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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남주파의 탄생

웹소설 작업 과정/독자

by 날자 이조영

독자들만의 독특한 문화


로맨스 연재를 하다 보면 재밌는 현상이 생긴다. 삼각관계나 사각관계일 때 남주파와 남조파가 갈리는 것이다.

로맨스에서는 남녀 주인공의 해피엔딩이 국룰이므로 남조는 어차피 새드엔딩인 걸 알고 본다. 그래서인지 남조가 멋있을수록 감정이입이 강해져서 안 받아주는 여주 대신에 ‘나에게 와, 내가 잘해줄게.’가 된다.

재밌는 건 어떤 작품이든 남주보다 남조에게 더 끌리는 독자들이 있다. (나도 그런 편. ㅎㅎㅎ) 일종의 측은지심이다.


남조가 남주 못지않게 매력적이면 뻔한 결말을 두고도 ‘누굴 선택해야 할지 몰라서’ 독자들은 의견이 분분해진다. 남주를 바꿔 달라는 요청부터 남주와 여주를 욕하는 독자도 있다.

감정이입이 되면 독자들끼리 ‘서브남주파’를 형성해 응원의 열기를 띤다.

이건 작가와는 상관없이 독자의 독특한 문화라고밖에 할 수가 없다. 지켜보는 작가로서는 그저 재밌는 이벤트처럼 느껴진다.


하렘물(여주 한 명에 남자들이 많이 등장하는 연애물. 또는 그 반대) 경우는 최애가 등장하여 응원하는 인물이 제각각으로 나뉜다. 마치 아이돌 그룹을 보는 듯하다. (아이돌이 하렘에서 시작된 게 아닌가 싶은. ㅎㅎ)

독자들끼리 최애 응원하느라 은근히 다른 캐릭터를 견제하기도 하고, 최애 분량 좀 늘여달라는 애교 섞인 항의를 하기도 한다.


그림 솜씨가 있다면 직접 최애 그림을 그려서 홍보하기도 하고, 작가에게 선물하는 것도 봤다. 전부 작품에 대한 애정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그리고 이런 분이 많을수록 화제성도 높아진다.


‘드라마 폐인’도 이와 비슷한 문화다. 시청률과 상관없이 그 드라마를 사랑하는 시청자들끼리 노는 문화를 만들어, 수많은 짤과 동영상이 등장한다.

트위터가 한창일 때는 캐릭터봇이 등장하기도 하고, 제작사에서 이벤트를 자주 열어 시청자들과 소통하기도 했다. (‘성균관 스캔들’ 폐인 시절, 시조 이벤트에서 당첨되어 치킨을 선물로 받았던 적이 있다. ㅎㅎㅎ)

요즘은 드라마 열기가 식으면서 폐인 문화가 사라진 듯해 아쉽다. 그때 참 재밌었는데.


웹소설 시장이 커지면서 거대 사이트가 생겨 독자들끼리의 유대감은 확실히 준 느낌이다. 댓글이 많아도 각자 댓글을 달뿐, 독자들끼리 소통하는 건 못 본 듯하다.

웹소설이 생기기 이전에는 작은 사이트들이 많아서 가족적인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연재하는 동안 매일 보는 독자들이어서 닉네임만 봐도 친근했다. 서브남주를 응원하는 분들이라면 자연스럽게 유대가 형성된다. 그래서 독자만의 독특한 문화도 가능했던 게 아닌가 싶다.


서브남주를 어떻게 그려야 할까?


서브남주의 역할은 사실 남주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악역의 역할이 그렇듯이.

서브남주가 멋있을수록 긴장감은 더해지고, 독자들로 하여금 갈등을 고조되게 만든다. 여주가 누굴 선택하는 게 바람직할지 헷갈릴수록 이야기는 재밌어진다. 독자들의 감정이입을 불러일으키기도 좋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서브남주가 아무리 멋있어도 남주보다 더 멋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랬다간 남주파들에게 욕을 먹는 건 둘째 치고, 작품을 망칠 수도 있다.

로맨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남주가 하드 캐리해야 한다.

중요한 씬이나 결정적 대사와 행동은 남주에게 할애해야 한다. 서브남주가 문제를 해결하는 조력자 역할을 할 때도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남주의 활약이 커야 작품과 캐릭터가 흔들리지 않는다.


예전에 기획을 실컷 해놓고 막상 글을 쓰니 남조가 더 돋보인 적이 있었다. 고민 끝에 전부 뒤엎고 남주를 바꿔서 다시 썼다.

다른 장르에서도 주인공이 그렇겠지만, 로맨스에서 남주는 절대적이다.

특히, 1 대 1이 아닌 삼각관계 이상의 남조가 등장할 땐 매력도나 분량에서 차등을 주는 편이다.


1. 남주

2. 서브남주 1 : 남주에 버금가는 매력을 갖고 있어, 여주도 그 사이에서 갈등하게 만든다.

3. 서브남주 2 : 여주를 사랑하지만, 보통 친구관계나 조력자의 역할이다.


등장인물은 제각각 맡은 역할이 있다. 그 역할에서 벗어나는 순간, 인물 구도가 흔들리게 되어 있다. 인물 구도가 흔들리면 작품도 흔들린다.

간혹 글을 읽다 보면 인물 자체가 흔들릴 때가 있는데, 상황에 따라 인물의 정체성이 오락가락하는 경우다.

정체성이 곧 역할이다. 어떤 경우가 있어도 남주는 제 역할과 본분을 사수해야 한다. 서브남자가 멋있다고 해서 남주의 역할을 맡길 순 없는 것이다.


사실, 서브남주가 멋있는 건 새드엔딩의 주인공이기 때문이 아닐까.

로맨스에는 비극의 과정은 있을지언정 비극 엔딩은 없다. 그러나 멜로는 비극 엔딩이 가능하다. 로맨스 작품에서 로맨스 주인공이 남주라면, 멜로의 주인공은 서브남주가 되는 셈이다.


장르가 로맨스이기 때문에 남주의 승리로 끝날 수밖에 없고, 서브남주는 멜로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더 진하고 강렬한 여운을 남길 수 있다.

어쨌거나 작가는 로맨스가 우선이지, 멜로가 우선이면 안 된다.

서브남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다면, 서브남주를 주인공으로 쓰면 된다. 실제 그런 작품들을 보기도 했고. 다른 작품을 쓰진 않더라도 번외편으로 독자들의 원망(?)을 해소시켜줄 수도 있다.


로맨스라는 판타지


여성들이 로맨스를 즐겨 보는 이유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남자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외형적으로는 완벽남이 기본이고, 나쁜 남자 스타일도 인기가 많다.


여기서 로맨스라는 주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독자가 소설에서 보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말이다. 인물들의 외형은 설정일 뿐 인물들 간에 오가는 사랑의 감정에 공감하고 위로 받으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결국 엔딩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바로 직전에 끊음으로써 충격을 주고, 해결하지 못한 감정을 풀기 위해 다음 회차를 읽게 만든다. 그 과정이 반복되다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완전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오래 전에 김은숙 드라마 작가님이 로맨스의 대가가 된 이유를 듣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작가님의 남동생들은 상당히 로맨틱한 분들이었던 모양이다. 작가님은 모든 남자가 다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 사랑이란 비 오는 날 저는 비를 맞고 가도 누나에겐 우산을 양보하는 남동생의 마음 같은 거라며.

아주 작은 배려이고 가족이면 그게 가능할 것도 같지만, 현실을 보자.

우산을 양보하는 남동생들이 얼마나 될까?


요즘이야 가족문화가 달라졌지만, 우리 때만 하더라도 누나나 형이 동생들에게 양보하는 게 미덕이던 시절이다. 그런 시절에 김은숙 작가님은 가족애에서 사랑을 배운 듯하다.

나는 그런 현상이 꽤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에는 로맨스가 없어서 소설이나 드라마란 판타지에 열광하고 있으니까.


나도 처음 로맨스를 쓸 때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거의 울면서 썼던 기억이 있다. (ㅎㅎ) 순수문학을 할 줄 알았지, 로맨스물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로맨스를 쓰면서 깨달은 건 나도 로맨스를 꿈꾸는 여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살았다는 게 무척 슬펐다.


사람들은 누구나 로맨스를 꿈꾼다. 현실에 찌들어 살면서 어느 순간 잊어버린 것뿐이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건 그만큼 내 안에 로맨스가 없고, 그렇게 살아보지도 못했다는 반증이다.


김은숙 작가님처럼 로맨스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 그래야 표현도 자연스럽게 나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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