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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다지 Mar 17. 2024

회고의 부작용

열다섯 번째 편지: 인생에는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성과도 있다.

극강의 ENFJ인 나의 삶에 절대 빠질 수 없는 건 '계획'과 '회고'야. MBTI와 갓생 콘텐츠가 유행하지 않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동기부여를 해주는 하나의 의식이자, 중간에 길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한 해의 나침판 같은 존재이지. 그런데, 누가 봐도 멋있는 이 습관에도 부작용이 있다는 사실을 올해 알게 되었어. 내가 연초만 되면 도파민 샷을 맞은 듯 방방 뛰어올랐다가 연말만 되면 한 줌의 재처럼 무섭게 가라앉는 패턴이 매년 반복되었는데, 이 모든 것이 내가 고수해 왔던 계획과 회고의 방식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야. 


나의 계획과 회고의 방식은 마치 회사에서 성과를 보고 하는 OKR과 매우 닮아 있는데, O (objective) 목표 3개를 가장 상단에, KR (Key Result) 3-4 개와 데드라인을 하단에 작성하지. 예를 들면, 스페인어 마스터하기를 목표로 삼고, 그것을 보여주기 위한 결과로는 DELE B2 자격증 2분기까지 따기, 스페인어 관련 유튜브 영상 50개를 3분기까지 업로드하기 등으로 말할 수 있어. 회사와 다른 건 분기별로 새로 이 OKR를 짜는 것이 아닌, 1년 치를 짜서 그것을 분기별로 나누고 회고 역시 일 년의 가장 마지막 달에 진행하는 거야. 이렇게 계획을 짜게 되면 얼마나 목표를 달성했는지 확인하기도 쉬워서 소위 '갓생'을 사는 인플루언서들 역시 많이 활용을 하는 같아. 트래킹의 방식이나 내용은 다를지라도. 


그런데, 이런 계획의 방식에는 처음에 언급했듯이 연말연초에 불안해진다는 부작용이 있어. 바로 일 년의 성과를 정량적으로 밖에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되고, 수치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삶에 있어서 중요한 과정들을 무시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야. 작년의 나는 특히나 인생에 있어 가장 변화가 많았던 시기였는데, 회고를 할 때 보니 연초에 계획했던 일중에 완료 표시는 별로 없고, 빨간색으로 그어진 지키지 못한 약속들이 너무나 많았어. 세상은 더욱더 경쟁이 심해지고 있고, 사람들은 그에 맞춰 치열하게 사는데 나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아 불안해졌고, 친구들이 연말 회고를 자랑스럽게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칭찬과 응원을 받는 동안 나는 게으름뱅이가 되었다는 자책감에 기쁘게 새해를 맞이하지 못했지.


그러다 우연히 구독 중인 매거진에서 이런 내용을 봤어. '여러분은 어떻게 회고를 하고 있나요? 여러분의 회고에는 일만 존재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계획만 하고 지키지 못한 것들이 있다면 본인에게 실망하지 말고 변명을 할 기회를 먼저 주세요.'라는. 


그래서 다시 2023년의 회고를 해 보기로 했어. 그래, 나는 지난해 스페인어 자격증도 따지 못했고, 매주 올리자고 약속했던 유튜브 영상은 겨우 1년에 10개 올렸고, 운동은 신혼여행 이후 쭉 쉬어서 3kg가 쪘지. 50% 저축은 무슨, 가끔은 수입보다 지출이 많았던 달도 있으며, SQL과 GA4수업은 어디까지 들었는지 기억도 안 나고, 책은 30권 간신히 읽었나. 실패한 일 년 그 자체였지. 그럼 과연 내가 일 년을 잘못 산 걸까? 이룬 것이 하나도 없는 걸까? 변명할 여지가 없는 걸까? 아니야.


계획했던 마케팅 수업을 끝내지 못했지만 브랜드 마케터로 이직을 했고, 동시에 세컨드 브랜드 론칭 및 성수, 더 현대를 포함해 4번의 팝업을 기획했어. 스페인어 자격증은 따지 못했지만 일주일에 1번은 꼭 줌 수업을 들으며 한 번도 숙제를 빼먹은 적이 없었고, 유튜브 영상을 업로드하는 대신 프리미어와 파이널 컷 모두 다룰 수 있게 되었으며, 지출은 많았지만 부모님께 손을 빌리지 않고 1000만 원으로 결혼식 준비 및 생애 처음으로 전셋집을 구하는 (= 신혼부부 대출) 미션을 무사히 클리어했으니까.


더해서, 계획은 하지 않았지만 나를 성장시킨 일들도 있었더라고. 매일 밀키트나 배달 음식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올해에는 집 근처 전통 시장에 매주 일요일마다 가서 장을 보면서 돈도 아끼고, 제철 음식을 계절마다 챙겨 먹었다던가, 보호소에 갈뻔했던 시골 아가고양이 우엉이 (당시 까망콩) 를 입양해서 400g에서 4kg의 건강한 근육 냥이로 잘 키워낸 거, 그리고 나의 취향을 확실히 알게 되어서 쓸데없는 옷과 화장품에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았다는 거야. 이렇게 다시 일 년을 바라보니, 물론 나와의 약속을 100% 지키진 못했지만 인생에 있어 다양한 것을 해보고, 집중과 선택을 하는 법을 배웠으며, 내적으로도 단단해질 수 있는 한 해로 바뀌었지.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라 그런지 회고를 할 때마다 내가 일 년간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일을 하면서도 얼마나 부지런히 공부하고 움직였는지 남들이 납득 가능할만한 숫자나 타이틀로만 증명을 하려고 했었던 것 같아. 하지만 삶은 계획한 대로만 흘러가지 않고, 또 우린 정신없이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나를 다치지 않게 할 필요가 있기에 일 년의 시작을 알리는 계획을 짤 때도, 일 년을 마무리하는 회고를 할 때도 일이나 공부가 중심이 아닌, 나의 성장과 행복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 


조금은 애매할지 몰라도, 덕분에 더욱 의미 있는 한 해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내년에는 우리 자신에게 채찍대신 당근을, 상처 대신 웃음을 주는 날이 많아지길 바라며, 오늘 편지도 이만 줄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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