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번째 편지: 엄마와의 첫 해외여행
지난주에는 엄마, 여동생과 함께 태국을 다녀왔어. 엄마에게는 첫 해외여행이었는데, 38도의 숨 막히는 더위 속에서 뻘뻘 땀을 흘리고, 낯선 음식을 어려워하면서도 여행 내내 얼굴에는 설렘이 가득하더라. 엄마는 1966년생으로, 올해로 만 57세가 되셨어. 37년 전, 여성이 대학에 입학하는 경우가 적었던 그때 엄마는 당시 남성들의 언어라고 여겨지던 독일어에 푹 빠져 독어독문학을 전공하고 교직에 있었다가 나를 갖게 되면서 일을 쉬게 되었고, 거의 15년 정도를 가정 주부로만 지냈어. 지금은 열심히 공부한 끝에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계셔.
세상에서 가장 배우기 어렵다는 언어 중 하나인 독일어를 공부해서였을까 엄마는 뭐든 쉽게 배웠고, 호기심이 많았어. 내가 20살이 됨과 동시에 여러 나라를 갈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 건, 졸업과 동시에 지구 반대편 나라에 워홀을 신청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어린 시절부터 내 방에 엄마가 가득 쌓아둔 여행 서적 덕분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그런데 막상 엄마는 한 번도 이 땅 밖으로 떠나본 적이 없다는 걸 난 까맣게 잊었어. 아니, 사실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아.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도 기내 가방에 고추장과 깻잎을 넣었다고 할 때도, 입국심사대에서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 댈 때도, 그리고 자동 출국 심사대에서 달아버린 지문 때문에 나오지 못했을 때도 괜히 목소리를 높이고 재촉했지. 10년 전 처음 혼자 여행을 떠났던 날, 그 누구보다 당황했었으면서 말이야.
엄마는 나로 인해 그 나이 때 누릴 수 있었던 '처음'을 경험하지 못했는데, 나는 왜 내 기준을 가지고 엄마를 몰아붙였을까. 나는 언제부터 엄마랑 대화를 할 때 짜증부터 내는 버릇이 생겼을까. 아마 사춘기가 막 시작되었던 13살 즈음이었던 것 같아. 엄마가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는 걸 깨닫기 시작할 때였지. 교감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와 지혜롭지만 강단 있었던 어머니 아래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평생을 행복하고 평화롭게 지냈던 엄마는 아빠와 결혼을 한 이후 고된 시집살이로 매일을 힘들게 보냈어.
명절 때는 단 한 번도 고향에 내려가지 못했고, 심지어 나를 임신했을 때에는 할머니 집 근처에서 살고 있었는데 엄마가 좋아하는 해산물을 비린내가 난다며 다 치워버렸다고 하니까. 일을 하는 것도, 차를 사는 것도, 여행을 다녀오는 것도 매번 허락받으면서 말 한마디 할 때마다 눈치를 보는 엄마를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졌고, 또 손발이 부들거렸으며, 매번 반복되는 이 상황이 미치도록 지겨웠어.
가족 모임이 있을 때마다 엄마 혼자 식구들의 식사를 준비했었는데, 몇 고모들은 감사함 대신 음식을 못한다며 욕을 했으며 딸들과 함께 다른 테이블에 앉아야 했지. 그 사이에서 아빠는 할머니의 눈치만 보면서 엄마의 지원군이 되어주지 못했어. 이런 상황에서 괜히 더 크게 화가 나고, 엄마에게까지 예민하게 굴었던 건 아마 엄마의 불행이 내가 태어나면서 시작된 게 아닐까라는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그땐 몰랐어.
여행 둘째 날, 이상하리만치 사람이 없었던 호숫가 근처 맥주집에서 엄마에게 물었어. "엄마는 내가 미웠던 적이 없어? 하고 싶은 걸 찾아 도망가고 싶었던 적이 없었어?"라고.
엄마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어. "에이, 왜 그런 생각을 했어. 나는 모든 순간 최선의 선택을 했고, 힘든 적은 있었지만 그만큼 행복한 순간들도 아주 많았어. 특히 너를 처음 안았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엄마는 내가 없었으면 독일에 가서 공부도 하고, 여행도 많이 했을 건데...."
"네가 엄마 몫까지 많은 걸 보고 말해줬잖아. 얼마나 멋있던지! 독일은 우리 또 여행으로 가면 되지."
"맞아, 엄마. 그러니 독일어 다시 공부해 둬야 해."
우린 그렇게 한참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눴던 것 같아.
맞아. 엄마는 불행한 사람이 아니었어. 그리고 엄마에게 가장 슬픈 건 시어머니의 괴롭힘이나 명절에 가족을 보러 갈 수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꿈을 포기할 정도로 아꼈던 딸이 엄마를 불행하다고 여기며 죄책감을 가지고 지내왔다는 거야. 그래서, 앞으로 나는 엄마의 가장 가까운 여행 메이트이자, 엄마의 행복을 지키는 사람이 되기로 했어. 엄마와 더 많은 대화를 하고, 솔직한 마음을 터 놓으면서 말이야. 물론 엄마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더 이상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새로 사귄 친구들,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연인, 그리고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도 예의를 갖추고 언제나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 노력하면서 사실 가장 우리를 사랑해 주는 가족에게는 그렇지 못하는 것 같아. 그래서, 세상에 당연한 존재는 없다는 거, 부모님 역시 스스로가 우리 옆에서 평생을 함께해 주기로 선택한 거라는 것도 종종 잊곤 하지. 그러니 우리, 쉽지 않았던 그 결정에 감사하며, 이 순간을 멋지게 담아보는 건 어떨까?
나보다는 더 먼저 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길 바라며, 기회가 있을 때 가족들과 많은 추억을 만들어 보는 걸 추천할게! 오늘도 긴 편지 읽어줘서 고마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