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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다지 Mar 31. 2024

매일이 숙제같이 느껴진다면

열일곱 번째 편지: 모두가 멋있다고 해서 그게 정답은 아니야.

예전에도 지금도 인터뷰를 할 때면 빠지지 않는 질문이 있어. 바로 '5년 후의 삶은 어떤 것 같나요? 10년 후에는요?' 그때마다 나는 한 페이지를 몇 분 안에 가득 채울 수 있을 만큼 아주 계획이 많았고, 그것이 건강한 청년의 모습이라고 참 오랫동안 믿어왔던 것 같아. 그런데, 얼마 전 '눈물의 여왕'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내가 극 중 홍해인처럼 3개월만 살 수 있다면 과연 이 계획 중에 어떤 것부터 시작하게 될지 말이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하고 싶은 것이, 아니,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거야. 왜냐면, 나의 모든 계획들은 철저히 커리어적인 '성장'과 '성공'에 맞춰져 있었고, 한 인간으로서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은 거의 없었거든. 마치 남들이 멋있다고 하는 모습에 다다르기 위해 세운 장기 플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매일매일 숙제를 하고 있는 느낌이었어.


사실 내가 항상 이랬던 건 아니야. 고등학교 때 썼던 버킷리스트만 보더라도 커리어나 학업적인 것이 20% 정도였다면 나머지 80%는 내가 살면서 정말 하고 싶었던 것들로 가득했지. 취업 준비를 하고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냥 이 모든 것을 잊게 된 것 같아. 그 공백은 자연스럽게 HAVE TO DO LIST도 채워졌고 나는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것보다 해야 해라는 말을 더 많이 내뱉고 있더라고. 가까운 친구들이 이미 다 인지할 정도로! 


그러다 보니 일상이 그리 재밌지가 않고 뭔가에 쫓겨서 숨이 차는 거야. 남과 비교하는 것은 기본 거기에 나에게 무척이나 가혹해졌지. 예를 들면, 몇 년 전부터 유행해서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이루고 싶어 하는 것 중 하나가 '미라클 모닝'인데 그걸 해보겠다고 올해 초에는 아침 스쿼시 수업을 등록해 놓고는 겨우 한 달을 가서 30만 원이나 되는 돈을 날렸는데, 아침 계획이 무너지니까 하루가 너무 우울해지고 일을 하는 나는 게으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 거야. 또, 유튜브를 주 1회 업로드 하자는 계획도 몇 개월 동안 지키지 못하면서 비슷한 테마로 유튜브를 운영하는 지인이 꾸준히 영상을 업로드하면 뼛속까지 불안해지기도 했고.


사실 중학교 때부터 미라클 모닝은 무슨 잠만보, 올빼미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고, 주중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써서 주말에는 그냥 방전이 되어버리는데 그냥 모두가 다 하는 것 같으니까, 그게 멋진 사람들의 상징이라고 하고 또 유퀴즈나 자기 계발 관련한 유튜브에서도 잘 포장해서 보여주니까 나도 빠르게, 반드시 따라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나에게 가장 잘 맞는 건 운동으로 시작하는 이른 아침이 아니라 따뜻한 차와 함께하는 늦은 밤이라는 것을, 주말에 내가 하고 싶은 건 업무의 연장선 같은 영상 편집이 아니라 잠시 핸드폰을 끄고 편안한 침대에서 맞이하는 독서 혹은 시장에서 사 온 제철 재료들로 느긋하게 요리를 하는 것이라는 걸 나는 줄곧 무시해 왔던 거야. 이런 사소한 게 아니라 내 삶에 도움이 되는 무언가 생산적인 걸 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꾸짖으면서.


고등학교 때는 '공부'와 '대학'이라는 정확한 목표가 있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다 같은 상황이다 보니 이 혼란과 불안을 느낄 틈이 없을 거야. 하지만, 가끔은 울타리 같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감옥처럼 느껴지는 학교를 나오다 보면 갑작스럽게 만끽하는 자유 속에서 나만의 기준을 잊어버리고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에 나를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경험을 하기 쉬워. 내가 몇 년간 그래왔듯이. 


막 대학교에 입학할 시절 김난도 교수님이 쓴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있었는데 나는 마음껏 흔들려보고 또 아파봐야 성장한다... 는 말을 너에게 해주고 싶지 않아. 이 과정에서 정말 많이 자책하고 불안해하는데 그게 성장으로 이어지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고, 어쩌면 좌절에서 끝날 수도 있거든. 그래서 나는 흔들리고 아파할 시간에 네가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 하나씩 실천해 갔으면 해.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느끼고 깨달은 것들은 이 편지에 담고 있지만 사실 오늘의 이야기는 나에게도 여전히 큰 숙제로 남아있어. 오늘만 하더라도 아침에 이 편지를 쓰고 해야 하는 게 참 많았는데 방금까지 침대에서 누워 있다가 힘겹게 일어났거든. 귀하디 귀한 일요일을 이렇게 날린 거냐고 나에게 잔소리도 했고. 이미 습관이 되어 버려서 더 힘들겠지만 남은 한 해 동안은 남들을 따라 만든 계획들에 의무감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들을 눈치 보지 않고 할 수 있는 자유를 주려고 해. 사람은 모두 다 다른 라이프 스타일과 목표,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나는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선택할 권리가 있으니까. 


그런 의미로 오늘은 영상 편집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데이식스의 신곡을 들으며 고양이랑 놀아야겠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그들의 삶을 존중하되 나의 목소리와 마음을 잃지 않길 바라며 오늘 편지도 이만 줄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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