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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다지 Apr 14. 2024

나만의 캥거루 주머니 찾기

열여덟 번째 편지: 내가 처한 상황이 최선이 아닐지라도

  지난해 19-34세 청년들을 조사한 결과 결혼하지 않은 채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캥거루족'이 약 60% 라는 통계가 나왔어. 사실 내 주변만 봐도 서울에서 나고 자라 대학과 취업까지 한 친구들은 30대를 코 앞에 둔 지금도 독립을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나도 물론 경제적인 면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은 동의하고. 지방의 작은 중소도시에서 대학 입학과 동시에 상경을 한 나는 부모님께서 주시는 소중한 용돈과 주말 아르바이트비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월세와 공과금 식비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었거든. 취업을 하고 나서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눈 씻고 찾아봐도 전공과 관련된 일자리가 없는 고향에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 그러는 사이에 부모님과 함께 지낸 친구들은 아르바이트비 혹은 월급의 대부분을 저축했고 왠지 더 빠르게 어른이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어. 멋진 차도 사고, 부모님 효도 관광도 보내드리고, 약속이 있을 때도 오늘 쓴 저녁 값에 남은 한 달 식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나는 그래서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나도 모르게 서울에 살지 않은 부모님을 원망했던 것 같아.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더 큰 물에서 놀라며 서울로 대학을 보내주신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아무 걱정 없어 보이는 서울 친구들을 부러워하면서. 특히, 우리 부모님은 내가 기숙사에서 나와 자취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도 한 번도 와보지 않으시고, 이사에도 도움을 주지 않으셨는데 그때는 얼마나 서운하던지. 마치 20살에 버려진 고아가 된 기분이었지. 근데 말이야, 다시 생각해 보니 20대 내내 부족하게 살았기는 해도 나에게는 또 다른 추억과 능력들이 생기고 있었더라. 혼자 또 같이 살면서 말이야. 


첫 번째 셰어하우스에서는 소중한 친구와, 그 친구와 함께한 든든한 집밥들이 생각나. 내가 지낸 곳은 학교 근처에 있는 25년 된 아파트였는데, 나는 거실을 막아 만든,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35만 원인 방을 사용했어. 이 친구는 내가 이사 온 지 3일 후에 옆방으로 이사 온, 전화할 때만큼은 전라도 사투리가 날아다녀서 굉장히 친해지고 싶던 아이였는데 매일 새벽까지 과제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까운 사이가 되었어. 피곤에 절어 과잠도 벗지 않고 침대에 빨래 마냥 걸쳐져 있을 때는 코에 손을 대서 서로의 생사를 확인해 주기도 하고, 어머니를 닮아 손이 아주아주 큰 친구 덕분에 항상 배가 고팠던 시기, 전라도에서 잡아온 신선한 재료들로 맛있는 집밥을 먹을 수 있었지. 얼마 전 자신을 꼭 닮은 아이를 낳았는데, 사진을 보고 왜 내가 눈물이 핑 돌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두 번째 셰어하우스에서는 시장에 가는 취미와 요리 실력이 남았어. 경춘선 숲길 근처에 있어서 상쾌하게 산책을 하며 전통 시장에 방문하는 걸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시장 이모, 삼촌들에게 흥정을 하는 법도 배우고 (사실 어린 학생이 전통 시장에 오는 것만으로도 엄청 귀엽게 봐주셔) 단골 김치 가게 사장님은 내가 오는 주기에 맞춰서 좋아하는 묵은지, 고들빼기, 갓김치를 안 팔고 기다려주시기도 했어. 과일 가게에서는 귤을 2-3개씩 더 넣어주시고, 두부 집에서는 시식 두부도 넉넉하게 챙겨주시고 말이야. 이맘 때는 교환학생 준비로 휴학을 하며 이태원에서 아르바이트도 했었는데 바쁜 룸메이트들을 위해 매일 저녁을 만들다 보니 나도 모르게 할 줄 아는 음식이 많아졌더라고. 물론, 꽁찌김치찌개, 김치비지찌개, 어묵탕, 족발덮밥, 밀푀유나베 등 거의 다 안주거리긴 하지만. 맛있으면 됐지, 안 그래? 


워킹 홀리데이로 간 호주의 셰어하우스에서는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배울 수 있었어. 멕시코, 이집트, 인도, 브라질 룸메이트들과 함께 지내며 각 나라의 음식들을 나눠 먹기도 하고, 인기 있는 프로그램을 영어로 함께 시청하기도 하고, 중간중간 정치나 사회에 대한 심도 깊은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야. 워홀을 떠난 지 3개월도 되지 않아 코로나로 인해 국경이 폐쇄되고 일도 잘리고 거의 집 안에서만 있어야 했는데, 이 친구들과 함께한 덕분에 외롭지 않고 오히려 더 따뜻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아. 참, 멕시코 친구가 전화하는 걸 듣고 너무 듣기 좋아서 혼자 스페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지금 남편을 만나게 해 준 걸 보니 언어와 문화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온 '행운' 같은 걸 추가해도 되겠다. 


그 이외 2번의 셰어하우스 경험과 약 4번의 자취 경험을 통해 혼자서도 부동산 계약, 전세 대출, 이삿짐을 챙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지혜롭게 돈을 쓰는 방법 그리고 내가 먹을 음식은 스스로 챙길 줄 아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아. 경제적인 면에서, 넓고 따뜻한 집을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것에 여전히 나는 캥거루족을 부러워할 때가 많지만, 이제는 내가 처한 상황을 원망하지는 않아. 그러니 캥거루족이 될 수 없다면, 우리만의 캥거루 주머니를 찾아보자. 어쩌면 주머니를 찾는 과정 속에서 평생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물들을 발견할지도 몰라.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들을 찾아낼 수 있는 20대를 보내길 바라며, 너의 곁에 좋은 인연들과 소중한 추억들이 가득하길 응원할게. 



호주 쉐어하우스, 코로나에 기죽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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