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무상, 무아(=공)에 이르는 흐름과 노사협의의 특성은 유사한가~?
연기와 공 그리고 무상과 무아.
그동안 나는 연기, 무상, 무아(=공), 무득, 불이중도에 이르는 흐름에 대해 수차례 이야기해 왔다.
하여 이와 관련하여 잘 정리된 책으로 이 흐름을 일단락 짓고자 한다.
이 책, <연기와 공 그리고 무상과 무아>는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과의 홍창성 교수가 집필하였는데, "현대철학의 관점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다"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책의 첫 장을 넘기면 다음과 같은 한 줄이 나온다.
"법보종찰 해인사 승가대학에 이 책을 헌정합니다."
_()_
나의 제2의 고향인 해인사가 등장하니, 저절로 합장을 하게 된다.
스물아홉의 강을 건널 때 빡빡머리 깎고 해인사가 있는 합천 가야면의 고시원으로 갔던 2002년 8월 말의 풍경과 당시 해인사로 갓 출가했던 세 분 스님들의 얼굴, 그리고 해인사 법보전에서 수차례 했던 삼천배 당시의 몸과 마음의 상태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는 삼천배를 22회~23회 정도 했는데, 그중 7회는 7일간 연속으로 매일 했었다.
삼천배를 많이 할 당시 어떤 노비구니 스님께서는 삼천배 많이 했다고 우쭐할 거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하셨다. 아상이 없는 완벽한 자신감을 갖기를 원했으나 혹여 아상만 남았을까 봐, 두려운 마음이 있다.
지금은 엄두가 나지 않아 삼천배는 못하겠고, 2021년에 4주간 매일 500배~1,000배를 했던 게 절을 많이 했던 마지막 기억이다. 그리고 지금은 어쩌다가 108배를 한다. 아니면 3배만 하든가.^^
이제 이 책을 쓴 홍창성 교수에 대한 소개글을 보자.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 오고 있다.
유선경 교수와 함께 <생명과학과 불교는 어떻게 만나는가?>와 <깨달음과 역사>를 펴냈고, <미네소타주립대학 불교철학 강의>를 출판했다.
현재 불교의 연기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연기와 공 그리고 무상과 무아>의 상세 목차
들어가면서
1장 불교의 현대적 이해
비교와 융합
공부하는 방법
논의의 내용
2장 연기란 무엇인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인과와 연기
연기
이것과 저것
원인과 조건
인과와 연기
조건과 연기
이것과 저것 사이의 관계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만약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있을 때 이것 아닌 것이 있고, 이것 아닌 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지만, 저것이 있다고 해서 이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과 저것 사이 관계가 필연적일까
서양전통에서 말하는 두 가지 진리
이성의 진리와 연기
사실의 진리와 연기
연기란 필연적이지 않은 의존관계
3장 인과와 관계
1. 인과
우리 일상 속의 인과
인과에 대한 전통적 견해
1) 필요조건과 충분조건
2) 규칙적 생멸로서의 인과
3) 인식의 선천적 범주로서의 인과
여여(如如)한 인과
2. 관계
사물의 구조와 사물 간의 관계에 대한 서양의 전통적 견해
서양의 전통과 견해에 대한 비판
관계로서의 연기
현대물리학과 형이상학
4장 공(空)
연기와 공
공의 실체화는 오류
공의 패러독스
비유비무
묘유
공과 쓸모 있는 허구
현상과 공의 관계
불일불이(不一不二)와 개념적 혼동
현상과 공
현상이나 공이 바탕은 없다
인식론적 논증
존재론적 논증
현상과 공은 동전 없는 동전의 양면
5장 무상
연기와 무상
실체론의 오류
본질주의의 오류
무상한 사물들
저 하늘 구름 한 점의 가장자리는 어디일까
당신 무릎 위 고양이는 몇 마리인가
어느 철학자의 본질주의와 실체론의 문제
지적인 고뇌도 고(苦)다
"상(相)"의 여러 의미
상과 무상
언어와 상
감각질과 상
상이 가지는 문제들
불교가 보는 상의 문제
6장 무아
바라문교와 힌두교의 아뜨만
서양종교의 영혼
불교와 철학에서의 자아(참나)
참나론의 자기모순
오온(五蘊)
오온의 무상함과 무아
오온에 대한 호오(好惡), 오온의 변화, 그리고 무아
허구로서의 전체
쓸모 있는 개념적 허구로서의 나
나의 존재와 관련된 진제와 속제
논의를 마치며
이제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들어가면서
붓다가 성도 당시 음미하고 있던 진리가 연기(然起)라고 전해진다.
바꾸어 말하면, 그의 성도가 연기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으로 비롯되었다는 뜻이다.
이후 전개된 붓다의 가르침 모두가 이 연기법에서 나왔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연기에 대한 이해는 우리를 자연스럽게 불법(佛法)에 대한 깊은 이해로 이끌어 준다.
연기란 모든 사물이 조건에 의해 생성, 지속, 소멸한다는 붓다의 통찰이다.
물질계와 의식계에 있는 모든 것은 조건에 의해 생멸한다.
만물 가운데 어떤 것도 연기의 그물 밖에서 존재할 수 없다.
조건에 의지하지 않고 존재하며 영원 불변불멸한다는 서양종교의 절대신이나 영혼, 바라문교의 브라만이나 아뜨만, 그리고 한국 불교계 일부에서 주장하는 참나는 연기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것도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
이 세상에 자재(自在)하는 실체(實體)는 없다.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스스로의 본성을 가질 수 없다.
만물은 자성을 결여하여 공(空)하다.
연기하기 때문에 자재하지 못하고, 자성을 가지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만물은 연기하고, 연기하는 것은 공하다. 연기가 공이다.
모든 사물은 쉼 없이 이합집산하는 조건에 의존해 생멸한다.
그러다 보니 아무것도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어 끊임없이 변할 수밖에 없다.
만물은 연기하고, 연기하는 것은 모두 무상(無常)하다.
절대신이나 브라만, 그리고 영혼이나 아뜨만은 영원 불변불멸한다고들 주장하는데,
만약 이렇게 무상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이 연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기법을 근간으로 하는 불교는 그런 것들의 존재를 부정한다.
우리 모두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五蘊)을 조건으로 잠시 모여 이루어진 묶음에 불과하다.
이런 조건에 의존하기 때문에 자재하는 실체가 될 수 없고, 변함없는 자성을 가질 수도 없어 공하다.
자성을 가진 실체로서의 나, 즉 아뜨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붓다의 가르침인 무아(無我)가 진리다.
연기와 공 그리고 무상과 무아의 진리는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 '들어가면서' 중 발췌
홍창성 교수는 '들어가면서' 부분에 핵심을 정리해 놓았다.
책의 전체 내용은 위 내용에 대한 현대적인 분석(후벼 팜^^)이다.
나 역시 그동안 나름 공부해 온 것이 있어서 술술 넘어가는 편이었다.
지금부터는 전체적인 내용 중에서 밑줄 그어놓은 부분의 일부를 옮기고자 한다.
모든 책은 직접 읽는 것이 가장 좋지만, 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들 수 있도록 적절한 양으로 필요한 부분만 정리하고자 한다.
불교는 약 25세기 전 붓다가 설파한 깨달음과 열반 그리고 자비의 가르침으로 그 여정을 시작했다.
붓다의 가르침은 오랜 세월 동안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이해됐으며 또 새로운 모습의 가르침으로 출현하는 진화의 과정을 거쳐 왔다.
불교의 기본 성전이 되는 삼장은 한번 완성되어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닫힌 체계가 아니다.
불교는 기존 삼장(경장, 율장, 논장)에 새로운 문헌이 추가될 수 있는 열린 체계를 가지고 있다.
성전뿐 아니라 승가의 교육법과 수행방식 그리고 대중교화 체계 등에 이르기까지 불교는 그 고유의 열린 태도로 풍부한 내용을 더해 왔다.
붓다의 가르침은 전파되는 장소에 따라 새로 적응하고 변화하며 끊임없이 진화하는 생명력을 보여 왔다.
우리도 우리 시대의 문화에 맞도록 불교를 새로이 해석하고 이해하며 또 실천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지구촌 전체가 촘촘히 연결되어 있는 오늘날 불교를 우리 시대에 맞도록 받아들이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불교를 현대적으로 이해하며 진화하게 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불교의 현대적 해석과 이해도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이치에 맞는다고 판단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한된 지역에서 특정한 역사적 배경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는 보편성을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불교를 보편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내가 선호하는 연구 방식은 '비교'가 아니라 "융합"이다.
비교연구는 이론들이 단지 서로 비교가 잘 된다는 사실에 만족할 뿐인 경우가 많지만, 융합으로 진행되는 연구는 다른 결과를 낳는다.
서로 다른 두 개 이상의 이론이 가진 장점을 모아 각각의 이론이 가진 문제점을 보완하고 또 서로 더 큰 설명력을 가지는 이론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일은 단순 비교가 아니라 진정한 융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예를 들어, 현대 서양철학에서 불교의 무아론이 서양의 자아론을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데, 이는 무아론이 서양에서도 그 보편적 타당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는 두 전통의 단순 비교를 통해 생긴 것이 아니라 서양 철학자들이 자아의 존재에 대한 치열한 논쟁 끝에 불교의 무아론이 가진 장점을 받아들여 나타나게 된 현상이다.
한편, 현대 서양철학의 인과론이 가진 다양한 관점과 정교하고 엄밀한 논의가 불교의 연기론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최근 서양 분석철학에서 논의되고 있는 관계론도 대승에서 발전시킨 '비(非)인과적 관계'로서의 연기에 대한 해석과 그 이해를 더 깊게 해 줄 것이다.
불교를 현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교와 다른 이론 체계가 각자 가진 장점을 서로 도입하여 각각의 이론을 더 잘 이해하고 또 각자가 가진 문제를 더 잘 해결하게 하는 융합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나는 불자라면 깨달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기부터 이론적으로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붓다의 연기법이 처음에 12지 연기와 연관되어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연기를 인과로 이해해야 하는지, 연기가 인과라면 어떤 종류의 인과인지, 또 대승과 같이 연기를 비인과적 관계로까지 확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의도 하나씩 접해 보아야 한다.
나는 이 책에서 현대철학의 관점에서 연기의 개념을 분석하며 새로운 이해를 제시해 보았다.
더 나아가 연기의 이해로부터 도출되는 불교의 주요 교리도 연기의 시각에서 논의했다.
연기의 개념이 대승에서 진화한 형태인 공을 살펴보았고, 요즘 서양철학계에서 많이 주목받는 붓다의 무아의 가르침도 연기의 통찰로부터 비롯됨을 보였다.
그래서 이 책은 연기와 공 그리고 무상과 무아를 연기의 시각에서 현대적으로 조명하는 집중적 논의로 이루어져 있다.
연기란 '모든 것이 조건에 의해 생성, 지속, 소멸한다'는 붓다의 가르침이다.
일견 추상적인 이 내용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인과의 사례를 고려하면 쉽게 이해된다.
그런데 20세기 이후 물리학에서 전통적인 인과에 대한 해석과 어긋나는 현상이 보고되기 시작했다.
먼저 후행인과의 가능성이 있다.
일군의 연구자들이 양자얽힘 상태로 연결되어 있는 입자 쌍의 행동을 관찰하는 실험을 고안했다.
이 실험은 이 두 입자 가운데 하나가 다른 것보다 8나노세컨드 먼저 관측되도록 진행되었는데, 놀랍게도 이 입자가 행동하는 방식이 그것의 짝이 8나노세컨드 후에 어떻게 관측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 실험을 해석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어서 이 실험결과가 결정적으로 후행인과의 존재를 보여준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연결된 현상들 사이에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가를 결정하기 곤란한 경우가 있어서, 원인이 결과보다 시간적으로 앞선다는 전통적 견해가 도전받고 있다.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성립하는 동시인과의 가능성도 제기되어 왔다.
이 우주 어느 곳에 두 개의 태양이 동일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로 마주 보며 돌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반론의 여지가 있지만, 이때 두 태양 사이에 존재하는 인력과 도는 힘 그리고 척력과 도는 힘 사이에는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동시인과는 시간적 간격이 없기 때문에 중간 단계도 있을 수 없다.
후행인과와 동시인과가 가능하더라도 이들은 전통적으로 이해되어 온 인과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이들도 정말 인과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인과의 본질에 대한 정의나 인과를 판별할 수 있는 더 나은 기준이 필요하다.
그러나 서양철학에는 인과에 대해 합의된 정의나 기준이 없다.
<상윳따니까야>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된 붓다의 연기에 대한 설명이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
붓다의 설명에서 이것과 저것은 어떤 대상을 지시할까?
이 지시어들이 가리키는 대상은 보통 이 책상 위의 펜, 책, 갈색 의자, 소나무 등과 같은 구체적인 사물들이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전통적으로 물체는 여러 속성이 모여 만들어진다고 여겨졌다.
이것과 저것은 이 의자의 갈색, 모양, 무게, 단단함 등 속성을 지시할 수도 있다.
또 아기의 출생, 노인의 사망, 화재 발생, 다리 붕괴와 같이 변화를 보여주는 사건과 지혜로움, 자기장, 엔진의 기능과 같은 성향을 지시할 수도 있다.
그리고 수나 기하학적 도형과 같은 수학의 대상이나 사전 안에 가득한 단어와 같이 추상적 대상과 개념도 이것과 저것의 지시대상으로 포함된다. 위가 있을 때 아래가 있고, 왼쪽이 있을 때 오른쪽이 있으며, 남편이 있을 때 부인이 있으니까, 이것과 저것은 이렇게 연관되어 있는 개념 또는 그것의 지시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렇게 지시할 수 있는 대상이 무궁무진하다.
<니까야>에서 붓다는 12지 연기를 설명하면서 그것 하나를 이것과 저것으로 가리킨다.
12지 연기는 무명-행-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생-노사로 되어 있다.
여기서 이것과 저것은 명색에서 색과 같이 물체로서의 대상을, 행, 촉, 생, 노사와 같은 변화와 관련된 사건을, 그리고 애나 취와 같은 성향 등 다양한 대상을 지칭하고 있다.
그런데 12지 연기에는 상하좌우나 동서남북 그리고 부부 등과 같이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개념들은 포함하지 않았다. 나중에 논의하겠지만, 대승 이후에 이런 개념들 사이의 관계도 연기로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연기를 '모든 것이 조건에 의해 생성, 지속, 소멸한다'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는데, 학자들은 이 조건을 원인과 조건들로 나누어 보며, 원인이 조건들과 구별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근데 원인과 조건의 관계는 고정불변하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때그때마다의 원인이란 결국 여러 조건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굳이 원인과 조건을 구분해야 할 이유가 불분명해진다.
한편 20세기 후반 미국 철학자 데이빗슨은 그 수많은 조건이 무엇이든지 어떤 주어진 결과를 초래한 사건 전체를 원인으로 본다.
나는 데이빗슨의 견해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원인과 조건을 원인이라는 개념으로 통합하는 데는 찬성하지 않는다. 나는 원인보다는 조건이라는 개념을 선호한다.
그리고 '조건들'이라는 복수로 된 표현을 쓸 필요도 없이 모든 조건들이 모인 상태를 그저 '조건'이라는 단수로 표현하며 사용할 것이다.
나는 연기를 단지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다양한 종류의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존재세계의 모습에 대한 포괄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내 입장은 연기를 단지 인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비인과적 관계까지도 포함해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대승과 더 가깝다.
우리는 12지 연기에서 이것과 저것으로 가리켜지는 것은 사건뿐이 아니라 명색에서의 색과 같은 물체, 그리고 애나 취와 같은 성향도 포함된다고 했는데, 혹여 사건만이 원인이 될 수 있다면 물체나 성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건이 원인이 되는 사례 등이 기술된 부분은 생략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해 이론적으로 다음의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 같다.
첫째, 색, 애 그리고 취는 이것들이 포함된 사건을 지칭하는 약식표현이어서 이 12지 연기 모두는 각각 원인과 결과로써의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이치에 어긋날 정도는 아니지만 꽤 동정적인 해석이다.
둘째, 우리는 이 12지 연기가 인과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서의 연기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동정적으로 해석해 주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12지 연기는 모두 그 순서대로 그다음 것에 대한 조건이 되는데, 이 조건이 반드시 사건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 그 둘째 가능성이다.
<조건과 연기>
나는 둘째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12지 연기 모두를 각각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은 연기에 대한 이해를 인과에 대한 설명으로 맞추려는 지나치게 동정적이고 궁색한 해석이라는 이론적 부담이 있다.
<니까야>의 '갈대묶음의 경'에서 사리불이 식과 명색이 각각 서로를 조건으로 연하여 생겨난다는 점을 밝히는데, 이런 상의 관계도 인과로 해석하려면 형이상학자들이 인정하기 부담스러워하는 동시인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서로를 조건으로 하여 서로가 생겨난다는 연기로 설명한다면 그 부담을 덜 수 있다. 동시인과에 대해 느끼는 부담감이 동시연기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에서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동시적 의존관계를 무수히 경험한다.
남편과 부인, 부모와 자식, 선생과 학생 등은 서로를 조건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동서남북, 상하좌우, 우열 등 그 예를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개념들과 이 개념들이 포섭하는 대상들 또한 서로를 조건으로 존재한다. 이들 가운데 어떤 것도 상호의존관계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과학철학자들은 자연현상이 오직 우리에게 주어진 배경이론에 의해서만 관찰되고 해석된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해 왔다.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인 질량, 시간 그리고 공간조차도 뉴턴의 물리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있어서 각각 다르게 관측되고 이해된다. 유전자도 생물학 이론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대상 또는 개념에 대한 이해가 배경이론을 조건으로 의존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도 연기를 본다. 그러나 이것이 인과는 아니다.
대승은 아비달마학파의 연기에 대한 해석을 이시인과(異時因果)로 표현한다.
그러면서 인과의 개념을 더 확장해서 식과 명색 사이와 같은 동시인과(同時因果)의 경우도 포함하도록 해석한다.
그러나 동시인과는 아직도 형이상학적으로 그 존재를 새로 증명해야 할 부담이 있다. 우리는 또 인과는 아니지만 조건에 의존하는 연기관계라고 볼 수 있는 수많은 비인과적 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시인과와 동시인과에 대한 구분을 그보다 형이상학적 부담은 적으면서도 더 포괄적인 이시연기(異時然起)와 동시연기((同時然起)의 구분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실은 이렇게 시점을 언급할 필요도 없이 전통적으로 이해된 인과와 비인과적 관계를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 관계로서 단지 '연기'만을 언급하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이것과 저것 사이 관계가 필연적일까?>
-> 이 책에서는 이 제목에 이르기까지 경험세계의 존재론적 의존관계와 (언어 및 논리 수학적 세계에 있어서의) 개념적 의존관계 모두 연기의 개념 아래 포섭된다는 점을 살펴보고 있다.
연기란 경험세계와 논리세계에 각각 존재하는 것들이 그 안에서 서로 의존하며 변화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말이다.
저자는 이 중에서 개념들 사이의 의존관계에 대해 이성의 진리와 사실의 진리 모두 연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설명하면서 '논리학과 수학의 세계에서조차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불교의 연기와 공의 가르침을 다시금 확증해 준다', '관찰과 실험을 통한 경험을 바탕으로 얻어진 자연세계의 모든 법칙 역시 필연성을 결여한 채 단지 우연적으로만 참이라는 점에 철학자들이 동의한다'라고 하면서 결국, 배경이론('이것'과 '저것'이 어떠한 것이든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해야만 가능하다는 이론)을 조건으로 연기하므로 연기관계가 필연적일 수 없다는 점은 더 논증할 필요도 없을 것이라고 마무리한다.
<연기란 필연적이지 않은 의존관계>
서양전통에서 구분하는 진리의 두 영역(이성의 진리와 사실의 진리)에서 영구불변의 필연적인 법칙적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는 없다. 모든 대상과 개념 자체가 배경이론과의 연기관계로 존재하고 이해된다.
대상과 개념이 이론에 연기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자성이 없어 공할 뿐이며, 나는 이런 공한 것들 사이의 연기관계가 '달리 어찌 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필연적일 수는 없음이 자명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대상과 대상 그리고 개념과 개념 사이의 의존(연기)관계는 필연적일 수 없다.
불교의 기본 가르침 가운데 하나인 12지 연기설은 과연 우리에게 각 단계들 사이에 결코 달리 어찌 될 수 없는 필연적 의존관계가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는가?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도 원래 서로 중복되는 내용이 많은 두 개의 10지 연기설을 합쳐서 12지 연기설이 만들어졌다는 연구도 있듯이 11개나 13개가 아니라 반드시 12개의 단계가 연기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필연성은 없을 것이다.
한편,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종류의 유정물에 따라서는 6입이 아니라 8입이나 10입이 있을 수도 있고, 또 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외계인들은 늙지도 죽지도 않아 노사(老死)의 단계가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불교의 12지 연기설은 사바세계에서 현재까지의 우리 미혹한 중생에게만 해당될 뿐이다.
다른 가능세계, 다른 생명체들에게는 다른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모든 관계들이 연기로 포섭될 수는 있지만, 인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인과는 연기의 부분집합일 뿐이다.
인과란 어떤 자성과 자성을 가진 사건들 사이에 존재하는 자성을 가진 무엇이 아니라, 이렇게 그러그러하게(여여하게) 연결되어 있는, 자성의 존재를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들 사이의 고리에 불과할 뿐이다. 말하자면, 여여하게 연결되는 자성 없는 것들 사이의 자성 없는 어떤 고리가 인과이다.
나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어떤 관계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 그리고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이런저런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연결된 관계로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가 연결된 관계로 존재하는 다른 모든 존재자와 또다시 관계를 맺고, 이런 관계맺음의 과정은 무한히 반복된다. 이것이 화엄에서 논하는 법계연기의 중중무진한 과정이다.
* 물리학자들도 중력/인력과 관련해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한다. 뉴턴의 중력의 법칙에 의하면 질량을 가진 물체들은 서로 끌어당기는 힘(중력/만유인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 힘은 서로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그래서 비록 그 힘이 극히 미미하지만 서로 우주 반대쪽에 있는 질량이 아주 작은 물체들 사이에도 이렇게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인력은 존재하는 모든 것과 다른 모든 것 사이에 존재한다.
<현대물리학과 관계의 형이상학>
그동안 형이상학자들과 과학철학자들은 주로 양자역학의 연구결과를 이용해 '관계의 형이상학'을 발전시켜 왔다. 학자들이 양자역학을 해석하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소립자의 속성은 다른 속성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이해되고 의미가 있다는 점에는 거의 모두가 동의한다.
이때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속성들 사이의 수학적 관계이다. 소립자들의 세계에서 인과의 존재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불러일으키는 현상이 많이 보고되어 오다 보니 미시세계에서는 인과연기가 아니라 수학적으로 기술되는 관계연기로 법칙적 규칙성을 표현하는 데 더 주목하고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양자얽힘의 현상(*)도 인과연기로는 설명하기 어려워 일종의 관계연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쌍을 이루는 입자들이 서로가 우주의 반대편에 존재해도 항상 동시에 움직이고 변화하는 현상
그런데 입자의 모든 속성이 다른 속성과의 수학적 관계를 통해서만 그 존재의 의미가 부여된다면, 입자의 개별적 존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위에서 데이비드 흄이 속성이 모여 있는 기반으로서의 기체(基體)란 불가사의한 괴물로서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음을 살펴보았다.
불교도 이런 괴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미시세계라고 해서 속성들을 여럿 붙잡아 하나의 입자의 속성들로 묶어주는 어떤 기체가 있다고 보아야 할까? 이런 기체가 없이도 속성들끼리 서로 밀접하게 관계하며 모여서 구성하는 것이 우리가 편의상 "입자"라고 부르는 어떤 가상의 대상이라고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입자에 관한 모든 것을 수학적 관계로 파악되는 속성들을 통해 이해해야 하며 따라서 입자의 어떤 존재적 밑바탕 같은 것을 따로 상정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입자를 구성하는 속성개별자들 각각은 그 존재양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앞에서 현대철학의 속성개별자와 아비달마학파 일부의 다르마가 대승의 관점에서 본 연기론에 의해 자성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미시세계의 속성개별자라고 해서 예외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즉, 이것들도 자성이 없어서 공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입자의 모든 속성이 다른 속성과의 수학적 관계에 의해서만 이해되고 또 그것에 존재의 의미가 부여된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미시세계의 모든 것을 수학적 관계로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는 관계연기의 중중무진을 설하는 화엄의 법계연기를 받아들이는 신심 깊은 불자 물리학자들이 이러한 이론적 작업을 멋지게 완성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나가르주나(용수보살)는 그의 <근본중송>에서 '연기가 공'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실은 만물이 조건에 의해 생성, 지속, 소멸하기 때문에 자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즉 만물이 공하다는 가르침이다. 대승의 모든 전통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공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론(異論)이 없다.
그런데 만물이 연기한다고 해서 왜, 그리고 어떻게 자성을 결여할까?
물리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과현상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것이 내적인 본성, 즉 자성을 가질 수 없어서 공하다.
스스로 존재하지도 못하는 채로 스스로를 스스로이게끔 해 주는 자성을 가질 수는 없다.
개념이든 아니면 그 개념이 포섭하는 대상이든 비인과적 의존관계로 연기하는 것은 모두 자성을 결여하여 공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개념들이 서로 논리적으로 연결되고 의존하여 형성하는 모든 이론의 체계도 공하다. 결국 제법개공(諸法皆空)이다.
<공의 실체화는 오류>
만물은 조건에 의해 생멸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스스로 실체로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스스로의 본성, 즉 자성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사물이 '스스로의 내적 본성을 가질 수 없음', '자성을 결여함'이라는 의미로 '공'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사물이 공하다'는 말은 사물이 자성을 결여한 채로 존재하는 양상에 대한 표현 또는 기술이다.
그런데 대승의 전통은 이렇게 존재의 양상에 대한 표현에 불과한 공을 마치 신비한 공성을 가지고 사물 안에 실재하는 어떤 참된 존재로 오해한 기록으로 점철되어 있다.
사물이 자성을 결여한 채 존재한다는 존재양상에 대한 표현인 공을 사물 안에 존재하는 진정한 실재 또는 실체로 본다면 이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그런데 대승의 역사에서 이런 오류가 범해져 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어 당황스럽다.
불교계에서 흔한 "진(眞)"자나 "참"자가 들어간 말은 모두 공을 실체화한 오류로부터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진공(眞空)"이라는 용어가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점은 위의 논의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진아, 진여, 참나, 참마음 등 "진"자와 "참"자가 붙은 불교 용어는 모두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불성과 여래장 사상 또한 같은 실체화의 오류를 범했다는 의심을 거둘 수 없게 된다.
일본의 비판불교는 대승의 여러 전통이 은연중 브라만이나 아뜨만과 같은 실체를 '진공'이나 '참나'와 같은 이름으로 도입해 불교를 힌두교처럼 기체론으로 변질시켰다는 논점을 제기해 왔는데, 이에 대해 대승 전통에서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공을 그 원래의 술어 용도로 돌려 '~이 공하다'는 표현으로 즉 '~이 자성을 결여하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아무런 철학적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것을 굳이 명사화시켜서 '공'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놓고서는 존재세계에 이것에 해당되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은 명백히 실체화의 오류를 범한다.
공의 가르침은 사물에 자성이 있다는 본질주의적 주장을 반박하여 그 잘못된 점을 고쳐주는 일종의 해독제 용도로 써야 한다. 그런데 독이 제거된 다음에도 이 해독제를 계속 복용하면 해독제 자체가 새로 독이 되고 말 것이다. 공병이나 공의 실체화의 오류는 이렇게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 지점을 읽으면서 나는 붓다의 가르침 중 강을 건널 때 탔던 배는 강을 건넌 후에는 버려야 하는데, 그 배를 짊어지고 간다면 이는 어리석은 행위라는 내용이 생각난다. '공' 역시 본질주의적 주장을 반박하는 용도 이상으로 신줏단지 모시듯 한다면 다시 실체화의 오류와 어리석음에 빠지게 될 것이다.)
<비유비무(非有非無)>
만물이 조건에 의해 연기하기 때문에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로 실재할 수 없어서 내적 본성, 즉 자성을 결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공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아뜨만이나 브라만처럼 영구불변불멸의 본성을 가지고 실체로서 상주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가르침은 불교를 기독교, 회교, 그리고 힌두교와 같은 다른 세계 종교와 구별해 주는 가장 분명한 기준이다.
영원히 불변불멸한 신과 영혼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하는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 비교해 볼 때, (신과 영혼을 포함해) 만물의 연기와 공을 주장하는 불교의 가르침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도 더욱더 공을 아뜨만과 같이 항구 불변의 실체나 기체로 생각하는 대승 전통 일부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불교는 상주론이 아니다.
<묘유(妙有)>
만물은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아서 묘하게 존재한다는 유명한 명제로 "비유비무 묘유"가 있다.
지난 천여 년 동안 공을 논하는 동아시아 대승의 전통에서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렸을 법한 구절이다.
오감에 나타나는 세계의 모습은 그 진정한 모습이 아니다.
우리는 눈으로 입자들을 하나하나 볼 수조차 없다.
우리 의식에 떠오르는 것들은 단지 감각기관이 받아들인 정보내용을 의식이 나름대로 해석해서 만들어 놓은 색성향미촉이 구성하는 현상일 뿐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 인식주관과 세계가 상호작용하면서 생겨난 결과일 뿐, 세계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고 이해되었다.
이렇게 색성향미촉으로 구성된 현상이 존재하는 방식이 실로 묘하다. 그것들은 이 세계에 실체로서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의 존재가 우리 의식 속에 반영되기 때문에 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실재하는 존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존재도 아니다.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채 묘하게 존재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색성향미촉으로 구성되어 드러나는 현상의 세계이다.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말하는 환의 세계이다.
그런데 만물이 조건에 의해 생성, 지속, 소멸한다고 보는 불교에서는 데카르트와 로크가 자연세계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본 작은 입자들마저도 자성을 가지지 못하여 공하다고 판단한다.
우리의 감각이 미치지 못하는 소립자들도 연기의 그물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성을 가진 실체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입자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입자와 그 속성은 다른 입자들 및 속성들과 서로 맺는 관계 아래서 자성을 결여한 채 묘하게 존재한다. 말하자면, 공한 현상으로 존재한다.
이와 같이 입자들의 세계에서도 비유비무 묘유의 진리가 성립한다.
한편, 이런 작은 입자들이 부분을 이루며 모여서 구성되는 집합체도 묘하게 존재한다. 집합체 또는 전체는 부분들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자들과 입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모든 물체는 비유비무 묘유인 것이다.
<공과 쓸모 있는 허구>
나는 앞에서 우리의 경험세계가 감각대상과 감각기관 그리고 의식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생겨난 현상이나 환의 세계로 이해된다고 논의했다. 연기의 일종인 이런 상호작용의 결과물은 자성을 결여하여 공하다. 그래서 경험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우리 인식의 측면에서 볼 때 필연적으로 일종의 허구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경험세계는 본체 없이 단지 현상으로만 존재하는 환의 세계요, 허구의 세계이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이런 허구가 우리 일상생활을 위해서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간주해도 무리가 없고 오히려 쓸모가 있다는 점이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가 자성을 결여해 공하기 때문에 전혀 쓸모없는 물건이라면 이렇게 안심하고 앉아 글을 쓰고 있지도 못할 것이다. 이 의자가 연기하기 때문에 공하고 끊임없이 생멸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이 허구적 존재자가 한동안 이 모양 이 기능을 유지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이것을 의자로 생각하고 잘 이용하고 있다. 또 내가 운전하는 자동차도 수많은 부품들로 이루어져 있는 집합체로서 하나의 허구지만, 그래도 대단히 유용한 허구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당분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해도 무리가 없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사물이 이렇듯 쓸모 있는 허구들이다. 말하자면 우리 세계는 쓸모 있는 허구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에게 이런 것들은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자들로 다가온다. 이렇게 허구로 존재하는 모습을 불교에서는 환이라고 하는데, 철학에서는 좀 더 가치중립적인 개념으로 현상으로 분류한다. 우리의 세계가 환 또는 현상으로 묘하게 존재해서 좋다.
<현상과 공의 관계>
우리가 사는 세계는 만물이 조건이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끊임없이 생멸하는 현상의 세계다.
조건의 집산에 의존하다 보니 현상으로서의 만물은 본체 없이 존재하며 동시에 자성을 결여하여 공하다.
제법개공이다.
그러면 '연기하는 현상으로서의 사물'과 '자성을 결여하여 공한 사물'은 서로 어떤 관계로 맺어져 있을까?
나는 앞에서 '연기가 공'이라는 나가르주나의 주장은 '연기하는 것들은 공한 것들이다'라고 이해되어야 한다고 소개했는데 이에 대해 논의해 보겠다.
연기의 관점으로 파악되는 현상의 세계와 자성을 결여한다는 공의 관점에서 보는 세계는 질적으로 다른 세계이다. 존재세계는 불일불이의 세계이다.
조건이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생멸한다는 연기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계는 분명 천차만별의 삼라만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현란한 현상의 세계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전적으로 자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조명해 보면 이 세상은 아무런 차별이나 분별이 없이 절대적으로 평정하고 적정한 공의 세계이다.
하나의 세계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연기하는 삼라만상이 존재하는 현상의 세계로도 또 아무런 차별이나 분별이 없는 공의 세계로도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래서 존재세계는 수적으로는 불이이고, 질적으로는 불일이다. 나는 대승 전통의 불일불이를 이렇게 이해한다.
결국, 현상과 공을 '두 관점에서 바라보아 나온 하나의 세계의 두 모습'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현상이나 공의 바탕은 없다>
그런데 두 개의 관점으로 바라보아 각각 현상의 세계와 공의 세계로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바탕이라는 그 하나의 세계는 무엇일까.
나는 이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불교와 불교 아닌 다른 종교 및 철학체계가 뚜렷이 구분된다고 생각한다.
세계의 주요 종교 가운데 오직 불교만이 그 '무엇'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현상과 공의 세계 모두 엄연히 존재한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만물이 연기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실체로서 존재할 수 없고 모두 자성이 없어 공하다는 가르침을 기본으로 하는 불교에서는 브라만이나 아뜨만같이 상주하여 연기와 공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불교에는 브라만도 없고 아뜨만도 없다. 무범(無梵)이고 무아(無我)이다.
그렇다면 이런 바탕이 되는 것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서는 현상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실재하는 어떤 것도 그 바탕으로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의 현상세계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현상의 근원이 되는 사물 자체의 존재는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당신이 꿈을 꾸고 있어도, 당신이 영화 메트릭스 같은 기계 안에 누워 있어도, 또 당신이 장님이어도 당신의 뇌가 슈퍼컴퓨터와 연결되어 제대로 된 신호를 받기만 하면 현상세계는 아무런 차이도 없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현상의 존재를 위해 반드시 바탕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
각각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불교의 유식론과 영국의 관념론이 위와 같은 견해를 기초로 형성되었다. 인식론적으로 볼 때, 실체 없이 존재하는 현상세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기체 없이도 입자 및 속성들이 서로 관계하며 모여 대상을 이루고, 사람을 이루고, 태양계를 이루는 이치.
모든 사물의 존재방식은 이런 식으로 기체 없이 모이는 속성들의 집합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근데, 기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각각의 속성은 자성을 가지고 실재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그들은 단지 현상이 아니라 실재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니다.
그들도 역시 현상이고 자성을 결여한다.
이런 속성들은 본체나 기체 없이 다른 속성들과의 관계에서 이런저런 조건들이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여여하게 연기하면서 자성을 결여한 채 존재한다. 바탕 없이 공하게 존재한다는 점에서 실재와 대비된 환 또는 현상이라고 보아야 옳다. 그래서 현상은 존재론적으로도 바탕 없이 존재한다.
<현상과 공은 동전 없는 동전의 양면>
우리 세계의 사물은 어떤 기체나 바탕 없이 단지 현상으로만 존재한다.
이런 현상은 조건에 따라 생멸하기 때문에 공하다.
즉 현상의 세계여서 공한 우리의 세계는 아무 바탕이나 기체도 없이 묘하게 존재한다.
현상과 공은 동전의 양면이다.
단, 그것들은 동전이 없이 마주 보는 양면이라는 것이 불교가 가르치는 섬세하고 묘한 진리다.
<연기와 무상>
석가모니는 무상이 연기로부터 비롯된다고, 즉 만물이 연기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하여 무상하다고 가르쳤다. 모든 것이 수많은 조건이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생멸한다는 붓다의 가르침이 연기법이다.
그 여러 조건 가운데 언제나 어느 하나라도 더해지거나 빠지기 마련이어서, 어떤 사물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항상 변화하게 된다. 그런데 조건 하나하나도 그것을 생멸하게 하는 그것 나름대로의 조건들이 언제나 더해지거나 빠지기 때문에 그대로 머물 수 없다. 그래서 삼라만상 가운데 어느 하나도 변치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없다. 연기에 대한 통찰이 우리를 무상의 진리로 이끌어준다.
싯다르타가 깨달아 성도하게 된 진리는 연기법이지만, 그의 출가와 수행에 대한 동기를 부여한 것은 삶의 무상에 대한 인식이었다.
물질로 된 것은 근본적으로 무상하다.
물리세계를 가장 궁극적 차원에서 연구하는 물리학은 쿼크와 전자를 포함해 존재하는 어떤 입자도 영원히 고정불변할 수는 없다고, 즉 무상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보여준다.
우리 심리세계의 무상함은 물질세계의 무상함보다 직관적으로 더 쉽고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영원히 뜨거울 것만 같던 젊은 날의 사랑이 변치 않고 지속되기란 영화나 소설 밖에서는 어렵다는 점을 우리는 결국 경험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변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하는 감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적인 고뇌도 고다>
잘못된 전제로부터 비롯된 철학적 난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힘들어해 왔다. 어리석음으로부터 비롯된 지적 고뇌도 고이다.
이치를 따져가며 헤아려 보면 만물이 무상하다는 진리를 부정할 수 없다고 인정하더라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불변하는 어떤 것에 대한 우리의 동경과 집착은 벗어나기 어려운 것 같다. 불교를 제외한 세계의 주요 종교가 모두 실체로서의 영혼 또는 아뜨만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이들 종교는 무상하지 않고 항상한 것에 대한 우리의 집착을 충족시켜 줄 절대 불변의 신이나 영혼 같은 여러 상(相)을 제시하고 신자들에게 이것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와 반대로 상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이런저런 고통을 초래한다고 가르친다.
<"상(相)"의 여러 의미>
불가에서는 상을 만들지 마라, 상을 버려라, 상에 집착하지 마라, 상으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한자어인 "상(相)"에는 여러 다른 의미가 있다. 모습, 형태, 상태, 양상, 외견의 모습, 차별의 모습 등. 한편 유식론에서는 상을 외견의 모습이라고 보지 않고 '본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물의 밖으로 드러나 있는 모습과 그것의 본체가 모두 상이라는 셈인데, 이렇게 정반대의 의미를 모두 하나의 한자어 "상(相)"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혼란이 야기되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플라톤의 형상(이데아)의 개념으로 상을 이해하면 이런 혼동의 가능성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은 상이 영원 불변불멸한 이유가 이런 상을 파악하는 이성의 힘을 가진 우리의 영혼이 영원 불변불멸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인식의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이 비슷한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본 그의 논증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 이유는 작은 새가 커다란 망원경으로 관찰된다고 해서 큰 새가 되는 것은 아닌 이치와 같다.
상에 대한 집착은 분별과 차별을 초래해서 연기와 공의 관점을 취해야만 가능한 깨달음의 길에 장애로 작용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철학자들은 사람들이 상을 가지게 되는 주된 이유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면서 가지게 되는 습관과 관련 있다고 판단했다.
예를 들어, 꽃의 색깔과 모양을 보고 명명한 "민들레"라고 불리는 식물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하나의 종이 아니라 여러 다른 종일 수도 있고, 또 이 종은 고정불변한 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이하고 주어진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진화해 나간다. 민들레에는 고정불변한 자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민들레에 고정된 상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통찰은 의자, 바위, 나무, 학교, 구름, 고양이 등과 같이 보통명사가 지칭하는 대상으로 존재하는 이 세상 모든 것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자성이 없이 공한 것들에 대해 우리가 단지 같은 보통명사를 쓴다는 점을 가지고 마치 그것들에 공통된 자성이 있다는 듯이 상을 만들어 집착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연기와 공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다.
서양현대 심리철학자 대부분은 우리가 의식 속에서 느끼는 색깔, 소리, 맛, 냄새 등의 감각질은 물리현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고유한 본질, 즉 자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질의 존재가 우리의 심리 또는 정신세계가 물질세계로부터 독립되어 독자적으로 작동하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서양철학자들은 우리의 심리/정신 현상이 반드시 물질세계와는 다르고 독자적인 법칙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고 보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나는 여기서 심리현상을 분별하고 물리현상을 차별하는 상에 매달리는 이들의 견해가 연기와 공의 진리에 어긋나는 사견(邪見)이라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민들레의 노랑 빛깔은 먼저 민들레꽃의 표면에 반사된 빛의 노란색 부분의 파장이 우리 눈의 망막에 들어와 그 신호가 신경체계를 거쳐 우리 의식에 나타나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의식의 내용으로 존재하게 된다.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말하는 근(根), 경(境), 식(識)의 삼사화합(三事和合)의 과정이 이와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근경식의 연기작용에 의해 생겨난 결과물로서의 감각질은 결코 독자적인 본질, 즉 자성을 가질 수 없어서 공하다. 이렇게 공한 것이 물리현상에 대조되는 심리현상의 특징을 대표하는 상이 될 수는 없겠다. 색깔, 냄새, 맛, 소리의 경험인 모든 감각질은 근경식의 여러 요소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일종의 복합체로도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이미 모든 복합체는 자성을 결여하여 공하다는 논의를 살펴보았다.
<불교가 보는 상(相)의 문제>
상과 상에 대한 집착은 그것에 해당되는 대상들이 어떤 자성을 가지고 그 밖의 사물들과 분별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미혹된 견해를 산출하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
불교에서 잘 알려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사상(四相)은 이 네 가지 상에 대한 집착을 경계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각각의 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나'에 대한 상을 가진다면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아뜨만으로서의 참나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이는 불교의 무아론에 배치된다.
연기와 공의 가르침에 어긋나고 자성에 대한 집착을 일으켜 이 세상을 분별과 차별의 눈으로 왜곡해서 보게 만드는 그 어떤 상에도 매달려서는 안 되겠다. 실은 처음부터 상을 일으키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연기와 공에 대한 논의로부터 만물이 조건에 의해 생성, 지속, 소멸하기 때문에 어느 것도 스스로 존재할 수도 또 자성을 가질 수도 없어서 모든 것이 공하다는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모든 사물은 언제나 그것을 생멸하게 만드는 조건이 더 모이거나 흩어지기 마련이어서 끊임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무상의 진리도 함께 논의했다.
불교가 어떤 종교나 철학보다도 열린 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연기와 공 그리고 무상은 결코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이다.
불교의 무아론은 아뜨만이나 영혼 또는 참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영혼 또는 자아는 '어떤 사람을 동일한 그 사람이게끔 해 주는 그 무엇'이다. 그런데 우리말로 "사람은 누구나 변한다."라고 표현할 때의 '사람'은 실은 영혼이나 자아가 아니라 (성격을 가진) 인격체를 의미한다.
(1) 너무도 많은 시련 끝에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2) 너무도 많은 시련 끝에 그는 다른 자아가 되었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1)을 옳은 표현이라고 받아들이지만, 서양인들은 영혼 또는 자아라는 의미의 self는 결코 변하지 않는 어떤 무엇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다른 자아 또는 영혼'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논리적 모순이기 때문에 그런 대상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2)는 거짓일 수밖에 없다.
서양인들에게 자아/영혼은 결코 변하지 않는 무엇이다. 어떤 것이 파괴될 수 있으려면 그것에 물리적이거나 화학적 또는 어떤 다른 변화가 가능해야 할 텐데, 영혼과 같이 전적으로 불변하는 것은 파괴될 수도 없다. 파괴되지 않는 것은 불멸한다. 그리고 불멸한 것은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이것이 영혼이나 아뜨만에 대해 '영원 불변불멸'이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달아 주는 이유다.
반면, 불교의 무아론은 이렇게 영원 불변불멸한다는 자아 또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21세기 과학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엄밀히 검토해 보면 영원히 고정불변한 self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어떤 인격을 가진 개인 인격체로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우리가 영원불변의 자성을 가진 참나로서는 아니지만 그래도 현실적으로는 몸과 여러 심리상태가 (오온이) 잠시 (약 80여 년 동안) 모여 있는 묶음으로 존재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라고 본다. 그리고 나는 이 가르침이 옳다고 생각한다.
<참나론의 자기모순>
붓다의 무아론은 영원 불변불멸하고 고정된 자아(참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우리와 같은 인격체가 궁극적으로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무아론은 우리가 아뜨만과 같은 실체로서 실재한다는 상주론을 배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나 단멸론도 배제한다. 무아론은 중도의 진리다.
<오온>
붓다는 우리 개개인을 오온, 즉 색수상행식이라는 다섯 가지의 다발이 모여 있는 복합체로 보았다. 이 오온의 각각을 간단히 살펴보겠다.
1. 색(色): 모양을 가진 것, 즉 물질적 또는 물리학적 대상을 말한다. 물리적인 모든 것은 그것이 보이든지 보이지 않든지 공간 속에 존재하고, 공간 속에 존재하는 한 그것은 모양을 가진다.
2. 수(受): 쾌락이나 고통의 감각, 또는 이 둘 다 아닌 무덤덤한 감각.
3. 상(想): 대상의 감각적 속성을 파악하는 심리 상태를 말한다. 하늘의 푸른빛 보기나 꽃향기 맡기, 또는 종소리 듣기와 같은 것들이다.
4. 행(行): 심신의 활동을 가져오는 심리적인 동력. 예를 들어 탐욕과 분노, 애증, 집중, 시샘 등이다.
5. 식(識): 심신 상태의 자각 또는 그 자각 자체를 말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명색(名色)"이라는 말은 모양을 갖는 물질적 대상인 색과 모양이 없어서 이름 불려지기만 하는 심리적 상태 네 종류를 함께 묶어 인간존재를 지칭한다.
여기서, 이 다섯 가지의 다발이 언제나 하나씩 활동하는 것은 아니고, 몇 개씩 서로 모이고 흩어지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모든 현상을 끊임없이 생겨나고 소멸하게 만든다. 그 하나하나의 다발 또한 끊임없이 생멸한다.
붓다는 우리 인격체에 이 오온 이외에 영혼이나 아뜨만과 같이 어떤 추상적이거나 신비적인 것이 추가로 더 존재한다고 말씀한 적이 없다. 붓다는 지극히 경험적이고 논리적인, 즉 과학적인 가르침을 폈다.
<오온의 무상함과 무아>
색수상행식 하나하나가 무상하다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명하겠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오온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존재를 남김없이 구성하고 설명해 주는 오온이 모두 무상하다면 영원히 불변불멸한다는 신비한 영혼이나 아뜨만 또는 참나가 우리의 존재 안에 들어올 여지가 없다.
우리 인간은 색수상행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인간의 모든 활동은 색수상행식의 이합집산에 따라 이루어진다. 따라서 오온은 무상하며, 불변불멸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색수상행식의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는 개인인격체로서의 나 또한 이 오온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어떤 독립적인 추상적 존재자가 아니다. 나는 오온이 속하는 범주가 아닌, 다른 존재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범주오류를 범하게 되고 만다. 개인인격체 또는 나는 색수상행식이 존재하는 범주를 넘어설 수 없다. 결국 색수상행식을 부분으로 하는 전체로서의 나는 허구에 불과할 뿐이다.
(1) 색수상행식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체로서의 나는 허구이다.
(2) 전체로서의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실제로는 색수상행식 다섯 부분과 그것들 사이의 관계와 기능으로 환원된다. 전체로서의 나는 색수상행식이 모여서 하는 일 외에 아무런 다른 변화나 움직임도 새로 만들어 낼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실재하지 않는다.
(3) 나는 색수상행식과 그것들 사이의 관계와 기능을 초월하여 독자적으로 다른 범주에 속해 존재하는 어떤 추상적인 대상이 아니다. 색수상행식과 그것들 사이의 관계와 기능 모두가 바로 나이다. 그런데 이러한 내가 허구임은 (1)과 (2)에 의해 이미 논의되었다.
결론: (1), (2), (3)으로부터 나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쓸모 있는 개념적 허구로서의 나>
색수상행식 다섯 부분이 모인 전체로서의 나는 허구이지만, 실은 대단히 쓸모 있는 허구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색수상행식이라는 다섯 부분과 그것들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전체여서 궁극적으로는 개념적 허구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의사소통의 편리를 위해 이 사람을 "홍창성"이라고 부른다. 나도 각각 나름대로의 색수상행식 다발로 이루어진 전체인 다른 사람을 "김명희", "김현중", "홍길동" 등으로 부른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각각 자신의 오온다발 전체를 지칭할 때 "나"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개인인격체는 고유명사로 지칭되든지 아니면 "나"라는 일인칭 대명사로 지칭되든지 모두 색수상행식이라는 부분으로 만들어진 전체이고, 전체는 쓸모 있는 개념적 허구이다.
그리고 개념적 허구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는데, 기능이 형이상학적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대상을 편리하게 지칭하는, 단지 지시어의 역할만 한다고 보는 편이 존재론적으로 깔끔해서 좋다고 생각한다.
-> 이 대목에서 나는 우리가 '역할놀이'하고 있다는 선스승들의 말이 실감이 난다.
"나"라는 단어는 무상한 오온이 연기하는 과정에서 그때그때마다 이 오온다발을 편리하게 지시하는 역할을 하는 일인칭 대명사다. 이 대명사의 지시체에 해당하는 고정불변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제의 오온다발로서의 나와 오늘의 오온다발로서의 나는 같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그 지시대상인 오온다발들이 인과적/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완전히 별개인 것도 아니다.
비록 '나'라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아서 '나'는 개념적 허구에 불과하지만, 이것은 참으로 쓸모가 많은 허구이다.
<나의 존재와 관련된 진제와 속제>
근본적으로 개인인격체로서의 나는 무상한 오온다발의 연기적 과정일 뿐이다. 이것이 나의 존재에 관한 궁극적 진리, 즉 "진제"이다. 우리는 이 진리를 숙지하고 철저히 내면화시켜야만 깨달음과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 이 궁극적 진리는 깊은 공부와 명상 속에서 음미하고 체득할 수 있는 것이지 평소 분주한 우리 삶 속에서 쉽게 얻을 수는 없다.
그런데 일상을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오히려 시간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인격체로 존재하는 나의 존재를 상정하는 편이 우리에게 실용적으로 유리하며, 이러한 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우리의 일상적 삶이 실은 우리의 생활을 실용적으로 더 성공적이도록 만들어 준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행위를 성공으로 이끌어 주는 진리를 "속제"라고 부른다.
그래서 필자는 붓다의 무아의 가르침이 영원 불변불멸하는 고정된 실체로서의 아뜨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지만(상주론 배격), 그렇다고 해서 속제로서의 동일 인격체의 지속적 존재마저 부정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단멸론 배격).
불교는 그 가르침 하나하나를 이치를 따져가며 받아들이고 수행해야 깨달음에 이르는 종교다.
그래서 불교철학은 불교를 더욱 불교답게 한다.
나는 참선수행과 대중교화 및 자비행도 불법(佛法)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본고에서 다룬 연기와 공 그리고 무상과 무아의 네 가르침이 불법의 근본을 이룬다는 점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겠다. 이 책은 현대철학으로 불법을 해석하고 논의했지만, 나는 여기서 채택한 방법론이 역사적으로 초기불교 및 초기대승불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었던 시간만큼의 시간을 들여 이 글을 썼다.
연기와 무상, 무아와 공에 대한 정리는 이 정도로 되었다고 본다.
근경식이 삼사화합(6근이 6경을 만나 6식이 일어나는 현상)의 인연에 따라 조건생멸한다는 연기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 무상의 이치를 보여주고 있고, 무상하므로 불변하는 고정된 실체는 있을 수 없으니 무아이며, 무아와 공은 결국 같은 의미이다.
한발 더 나아가 연기하므로 상주론과 단멸론을 배격하게 되기에 '중도'이고, 현상의 배후에 자성을 가진 불변하는 고정된 실체가 따로 없이 현상 그 자체가 진제이자 속제이므로 '불이'이다. 결국, 불이중도.
이제 "연기와 공 그리고 무상과 무아"를 현실에서 체득하는 일이 남았다.
삶이 곧 수행이고, '나'라는 것도 결국 삶 자체임을, 그래서 그 삶을 더욱 생생하게 깨어 아름답게 꽃 피워야 함을 가슴에 새기며, 견도-수도-무학도의 과정을 기꺼이 살아내고자 한다.
-> 헌법과 노동조합법에 명시된 단체교섭과 근로자참여법에서 보장하는 노사협의회는 상이한 법률에 따른 별개의 체계입니다. 노와 사가 만나서 협상하거나 협의한다는 것은 비슷하지만 노동조합의 단체교섭은 교섭을 하다가 (노사 간 주장의 불일치가 발생하면) 노동위원회 조정과 조합원 찬반투표를 거쳐 쟁의행위를 할 수 있는 반면 노사협의회는 말 그대로 협의에 그치게 됩니다. 단체교섭과 노사협의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쟁의행위 가능 유무"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총칙 → 협의회의 구성 → 협의회의 운영 → 협의회의 임무 → 고충처리 → 보칙 → 벌칙
제1조(목적) 이 법은 근로자와 사용자 쌍방이 참여와 협력을 통하여 노사 공동의 이익을 증진함으로써 산업 평화를 도모하고 국민경제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신의성실의 의무) 근로자와 사용자는 서로 신의를 바탕으로 성실하게 협의에 임하여야 한다.
제3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노사협의회”란 근로자와 사용자가 참여와 협력을 통하여 근로자의 복지증진과 기업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구성하는 협의기구를 말한다.
2. “근로자”란 「근로기준법」 제2조에 따른 근로자를 말한다.
3. “사용자”란 「근로기준법」 제2조에 따른 사용자를 말한다.
제4조(노사협의회의 설치) ① 노사협의회(이하 “협의회”라 한다)는 근로조건에 대한 결정권이 있는 사업이나 사업장 단위로 설치하여야 한다. 다만, 상시(常時) 30명 미만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이나 사업장은 그러하지 아니하다.
② 하나의 사업에 지역을 달리하는 사업장이 있을 경우에는 그 사업장에도 설치할 수 있다.
제5조(노동조합과의 관계) 노동조합의 단체교섭이나 그 밖의 모든 활동은 이 법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아니한다.
제6조(협의회의 구성) ① 협의회는 근로자와 사용자를 대표하는 같은 수의 위원으로 구성하되, 각 3명 이상 10명 이하로 한다.
② 근로자를 대표하는 위원(이하 “근로자위원”이라 한다)은 근로자 과반수가 참여하여 직접ㆍ비밀ㆍ무기명 투표로 선출한다. 다만, 사업 또는 사업장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부득이한 경우에는 부서별로 근로자 수에 비례하여 근로자위원을 선출할 근로자(이하 이 조에서 “위원선거인”이라 한다)를 근로자 과반수가 참여한 직접ㆍ비밀ㆍ무기명 투표로 선출하고 위원선거인 과반수가 참여한 직접ㆍ비밀ㆍ무기명 투표로 근로자위원을 선출할 수 있다. <개정 2022. 6. 10.>
③ 제2항에도 불구하고 사업 또는 사업장에 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있는 경우에는 근로자위원은 노동조합의 대표자와 그 노동조합이 위촉하는 자로 한다. <신설 2022. 6. 10.>
④ 사용자를 대표하는 위원(이하 “사용자위원”이라 한다)은 해당 사업이나 사업장의 대표자와 그 대표자가 위촉하는 자로 한다. <개정 2022. 6. 10.>
⑤ 근로자위원이나 사용자위원의 선출과 위촉에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개정 2022. 6. 10.>
-> 6개월 후 시행(2022. 12. 11. 시행됨)
제7조(의장과 간사) ① 협의회에 의장을 두며, 의장은 위원 중에서 호선(互選)한다. 이 경우 근로자위원과 사용자위원 중 각 1명을 공동의장으로 할 수 있다.
② 의장은 협의회를 대표하며 회의 업무를 총괄한다.
③ 노사 쌍방은 회의 결과의 기록 등 사무를 담당하는 간사 1명을 각각 둔다.
제8조(위원의 임기) ① 위원의 임기는 3년으로 하되, 연임할 수 있다.
② 보궐위원의 임기는 전임자 임기의 남은 기간으로 한다.
③ 위원은 임기가 끝난 경우라도 후임자가 선출될 때까지 계속 그 직무를 담당한다.
제9조(위원의 신분) ① 위원은 비상임ㆍ무보수로 한다.
② 사용자는 협의회 위원으로서의 직무 수행과 관련하여 근로자위원에게 불이익을 주는 처분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③ 위원의 협의회 출석 시간과 이와 직접 관련된 시간으로서 제18조에 따른 협의회규정으로 정한 시간은 근로한 시간으로 본다.
제10조(사용자의 의무) ① 사용자는 근로자위원의 선출에 개입하거나 방해하여서는 아니 된다.
② 사용자는 근로자위원의 업무를 위하여 장소의 사용 등 기본적인 편의를 제공하여야 한다.
제11조(시정명령) 고용노동부장관은 사용자가 제9조제2항을 위반하여 근로자위원에게 불이익을 주는 처분을 하거나 제10조제1항을 위반하여 근로자위원의 선출에 개입하거나 방해하는 경우에는 그 시정(是正)을 명할 수 있다.
제12조(회의) ① 협의회는 3개월마다 정기적으로 회의를 개최하여야 한다.
② 협의회는 필요에 따라 임시회의를 개최할 수 있다.
제13조(회의 소집) ① 의장은 협의회의 회의를 소집하며 그 의장이 된다.
② 의장은 노사 일방의 대표자가 회의의 목적을 문서로 밝혀 회의의 소집을 요구하면 그 요구에 따라야 한다.
③ 의장은 회의 개최 7일 전에 회의 일시, 장소, 의제 등을 각 위원에게 통보하여야 한다.
제14조(자료의 사전 제공) 근로자위원은 제13조제3항에 따라 통보된 의제 중 제20조제1항의 협의 사항 및 제21조의 의결 사항과 관련된 자료를 협의회 회의 개최 전에 사용자에게 요구할 수 있으며 사용자는 이에 성실히 따라야 한다. 다만, 그 요구 자료가 기업의 경영ㆍ영업상의 비밀이나 개인정보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제15조(정족수) 회의는 근로자위원과 사용자위원 각 과반수의 출석으로 개최하고 출석위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한다.
제16조(회의의 공개) 협의회의 회의는 공개한다. 다만, 협의회의 의결로 공개하지 아니할 수 있다.
제17조(비밀 유지) 협의회의 위원은 협의회에서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하여서는 아니 된다.
제18조(협의회규정) ① 협의회는 그 조직과 운영에 관한 규정(이하 “협의회규정”이라 한다)을 제정하고 협의회를 설치한 날부터 15일 이내에 고용노동부장관에게 제출하여야 한다. 이를 변경한 경우에도 또한 같다.
② 협의회규정의 규정 사항과 그 제정ㆍ변경 절차 등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제19조(회의록 비치) ① 협의회는 다음 각 호의 사항을 기록한 회의록을 작성하여 갖추어 두어야 한다.
1. 개최 일시 및 장소
2. 출석 위원
3. 협의 내용 및 의결된 사항
4. 그 밖의 토의사항
② 제1항에 따른 회의록은 작성한 날부터 3년간 보존하여야 한다.
제20조(협의 사항) ① 협의회가 협의하여야 할 사항은 다음 각 호와 같다.
1. 생산성 향상과 성과 배분
2. 근로자의 채용ㆍ배치 및 교육훈련
3. 근로자의 고충처리
4. 안전, 보건, 그 밖의 작업환경 개선과 근로자의 건강증진
5. 인사ㆍ노무관리의 제도 개선
6. 경영상 또는 기술상의 사정으로 인한 인력의 배치전환ㆍ재훈련ㆍ해고 등 고용조정의 일반원칙
7. 작업과 휴게 시간의 운용
8. 임금의 지불방법ㆍ체계ㆍ구조 등의 제도 개선
9. 신기계ㆍ기술의 도입 또는 작업 공정의 개선
10. 작업 수칙의 제정 또는 개정
11. 종업원지주제(從業員持株制)와 그 밖에 근로자의 재산형성에 관한 지원
12. 직무 발명 등과 관련하여 해당 근로자에 대한 보상에 관한 사항
13. 근로자의 복지증진
14. 사업장 내 근로자 감시 설비의 설치
15. 여성근로자의 모성보호 및 일과 가정생활의 양립을 지원하기 위한 사항
16. 「남녀고용평등과 일ㆍ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제2조제2호에 따른 직장 내 성희롱 및 고객 등에 의한 성희롱 예방에 관한 사항
17. 그 밖의 노사협조에 관한 사항
② 협의회는 제1항 각 호의 사항에 대하여 제15조의 정족수에 따라 의결할 수 있다.
제21조(의결 사항) 사용자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항에 대하여는 협의회의 의결을 거쳐야 한다.
1. 근로자의 교육훈련 및 능력개발 기본계획의 수립
2. 복지시설의 설치와 관리
3. 사내근로복지기금의 설치
4. 고충처리위원회에서 의결되지 아니한 사항
5. 각종 노사공동위원회의 설치
제22조(보고 사항 등) ① 사용자는 정기회의에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항에 관하여 성실하게 보고하거나 설명하여야 한다.
1. 경영계획 전반 및 실적에 관한 사항
2. 분기별 생산계획과 실적에 관한 사항
3. 인력계획에 관한 사항
4. 기업의 경제적ㆍ재정적 상황
② 근로자위원은 근로자의 요구사항을 보고하거나 설명할 수 있다.
③ 근로자위원은 사용자가 제1항에 따른 보고와 설명을 이행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제1항 각 호에 관한 자료를 제출하도록 요구할 수 있으며 사용자는 그 요구에 성실히 따라야 한다.
제23조(의결 사항의 공지) 협의회는 의결된 사항을 신속히 근로자에게 널리 알려야 한다.
제24조(의결 사항의 이행) 근로자와 사용자는 협의회에서 의결된 사항을 성실하게 이행하여야 한다.
제25조(임의 중재) ① 협의회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근로자위원과 사용자위원의 합의로 협의회에 중재기구(仲裁機構)를 두어 해결하거나 노동위원회나 그 밖의 제삼자에 의한 중재를 받을 수 있다.
1. 제21조에 따른 의결 사항에 관하여 협의회가 의결하지 못한 경우
2. 협의회에서 의결된 사항의 해석이나 이행 방법 등에 관하여 의견이 일치하지 아니하는 경우
② 제1항에 따른 중재 결정이 있으면 협의회의 의결을 거친 것으로 보며 근로자와 사용자는 그 결정에 따라야 한다.
제26조(고충처리위원)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에는 근로자의 고충을 청취하고 이를 처리하기 위하여 고충처리위원을 두어야 한다. 다만, 상시 30명 미만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이나 사업장은 그러하지 아니하다.
제27조(고충처리위원의 구성 및 임기) ① 고충처리위원은 노사를 대표하는 3명 이내의 위원으로 구성하되, 협의회가 설치되어 있는 사업이나 사업장의 경우에는 협의회가 그 위원 중에서 선임하고, 협의회가 설치되어 있지 아니한 사업이나 사업장의 경우에는 사용자가 위촉한다.
② 위원의 임기에 관하여는 협의회 위원의 임기에 관한 제8조를 준용한다.
제28조(고충의 처리) ① 고충처리위원은 근로자로부터 고충사항을 청취한 경우에는 10일 이내에 조치 사항과 그 밖의 처리결과를 해당 근로자에게 통보하여야 한다.
② 고충처리위원이 처리하기 곤란한 사항은 협의회의 회의에 부쳐 협의 처리한다.
제29조(권한의 위임) 이 법에 따른 고용노동부장관의 권한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그 일부를 지방고용노동관서의 장에게 위임할 수 있다.
제30조(벌칙)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1. 제4조제1항에 따른 협의회의 설치를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거나 방해한 자
2. 제24조를 위반하여 협의회에서 의결된 사항을 정당한 사유 없이 이행하지 아니한 자
3. 제25조제2항을 위반하여 중재 결정의 내용을 정당한 사유 없이 이행하지 아니한 자
제31조(벌칙) 사용자가 정당한 사유 없이 제11조에 따른 시정명령을 이행하지 아니하거나 제22조제3항에 따른 자료제출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하면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32조(벌칙) 사용자가 제12조제1항을 위반하여 협의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지 아니하거나 제26조에 따른 고충처리위원을 두지 아니한 경우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33조(과태료) ① 사용자가 제18조를 위반하여 협의회규정을 제출하지 아니한 때에는 2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한다.
② 제1항에 따른 과태료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고용노동부장관이 부과ㆍ징수한다.
(1) 노사협의회는 모든 사업장에 설치 의무가 있는지?
⇨ 근로조건에 대한 결정권이 있는 사업이나 사업장 단위로 설치하여야 하는데, 상시 30명 미만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은 설치하지 않아도 됨
(2) 단체교섭과 노사협의의 가장 큰 차이점은?
⇨ 쟁의행위 가능 유무
(3) 노사협의회 위원 구성 시 근로자위원과 사용자위원은 각 몇 명까지 가능한지?
⇨ 각 3명 이상 10명 이하 (강원특별자치도의 경우, 각 10명)
(4) 노사협의회는 1년에 몇 번 하여야 하는지?
⇨ 3개월마다 정기적으로 개최하여야 하므로 1년에 4번
(5) 노사협의회의 임무는?
⇨ 협의사항, 의결사항, 보고사항에 대해 처리하고, 의결된 사항을 공지하고 이행하여야 함
(6) 노사협의회에서 의결된 사항을 이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 협의회에서 의결된 사항을 정당한 사유 없이 이행하지 않으면 1천 이하의 벌금
(7) 각 사업장에 고충처리위원은 의무적으로 있어야 하는지? 그 역할은?
⇨ 상시 30명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에 의무적으로 고충처리위원을 두어야 하고, 이를 위반하면 200만원 이하의 벌금임.
고충처리위원은 노사를 대표하는 3명 이내의 위원으로 구성하고, 협의회가 설치되어 있는 사업장의 경우에는 협의회가 그 위원 중에서 선임함.
고충처리위원은 근로자로부터 고충을 청취한 경우에는 10일 이내에 조치 사항과 그 밖의 처리결과를 해당 근로자에게 통보하여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