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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이아저씨 Sep 19. 2024

순천만

당신을 기억할 때 3

너는 노랗게 떠 있다. 한없이 이어진 갈대 사이에 둥.

잿빛 하늘이 너를 더 노랗게 만든다.

도망치듯 발을 옮긴 남도에서,

다시 떠밀려 순천만에 도달했다.

땅의 끝과 바다의 시작이 만나는 이곳에 어찌하여 자리잡았는지, 수억의 갈대가 하나되어 흔들린다.

그게 너의 배경이다.


순천역에 내려 순천만까지 오는 길,

우리는 단 한 번도 갈대무리를 본 적 없다.

‘갈대만이 이곳에 살 수 있거나, 살 곳이 이곳 밖에 없어서 모여든 것이거나 둘 중 하나지 않겠느냐’고 내가 묻자 너는 슬쩍 미소 지을 뿐이었다.

갈대에 묻지 않아도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너의 표정이다.


잔잔한 바람에 비가 섞여 팔 언저리부터 젖어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잿빛 하늘 사이로 해가 비쳤다.

나는 너를 바라본다.

잔잔한 미소 뒤에 어떤 감정이 자리잡고 있는지 추측해본다.


비닐우산을 왼손에 쥔 채로 비내리는 하늘을 무심히 올려다보는 너.

갈대의 마음을 이곳에 오기 전부터 알고 있는 너.

너는 슬프기도, 기쁘기도, 무상하기도, 외롭기도, 충만하기도 한 마음을 옅은 미소로 내비치고 있다.

그게 너의 감정인 듯하다.


눈에 보이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너와 관련된 모든 것이 한데 섞여 둥.

노랗게 떠올랐다.

우리의 손은 한가득 깍지 끼고, 우리의 발은 눅눅한 나무데크를 따라 걷고 있음이 분명함에도 너는 바다와 하나되어 떠밀리고 있는 것 같다.

그게 우리의 관계인 듯하다.


‘포르투갈 갔을 때 기억나? 카보 다 호카. 세상의 끝.

20m는 족히 넘어보이는 절벽이 바다와 땅을 가르고 있었어. 그렇게 땅과 바다가 갈라져 있는 것도 처음 봤지만,

여기처럼 땅과 바다의 구분이 전혀 되지 않는 것도 처음 보네’ 너는 나무 울타리에 기댄 채 읊조렸다.

‘나는 다 그런 줄 알았어’

나는 말없이 너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너는 나와 함께 노랗게 둥.

잿빛 하늘 아래에. 이름모를 강과 바다가 갈대를 휘감고 있었다.


2021년 9월 가을초입, 순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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