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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샘 Oct 21. 2020

난임 과정을 글로 남기라고?

난임을 글로 쓰기 시작하다.

난 작가가 꿈이다. 뭐, 보잘것 없는 내가 글솜씨도 없는데 작가가 꿈이라고? 스스로에게 콧방귀를 끼기도 한다. 그러나 어쨌든 난 글쓰기가 좋다. 마음이 따듯해지는 글을 써서 사람들의 마음에 온기를 전해주고 싶다. 어떤 글을 쓸까 고민이 많이 되었다.


영어 교육을 전공했으니 영어 교육 관련 책을 써 보는 건 어떨까? 영어 수업에 관한 책을 쓸까? 학부모님들을 대상으로 자녀 영어 교육 방법에 대해 쓸까? 박사 논문 주제인 코칭에 관해 책을 쓸까? 이런 저런 원고를 끄적거리다 시험관 시술에 막혀버린다. 시험관 시술을 하면 뭘 쓰기가 어렵다. 해 보신 분들은 아실 것이다. 힘들게, 힘들게 배아를 정성껏 이식해 놓으면 그 배아가 떨어질까봐 무리해서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렇게 나의 책쓰기 프로젝트는 작심 1달을 넘겨보지 못했다.


난임휴직을 하기로 마음먹은 때, 같이 작가를 꿈꾸는 동료 선생님이 '난임 과정을 써 보는 건 어때? 사실 부끄러울 수도 있지만 이 과정을 쓰면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란 말을 했다. 그렇지만 난 딱히 이 부분을 글로 남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하여 난임 시술 과정을 블로그에 끄적대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책을 쓰고 싶다고 말을 하니, 남편이 '난임 일기' 관련해서 책을 써 보라고 한다. 이게 책이 될까? 누가 읽을까? 그러나 난임 이야기는 진솔한 나의 이야기이고, 나의 서른 여섯, 가장 핫한 주제이다. 그렇게 이 이야기를 조금씩 쓰게 되었다.


2019년 난소나이검사에서 AMH( Anti-Mullerian Hormone, 항뮬러관 호르몬) 수치 0.21(난소 나이 약 47세)를 듣게 된 후, '나팔관 조영술' 검사를 제안받았다. '나팔관 조영술 검사? 이게 뭐지?' 하고 정신없이 인터넷에 정보를 찾으니 아주 무시무시한 검사였다.


"선생님, 이 검사 안 받으면 안돼요?"

"아니요. 꼭 받으셔야 해요. 그래야 국가에서 시술 지원비도 나와요."


나팔관 조영술 검사는 정말 받기가 싫었다. 난 유산의 경험이 있기에, 내 나팔관 중 한 쪽은 뚫려있으리라 장담했다. 괜한 통과의례 같았다. 유산을 했으니 괜찮지 않냐고 여쭤봤더니, 나팔관 조영술 검사를 받아야 국가 지원을 받을 수 있기에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 당시 아빠는 폐암으로 병원에서 사투를 벌이고 계실 때였고, 난 고민이 되었다. 그러나 나에게도 임신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아 나팔관 조영술을 받기로 했다. 인터넷 후기에 몸이 덜덜 떨렸다. 병원 1층으로 가서 진통제 주사를 맞는데, 눈물이 철철 쏟아졌다. '내가 왜? 어쩌다가 난임이 되어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하지?' 안 울려고 했는데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제가 어쩌다가 난임이 되었을까요?"


주사를 놓아주시는 간호사분께서 울고 있는 나를 안아주시고 진정시켜 주셨다. 진통제를 맞고 나서 나는 나팔관 조영술을 받아야 하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3층으로 가서 X-ray를 찍고 차가운 의자에 앉았다. 소독을 하고 조금 뜨듯한 조영제가 배에 넣어지는데, 마치 생리통같은 통증이 자욱히 몰려왔다. 생리통보다 조금 더 큰 통증이 밀려왔다. 아, 너무 힘들다 싶을 때쯤 끝났다. 그래도 원장님께서 조심스레 해 주신 덕분인지 후기에서 읽었던 것보다는 나은 듯 했다.


그런데 나팔관 조영술을 하고 난 뒤가 문제였다. 나팔관 조영술을 하고 난 그 주, 아빠가 돌아가셨다. 생전 처음 질속에서 많은 염증이 줄줄 쏟아져나왔다. 아빠께서 돌아가시자 장례를 준비하느라 처방받았던 피임약을 하루 놓쳐버렸더니 피까지 났다. 이러다 몸이 상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병원에 갔더니 다행이 난소와 자궁은 괜찮다고 하시고 피임약을 놓치면 출혈이 날 수 있다고 하셨다. 안심이 되었다.


아빠 간병과 장례로 지친 몸으로 시험관 시술을 할 자신이 없었다. 나에게는 몸과 마음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시험관 시술을 할 수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러나 난임휴직을 쓸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많이 되었다. 남편과 의논 후, 난임 휴직을 썼다. 난임 휴직을 쓰고 난 후인데도, 주위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학교를 다니면서도 시험관 시술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난임 휴직을 취소했다. 그런데 취소한 당일 집으로 돌아오는데 엄청난 두려움이 몰려왔다. 괜히 나의 경력, 가정의 경제를 걱정하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쳐버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펑펑 울었다. 그리고 다음주 월요일, 다시 난임휴직을 신청했다. 나는 이랬다 저랬다 변덕쟁이인가 보다.


난임 휴직을 쓰기까지의 과거를 회고하며 조금씩 조금씩 글을 쓴다. 글을 쓰는 과정이 아프기도 하지만,  가운데에서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치유가 일어난다. 아, 네가    마음이었구나. 힘들었구나. 애썼구나.’  마음을 서투른  글로 토닥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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