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 [쿠바] 무료함의 감성

쿠바 시엔푸에고스에서

by greenee

ep4.

무료함의 감성


작은 시골 마을 '히론'에서 '트리니다드'로 지역 이동할 때 버스를 입석하여 탔었다. 입석의 이유는 히론의 비아술 예매소가 휴무로 인해 2일 동안 굳건히 닫혀있었다.(ep.3) 실패의 경험을 거듭하면 유연함의 능력치가 생긴다. 그래서 나는 트리니다드에 도착하자마자 '시엔푸에고스'가는 날의 버스를 미리 예약할 수 있었다.


버스 예매부터 첫 단추가 잘 꿰어진 것인지 트리니다드에서 오전에 출발하는 비아술을 타고 이번엔 차 고치는 일 없이 한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심지어 무려 10 ~ 20분만 기다리고 출발하였다.


쿠바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여름이었ㄷ..ㅏ


시엔푸에고스에 도착하자마자 해야 할 것이 꽤나 많았다. 트리니다드 때처럼 비아술을 미리 예약하는 것과 ATM에서 돈을 뽑아야 했다. 가볍게 인출한 현금이 다 떨어져 버스를 예매할 돈이 부족했다. 일단 짐도 많고 이례적 이게도 별 탈 없이 이른 도착으로 시간도 많으니 까사(숙소)에 먼저 가서 짐을 풀기로 하였다. 그렇게 비아술 밖을 나섰다.



하이-!

누군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참으로 해맑으셨고 우리가 반가운 듯하였다.


뭐야 너네 시엔푸에고스 이제 온 거야 떠나는 거야?
난 이제 여기 떠나는데

잊을만하면 등장하신 우리 프랑스 아저씨였다. 아바나에서부터 3일 주기로 계속 보아 더 반가웠다. 부인은 화장실을 가셨는지 안보이시고 아저씨만 보이셨다. 아저씨와 간단한 스몰톡을 나눈 다음 한국에서 가져온 목캔디 몇 개를 손에 쥐어주고 빠이- 하였다. 아저씨는 첫 만남 때 우리가 준 목캔디를 굉장히 맛있게 먹어었다. 프랑스 아저씨와의 연도 시엔푸에고스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일정이 맞지가 않아 볼 수 없었다. (자고로 프랑스 아저씨는 ep.2를 시작으로 매번 등장하셨다.)



시엔푸에고스 중심가

버스장 밖을 다시 나섰다. 시엔푸에고스의 첫인상은 트리니다드처럼 낮은 건물이 주를 이뤘지만 도로는 아바나처럼 시원하게 트여있었다. 그래서인지 시골 느낌보다는 도시의 느낌이 확 났었다. 심지어 말레꼰도 있고 항구도시였다. 분위기 자체가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여기도 맘에 든다.




나는 공과사가 굉장히 뚜렷한 사람이다. 이 말의 속내는 내게 별 깊은 뜻 없이 공간을 분리해서 혼자 있는 걸 꽤나 아니 매우 좋아한다는 단순 뜻이다. 겉보기에는 낯도 상대적으로 안 가리고 말도 서슴없이 잘 걸다 보니 나를 잘 모르는 이들은 외향형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막상 자리 깔아주면 또 신나서 잘 놀다 보니 더 그래 보인다. 사람이랑 있으면 재밌고 좋긴 하다만 체력이 그지여서 그런지 성향이 원래 그런 것인지 그것이 반복이 되면 슬슬 혼자 있고 싶어 진다. 혼자 노는 시간이 내게는 외로움보다는 휴식이다.


나의 쿠바 여행 동행이었던 우리 오마니는 더위에 취약한 사람이다. 물론 나도 더위에 매우 취약하지만, 엄마도 나 못지않았다. 엄마의 또 다른 여행 동행은 필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쿠바여행에서 종종 나는 다른 여행자들과 나가 놀고 엄마는 까사 테라스에 앉아 필사를 즐겼다. 트리니다드에서는 숙소 옆집 옥상 땡볕에서 살사 수업을 받는 나를 보며 필사를 한 적이 있다. 숙소에서 쉬고 싶은 나를 젊으니랑 놀라며 고맙게도 강제로 내쫓은 후 남은 필사를 이어한 적이 있다. 우리는 조금 갠플 성향이 강했다.



히론부터 트리니다드까지 다양한 여행객들과 놀다 보니 딱 적절하게 혼자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시엔푸에고스는 여행자들 대부분 하루정도 가볍게 들리거나 잘 들리 않는 곳이다. 그 고요함에 이끌린 것인지 우리는 무려 2박 3일을 있게 되었다.


햇빛이 덜한 3시 이후부터 나가고 싶다는 오마니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 나 혼자 눈누난나 까사에 짐을 풀고 길을 나섰다. 해야 할 일이 꽤나 많았다. 위에서 언급했듯, 돈도 뽑아야 하고 버스도 예매해야 했다.


쓰다 보니 생각난 것인데 시엔푸에고스는 내가 들렸던 쿠바의 지역들 중에 와이파이가 가장 잘되었다. 그냥 도로변을 지나가면 문명의 세계를 쉽게 맛보고 즐길 수 있었다. 그니까 돈도 뽑아야 하고 버스도 예매해야 하고 말레꼰에서 멍도 좀 때리다가 길에서 문명도 만나야 했었다. 그리고 엄마랑 점심 먹을 음식도 테이크 아웃해가야 했다. 뭐야 왜케 바뻐





홀로 바삐 할 일을 마치고 더위가 살짝 가셨을 때 오마니랑 함께 다시 나왔다. 말레꼰 근처 펍에서 피나콜라다를 들고 노을을 또 즐겼다. 그냥 옆에 손님이 시킨 칵테일이 맛있어 보이길래 따라 시켰는데 도전에 성공하였다. 뭘 시킬지 모를 땐 남들 시키는 것을 따라 시키면 반은 성공이다.


물결에 비치는 빛이 예뻤다

해가 떨어질 때쯤에는 아까보다 더 격렬하게 바다에 햇빛이 반사되어 바닷물 위가 반짝반짝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카메라로 동영상, 사진 다 찍어봤지만 역시 실물에 못 미친다.


이렇게 일몰을 즐긴 후,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오마니의 문명 시간을 보내고 바쁘면서도 한적한 하루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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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니는 오마니대로 나는 나대로의 시간을 매우 만족하며 보냈기 때문에 2일 차에도 마찬가지로 낮에는 혼자 다니기로 했다.


오늘은 1일 차와 다른 방향으로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혼자 이어폰을 끼고 사진도 찍으며 흥얼흥얼 신나게 걸었다. 해외여행의 장점은 남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아주 맘 편히 흥겹게 길을 거닐 수 있다. 어차피 여행자로서 잠깐 있다 떠나니까.


말레꼰을 끼고 계속 걸어 다니면서 느낀 거지만 시엔푸에고스는 자전거 타기 딱인 것 같았다. 물론 히론에서 말했다시피 차가 생각 이상으로 생생 달려 도로변에서 타기는 매우 위험하다만 도보에서는 바다 끼고 타면 여행 낭만을 즐기기에 최적한 뷰였다.


나도 사람들 타는 거 보고 타고 싶었지만 어디서 빌리는지 몰라 못 탔다. 아니 사실 귀찮아서 찾을 노력도 안 했다..ㅎ


귀찮다 그냥 걷자

전날 길을 막 들어가다가 오마니랑 찾게 된 장소를 다시 찾았다. 그곳은 버려진 배들과 놀이기구처럼 구부러진 나무 그리고 바다가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그리고 우거진 나무 사이엔 햇빛이 아이들을 비춰주었다. 이 동네 아이들에게는 그곳이 놀이터 역할을 하는 듯하였다.


동심의 세계 속으로

나는 산책 갈 때도 입고 싶은 코디를 입을 정도로 편안함 대신 멋(?)을 택한다. 고3 때도 필수템인 츄리닝보다는 청바지를 입고 때론 기분전환 겸 치마를 입으며 학원을 다녔다. 이렇게 폼생폼사 기질이 있지만 공간은 또 꾸며지지 않는 자연스러운 공간을 좋아한다. 나는 좀 앞뒤가 안 맞는 사람이다. 인위적인 느낌이 강한 이탈리아 부라노섬보다 철근이 보이며 페인팅이 다 벗겨진 아바나가 더 매력 있게 느껴진 것도 이 이유다. 그래서인지 근사해 보이는 놀이기구 대신 자연스럽게 형성된 아이들만의 놀이 공간이 내 나름대로 낭만적이라 생각하였다.



이 날도 아이들이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이들을 좋아하다 보니 근처에 앉아 이 분위기를 즐겼다. 아이들도 익숙지 않는 동양인에 긍정적인 호기심을 보였다. 자고로 나는 국내에서도 해외에서도 애기들 한정 인기가 매우 많다고 자신한다. 훗


어쩌면 아이들이 날 놀아준 거 일 수도..?

스페인어를 3살 수준으로 하는 나로서 아이들과 소통이 전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화가 안되어도 함께 놀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함께 물수제비도 하고 아이들이 직접 잡은 미니 게도 보여주었다. 아이들만의 아지트 같은 놀이공간 뒤에는 현지인 집이 있었다. 놀고 있던 한 아이의 집이었고 아버지는 아이들이 노는 것을 행복하게 지켜보고 계셨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여행자가 아이들 주변에 있으니 처음엔 당황한 기색이 보였지만 아이들이랑 잘 노는 것을 보고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와 한참을 바라보셨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동심이 한국에서 많이 지쳤던 나의 마음을 많이 위로해주었다. 활기찼던 히론과 트리니다드에서와 다른 잔잔한 행복이었다.



어제 피나콜라다 한잔 때리며 노을을 감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는 길도 도착한 곳의 공간도 참으로 한적했다. 한산하고 여유로웠다.


타들어갈 것 같지만 갬성에 취해 멍때리기 좋은 곳


아무 생각 없이 털썩 벤치에 앉아 바다 멍을 때렸다. 그냥 이 잔잔함과 약간의 무료함이 평화로웠다. 그냥 여행의 흐름까지 완벽해서 너무 좋았다. 이 순간의 느낌이 내 눈앞에 펼쳐진 바다에 비치는 햇빛과도 같다 느껴졌다.


그 모습은 찬란했다. 물결 사이사이에 반짝이는 햇빛이 찬란하게 아름다웠다.

그렇게 멍을 때리며 한 시간을 흘러 보냈다.




오마니와 조금 늦은 점심을 함께 하기 위해 쿠바식 햄버거를 테이크 아웃하러 슬슬 일어났다. 자고로 해외에서도 아무거나 잘 먹는데 쿠바식 햄버거는 정말...

대충 이런 맛


올라 부에노 Hola, Bueno

햄버거를 들고 까사로 돌아가는 길에 아까 같이 놀았던 아이와 아버지를 봤다. 아버님이 날 먼저 반갑게 알아봐 주셨다. 여행에서 아이와의 만남은 늘 좋다.



맥주 맛집 말레꼰

이날도 마찬가지로 까사에서 좀 쉬다 오마니랑 함께 집 코앞 말레꼰에서 일몰을 안주삼아 맥주를 들이키며 눈에 보이는 잔잔한 물결처럼 고요하고 삼삼한 시엔푸에고스의 마지막 밤을 마무리하였다.







epilogue.

tvN에서 방영한 [알쓸신잡]은 한때 나의 밥 친구였다. 아무 에피소드나 막 틀어 놓고 봤던 것도 재밌게 또 보았었다. 여기서 많은 말들이 기억이 남았지만 그중 한 대화가 이 글을 쓰면서 유독 생각이 났다.


해는 넘어가도 노을은 남아있어요.
영원히 지속될 수 없지만, 약간의 여운이 남잖아요.
붉은 노을이라는 게.
우리 삶의 끝도 노을 같았으면 좋겠어요.

<알쓸신잡1 - EP5.경주>



어린왕자

모든 여행이 추억이었지만 [쿠바 14일+미국 1일] 여행은 유독 여행의 흐름이 완벽하였다. 강약중강약으로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강세 속 시엔푸에고스는 ''이었다. 그래서 이번 4화는 특별한 큰 만남도 별난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잔잔히 그때의 추억을 써내려 갔다.


나 또한, 알쓸신잡에서 유독 귀 기울어진 대화처럼 내 인생의 끝도 노을 같았으면 바라고 있다.


살면서 반짝 빛나기보다는 나의 삶이 마무리된다면 나라는 사람이 잠깐이라도 여운이 남는 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해가 지고 난 후 여운은 센치해지거나 감성적이다. 때론 낭만적이기도 하다. 무언가 대단한 업적을 이뤄 역사에 남아 여운을 남기고 싶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그런 욕심도 그럴 능력도 없다. 그저 내가 사는 동안 꽤나 인간적으로 괜찮았던 사람이라면 끝에는 잠깐이라도 주변인들에게 혹은 누군가의 어려움 속 도움을 주었던 이들에게 잔잔히 여운이 남는 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믿는다. 난 살면서의 성공이 아닌 살고 나서 이를 이뤘을 때가 진정한 성공한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냥 내 가치관일 뿐이다.


시엔푸에고스는 이상하게 여행을 갔다 오고 나서도 노을의 잔상처럼 은은하게 계속 생각나는 곳 중 하나였다. 그래서인가 이곳에서 평안을 얻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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