었다. 내 모습이 너무 초라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남들이 하나를 할 때, 나는 열을 해야 비슷한 성과가 날 듯했다. 남들보다 몇 배 더 열심히 노력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 일찍 가고 늦게 퇴근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학교에서는 업무를 하고 집에 가서는 내일 있을 수업 준비를 했다. 새벽 1시~2시까지 수업 준비를 했다. 한 번은 고구마를 삶느라 가스불을 켜놓고 일을 하다가 졸았다. 그러다 새벽 4시에 잠에서 깼는데, 자취방이 연기로 자욱했다. 고구마가 탄 연기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가스를 껐다.


학생들에게, 동료 선생님들에게 무시받고 싶지 않았다. 나의 열등감을 극복하고 싶었다. 그래서 교과연구회도 가입하여 연구도 열심히 했다. 방학 때 쉬지 않고 연수를 들었다. 대학원에도 진학했고 석사, 박사과정까지 졸업했다. 일을 하면서 공부를 했기에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치고 업무 하면 시간이 금방 가 버렸고, 저녁을 먹을 시간 없이 대학원으로 향했다. 대학원 과제와 시험을 준비하려면 저녁 먹을 시간이 아까웠기에 두유 1개, 바나나 1개 정도로 저녁을 대충 때웠다.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오면 대학원 과제를 하느라 새벽 2~3시에 잠이 들었다. 그리고 6~7시경 잠이 깨어 학교로 정신없이 출근했다.


그러다 보니, 나의 아름다운 젊음의 때가 '일'로 자욱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덧 30대 중반에 들어서 있었다. 누구나 치열하게 살아가는 요즘이기에 투정을 할 수도, 원망을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난, 난임 진단을 받았다. 난소 나이 47세. "조기 폐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1주 후, 아빠의 폐암 말기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고난은 한꺼번에 몰려서 왔다.


난 내 난임을 챙길 시간이 없었다. 내가 맡은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에 학기 중에 휴직을 쓸 수도 없었다. 아빠 간병이 우선이었다. 아빠를 보살피는 것은 절체절명의 과제였고, 엄마와 나, 동생은 모든 힘을 쏟아 아빠를 간병했다. 아빠는 폐암 4기셨다. 아빠는 통증으로 밤에 잠을 잘 주무시지 못했다. 평균 1시간마다 잠에 깨셔서 화장실에 가고 싶어 하셨다. 그럼 위태로운 아빠를 휠체어에 태우고 화장실로 직진했다. 아빠가 일을 보시도록 도와드리고, 뒤처리를 도와드린 후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아빠의 기저귀를 갈아드릴 때면 퉁퉁 부운 아빠의 몸이 안쓰러웠다. 생명이 오는 것도, 생명이 가는 것도,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란 것을 2019년, 35세의 난 깨달았다.


아빠를 천국에 보내드리고 난 주변 좋은 지인들의 도움으로 2019년의 추운 겨울을 견딜 수 있었다. 학생들은 날 좋아해 주었고, 내가 맡은 학생들에 대한 책임도 다 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20년, 난 '난임 휴직'을 신청했다. 시험관 시술을 하기로 한 것이다. 도저히 학기 중에는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내 몸이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월, 드디어 시험관 시술을 경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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