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 집을 갖겠습니다.

집은 또 하나의 인생이다.

by 정희정

집은 나에게 어떤 존재일까. 경북 구미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고등학생 시절까지 구미에서 지냈다. 엄마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잘 먹고 잘 자랐다. 아주 추운 겨울날 눈이 매우 많이 내리던 날, 그 날은 부모님이 근처 여행을 가셨는지 나와 내동생들이 집에 있었다. 나는 그당시 고3이었고 눈이 펑펑 내려 동생들을 데리고 근처 공원으로 갔다. 마음껏 달리고 뛰어 놀던 그 때. 동생들도 하하호호 마음껏 그 시간을 즐겼다. 집 근처에는 잔디가 깔린 자그마한 공원부터 널찍하게 뛰어놀기 좋은 아주 큰 공원까지 있었다. 눈이 왔고 동생들과 눈사람도 만들었던 것 같다.


그 당시의 기억은 내가 이후 힘든 시간을 겪을 때마다 나에게 한 톨, 그 이상의 그리움으로 자리잡았다. 힘들어서 울고 싶은 적이 많았는데 그 당시의 영혼이 함께 했던 것 같은 그 날의 기억은 이후 나의 다리를 지탱해주고 나의 마음에 단단히 자리잡았다. 동생들과의 기억, 눈사람, 눈이 펑펑 내리던 그 날의 기억들. 나에게 평생동안 잊지 못한 추억이 되었다. 동생들도 그 날을 기억하고 있겠지? 나와 함께한 그 공원에서의 웃음을.


대학교를 충청도로 가면서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수능을 평소보다 못본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곳은 그리 많지않았다. 아버지는 집 근처 전문대라도 좋으니 그 곳을 가라고 했지만(경비도 많이 아낄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게 싫었다. 그래도 구미에서 알아주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친구들보다 못한 곳이라니. 내가 허락하지 않았고 더욱 반발심이 생겼다. 그래서 충청도에 있는 한 학교 간호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등록금에 대한 걱정과 뒤이어 교육비를 지탱해야 하는 지라 많은 생각에 잠기었다. 나와 차를 타고 여기 대학교, 저기 대학교에 원서를 내러 다니던 시절 아버지의 어깨가 무거워보였다. 잠시 걷자고 말하면서 집근처를 한 바퀴 빙 돌았다. 아버지는 선뜻 내가 걷자고 하니 놀랐다고 한다. 아버지의 무거운 어깨를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자녀교육에 대해 뭉텅뭉텅 수백만원씩 들어가는 현실 앞에서 평생 성실하게 공무원으로 일해오신 아버지에겐 엄청난 무게와 부담이었을 거다.


편입시험을 치르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입학했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부모님이 겨우마련해주신 수중의 돈으로 원룸을 구했다. 어두컴컴하고 여러명이서 사용하는 단칸방에서부터 지하1층 원룸에 이르기까지 여러곳을 전전했다. 술을 마시고 토를 하기도 했고 지하1층 원룸이 살때는 비가 많이오는 날은 하수구에서 물이 역류해 방바닥을 적시기도 했다.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편의점, 고기집 등을 다니기도 했는데 편의점아르바이트를 가던 길에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어떤 남자가 자신의 성기를 갑자기 꺼내어 흔들어 보이는 정말 충격의 도가니를 마주하기도 했다. 급히 도망쳤지만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남아있다. 또 한번은 학교도서관에서 시험기간이라 새벽3시까지 공부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책과 독서대를 한아름 팔에 껴안고 학교후문을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뒤에서 후다닥 하는 발걸음소리가 들렸다. 웬 남자가 나를 뒤에서 껴안는 것이었다. 이게 뭔가. 아뿔싸. 나에게 왜 도대체 이런일이자꾸 생기는 거야! 너무 놀랐고 말을 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독서대를 안고있던 내 팔을 최대한 위로 뻗쳐올려 그남자를 떨쳐냈다. 공부하다가 정신이 이상해진건지, 아마도 학교의 학생이었을거라고 짐작해보지만 나는 너무놀랐고 소리조차 낼수 없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국가고시를 패스 후 학교병원에 입사를 했다. 새로 생긴 병원이었는데, 신규로 입사한 것이다. 다시 집을 구해야 했다. 어중간한 공백이 생겼다. 이런저런 교육은 받아야 하지만, 정식 출근은 하기 전인 애매한 상태였다. 병원 근처로 라꾸라꾸침대가 있는 고시원에서 지내기도 했다. 라꾸침대는 너무 작았고 중간에 틈이 벌어져있어서 잠자기가 너무불편했다. 무엇보다 고시원이 깨끗하다고 한들 너무너무 작았다. 라꾸침대가 들어가있을 뿐인데도 방이 꽉 찼다. 그리고 나서 집을 구해야 했다. 병원 근처 오피스텔 사무용 원룸에서 하룻밤을 자기도했는데 그 때는 겨울이었고, 너무 추웠다. 사무실로 사용하는 곳이라 난방이 거의 되지 않았다. 잠을 자야 하는 나로서는 그 당시 함께 있던 여동생과 있는 이불과 옷은 모조리 꺼내어 덮고잠을 청했다. 잠이 잘 올리도 만무했고 동생과 나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 다음날 허리가 너무 아팠다.


병원에 신규간호사로 입사했다. 두개의 방이 딸린 집을 구했는데, 함께 입사한 친구와 같이 사용하기로 했다. 방 한칸은 내 방이었다. 그곳에서 가끔 치킨도 시켜먹고 일하느라 녹초가 된 날은 목욕탕 안에 물을 잔뜩 틀어놓고 잠이 들어버린 적도 있었다. 과가 다른 과였고, 친구는 힘들어하면서 관두었다. 그당시 내여동생도 대학원진학을 위해 서울에 잠시 올라온 터라, 여동생과 함께 집을 사용하기로 했다.


여동생은 이전에 친구가 사용한 방을 사용했고,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추억을 쌓았다. 서로 힘들었지만, 그간의 고충과 고민들을 얘기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동생과 함께 생활하니 마음이 안정되고 좋았다. 곱창을 먹으러 간적이 있었는데, 알콜이 너무 많이들어갔는지 여동생은 택시에서 토를 하기도 했다. 술자리가 은근히 많았던 여동생을 마중나간적도 있었다. 여동생이 근무겸 공부하는 대학원을 찾아간적이 있다. 연구하면서 일하느라 밥도 제대로 못챙겨먹는 것을 알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역에 내리고 동생이 좋아할 만한 떡볶이와 분식을 골라서 동생이일하는 곳이 갔다. 생각지도 못한 나의 방문에 동생은 놀라고 기뻐했고 나도 그런 동생의 모습에 마음이 기뻤다. 그렇게 우린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지냈다. 간호사는 교대근무를 하는데 밤 11시경 집에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날도 주황빛의 불빛을 따라 길을 걸고 병원에서 집까지는 15분정도 걸리는 거리라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왔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뒤에서 따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당시 남자친구(지금의 남편)과 전화통화를 하던 길이었는데 뒤에서 나를 따라오는 인기척에 점점 겁이났다. 집까지 남은 거리는 100여미터. 그동안에도 나를 따라왔고 그 사람은 빌딩안 건물로 나를 따라오기에 이르렀다! 이사람이 나를 따라온 것이 많구나! 생각한 순간 겁이 너무 났고 내 집안으로까지 따라온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나는 너무 놀라고 무서워 으앙!하면 그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남자친구에게도 지금의 상황과 무서움에 대해 얘기했다. 뒤에서 따라오던 남자는 멈칫 ! 하더니 그대로 아래층으로 후다닥 도망을 치는 것이 아닌가!


왜 자꾸 이런일이 생기냐고! 나는 무서웠고 남자친구는 경찰을 부르라고 했다. 그렇게 상황은 종료되었고 나를 따라온 사람의 얼굴은 보지도 못했고, 인기척에 무서워 한동안 밤길이 더욱 무서워졌을 뿐이다.


동생과 방한칸을 사용하는데, 어느날 집에 들어오던 순간. 으잉? 왜? 현관문의 도어락이 깨져있는게 아닌가! 누군가 나의 집에 침입했다! 이건 또 뭔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서 방안을 훑어보는데,,, 맙소사. 이건 도대체가..... 짐이란 짐은 다 꺼내어져 있고 동생방과 내 방에 서랍은 온통 입을 벌리고 있었다. 도둑이 든 것이다! 하다하다 별일이 다있다 정말. 밤길도 무서웠는데 이제는 도둑이라니. 도둑은 용케도 금만 쏙쏙 빼갔다. 얄미운 도덕같으니라고. 금은 유일하게 목걸이, 팔찌 정도가 전부였는데 그 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도둑은 나와 내동생의 금 악세사리를 훔쳐갔다. 그렇게 어떻게 했을 까. 당연히 경찰에 신고하고 사고접수를 했지만, 우리에게 변화되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상황종료가 되었고 이후 집 자물쇠를 새로 바꾸었다.


결혼을 하고 서울신림동에서 신혼을 시작하면서 워킹맘 생활을 계속했다. 갓난아기를 언덕길위에 영아어린이집에 맡기면서 남편과 나는 출근했다. 신림동 구불구불한 길을 버스를 타고 달렸고 만석으로 꽉 찬 지하철에 몸을 맡기면서 다녔다. 아기를 임신했을 때도 동생과 함께 지낸 시간이 있었는데 코딱지만한 옷방을 여동생이 사용하면서 가지고 온 옷을 베란다에 설치된 행거에 걸어놓았는데, 가림막이나 블라인드가 되어 있지않아 동생의 예쁘고 하얗던 옷들은 그대로 햇빛을 받아 한쪽 부분만 모두 노랗게 변하고 말았다. 동생은 그 옷들을 눈물을 머금고 모두 버려야했다. 오른쪽은 하얗고 왼쪽은 누런옷을 그대로 입고 다닐수는 없었을 것이다. 신림동 빌라는 3층이었는데, 아가를 태우기 위해 유모차를 매번 들어올려야 했다. 남편은 육아산책에 적극적이지 않아서 모든 일을 내가 해야했다. 유모차 자리가 없을 때는 지하주차장 구석진 먼지쌓인 창고에 세워두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열악한 환경에서 육아를 했던 것 같다.


1년동안 어린이집에서 많은 정이 들었는데, 생후 3개월부터 다닌 어린이집에서의 생활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근처아파트 단지어린이집은 보통 4시가 되면 하원을 하는터라, 저녁7시가 넘어 도착하는 우리에게는 맞지 않았다. 겨우 구한 언덕길위 어린이집은 이런 우리의 사정을 알고 오전 7시부터 7시30분이 넘는 시간까지 온마음으로 안아주었다. 변비가 심했고 딸아이를 위해 육아서를 찾아봐주시고 알림장에 꼼꼼이 그날의 일상을 소통해주었다. 아가를 온마음으로 돌봐주시는 덕에 끈끈한 정과 믿음이 생겼고 지금까지도 원장님, 선생님과 연락을 하고 있다.


빌라에 살아보니 유모차를 태울 때 엘레베이터가 없어서 너무 불편했고 아가를 목욕시킬만한 욕조가 없어서 너무 불편했다. 결국 우리는 경기도 김포로 저렴한 곳으로 알아보고 이사를 하기도 했다. 정든 어린이집을 떠나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뾰족모자를 쓰고 너무나 친근하게 원장님과 인사하던 딸아이의 모습이 아직 선하다. 그이후에도 찾아간 적이 있는데, 사랑스러운 아기를 온마음과 정성으로 키워주신 고마운 마음에 이맘때가 되면 늘 생각이 난다.


몇번의 이사 끝에 우리는 지금의 집에 살고 있다. 내 집을 갖고 싶다는 생각은 늘 마음에 품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10년차 부부가 되었다. 딸아이는 10살 그리고 둘째아기는 3살이 되었다. 우리는 지금 10년차에 내 집을 마련했다. 경기도 김포의 한 아파트를 분양받기에 이르렀다. 27층 이라 높긴하지만, 엘리베이터가 있고 욕조가 있다 . 오후가 되면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고 따듯한 물을 받고 함께 목욕을 할 수도 있다. 언덕길을 오르내리던 길,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아기와 함께 내리던 눈을 바라보던 일, 어린이집 하원을 하기 위해 독촉하던 발걸음을 멈추게 한 따듯하고 오동통하던 어묵의 맛은 아직도 생각이 난다. 동생과 함께 지내던 날들, 맡길곳 없어 전전긍긍하던 우리를 받아주던 신림동 언덕길 위 어린이집에서도 우리는 사랑을 배웠고 마음으로 키워냄을 배웠다.




집은 따듯한 곳이고 한없이 나를 보듬어주는 곳이다. 매번 늦은 퇴근길에 붕어빵을 사오는 아빠를 향해 다가가는 우리 집 두 꼬맹이. 아침밥을 먹을 시간이 없이 출근하지만 서로의 일상을 알기에 각자의 길위에서 오늘을 시작하는 우리. 일하는 엄마아빠를 대신해 아침, 저녁으로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아주시는 아이돌보미선생님. 그들이 있어 우리는 우리집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또 하루를 마무리한다. 10년동안, 아니 어쩌면 그 훨씬 이전부터 집을 마련하기 위한 나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 아닐까. 집은 하루살이가 아니라 평생살이이기에 더욱 신중하고 더욱 애착이 가는 것 같다. 오늘도 따듯한 보금자리에서 깨어나 딸아이와 인사를 하고 나왔다. 남편도 아침출근길 다녀올게~ 하며 출근을 했다. 늦은 밤 잠을 청한 둘째아기는 지금쯤 잠에서 깨어났겠지? 우리는 오늘 우리집에서 하루를 또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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