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의 여자이고 엄마입니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 인천에서의 방문을 끝내고 집에 왔다. 아직 남은 할 일들이 있었다. 회사 일도 할 일이 남아 있는 상태. 이런 날은 보통 근처 카페에 가는 데, 오늘은 조용한 곳이 그리웠다. 집 앞에 새로 생겼지만, 손님이 뜸한 그 곳. 도담 찻집으로 향했다. 비가 부슬부슬 오고 우산을 쓰고 노트북을 손 안에 한아름 안고 걸어갔다.
그때의 느낌이 좋아서
첫 대학병원을 다니던 시절이다. 병원 앞에는 웬 생뚱맞은 찻 집이 있었는데, 은근히 인기가 있었나보다. 개원한 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오래전 부터 자리했던 그 곳은 차 종류가 꽤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그 곳의 분위기가 좋았다. 쌍화차, 대추차 등등 각자 좋아하는 차 종류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수다를 떠는 곳. 누구와 갔었는지, 정확히 어떤 이야기를 했었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때 그 당시의 느낌이 좋았던 것 같다. 특이하게도 그 찻집 안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누군가 연주를 할 는지는 모른다. 주인이 집에 있던 것을 가져다 놓은 것인지, 집에서 연주하다 가게에서도 연주를 하려고 가져다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랜드 피아노의 웅장함이 고즈넉한 찻 집의 분위기와 은근히 어울렸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 찻집을 좋아했고 그 분위기를 좋아했다. 아이스라떼에 풍덩 빠지기 전에는 따듯한 차 종류를 좋아했다.
한번 더 와보고 싶어서
원래는 핫도그 집이었는데, 인적이 드물어서 그런지 이곳은 찻 집으로 바뀌었다. 오며가며 지나가다 밖에서만 눈여겨 보았는데, 지난 번 한 번 방문 이후로 오늘 또 들른 것이다. 엄마 나이 또래의 찻 집 주인이 화분과 인테리어를 고상하게 해 놓은 솜씨가 돋보이는 곳이었다. 식빵은 토스트기로 간단히 잼을 발라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두셨는데, 오늘은 손님이 없어서인 지 냉장고에서 바로 식빵을 꺼내오셨다. 깜빡하셨다고 말씀하시면서.. 매일 아이스라떼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셨는데, 오늘 비가 와서인지 따듯한 차 한 잔이 그리웠다. 그래서 이 곳을 방문했다. 조용하고 구석진 자리로 가서 앉았다. 넓은 좌석의 노트북 충전까지 할 수 있는 아담하고 따듯한 이 공간. 앉아서 일을 할 까도 했는데,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주말동안 조금씩 본 원고를 다시 펼쳤다. 날 것 그대로인 나의 원고. 수정할 것도 많고 중복되는 내용, 오타도 많이 있었다. 다시금 한 줄 한 줄 읽어나간다.
다시 읽어보니 또 새롭다. 어느 날은 머릿 속이 꽉 막혀 있다가도 장소를 바꾸면 실타래가 풀어지는 것 처럼 다시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공간을 한 번씩 바꾸어 주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오늘 내가 방문한 이 도담 찻집도 마음과 머릿속을 잔잔하게 진정시켜 준 듯하다.
월요일이라는 요일의 시작은, 할 일이 많을 것임을 의미하고 주일의 첫 날인 만큼 바빠질 것을 예감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부터 방문하기 위해 집을 나섰고 오늘도 인천을 두루 두루 돌아다녔다. 누워서 지내는 어르신의 눈을 마주보며 하루의 일과의 시작과 수고의 시작을 응원했다. 20대 청년의 잠자다가 자주 깨는 증상으로 처방받은 양압기에 대해 귀를 쫑긋 귀기울여 들어주는 수고로움을 또 생각했다. 파킨슨 병으로 현재 어마어마한 양의 약물을 복용하고 있는 어르신은 밤 중에 허상을 본다고 호소하였다. 치료약물 복용과 관련된 것인지, 파킨슨 질환병의 증세 중 하나로 허상을 보는 행동을 나타내는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밤 중 수면의 문제점을 해결해드리고 도움드리고자 양압기와 마스크를 씌우고 앞으로 좋아질 예후를 응원해드리고 왔다.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찻 집에서의 시간은 더디게 갔다. 평소 시끌벅적한 카페를 다녔는데, 오늘의 찻 집은 조용한 분위기에 감미로운 노랫 소리만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평소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진 않는다. 그래서 인지 느리게 걸어가는 찻 집은 나의 마음의 속도와도 걸음을 함께 해주었다. 커다란 파란색 소파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했다. 집에서는 아이들을 쫓아다니며 치우느라 소파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늘은 벽으로 분리된 공간 안에서 혼자 노트북을 바라보기도 하고 챙겨나온 책을 이리저리 들추며 내 마음가는 대로 읽어보기도 했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그저 앉아서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 단 한 줄, 두 줄, 내 마음이 그렇지~ 옳지~ 하며 맞장구를 쳐주는 시간. 누군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오롯이 나만을 생각하는 지금의 시간이 좋았던 것 같다.
오늘은 카페 대신 찻 집에 왔다. 쌍화차, 대추차, 자몽차, 유자차. 각종 차 들이 준비되는 따듯한 곳으로 기억될 것 같다. 다음에 오게 되면 자몽차를 시켜볼까? 자몽차는 어떤 맛일지. 빵 하나를 챙겨주는 주인의 성품이 고마웠다. 정성스럽게 유자차를 준비해서 내오는 주인의 손길이 고마웠다. 이렇게 받아도 되나? 할 정도로 요즘에는 셀프가 대세인데, 주인이 직접 내오신 차를 대접 받는 기분은 실로 오랜만의 융성한 대접을 받은 느낌이었다.
마흔을 앞 둔 요즘, 나도 우려나오는 차 처럼 조금씩 변화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내 안의 속 깊은 이야기를 하면서, 글을 쓰면서, 나와 대화하면서, 나도 모르던 나를 조금씩 알게 되면서 내 속마음도 겉모습도 조금씩 변하는 게 아닐까? 깊이 우려나오는 차 처럼, 나도 겉멋이 든 것이 아니라 속이 꽉 찬 알맹이처럼 천천히 그렇지만 깊은 향을 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 오늘도 나는 찻 집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