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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선생 Dec 24. 2022

어린 왕자 이야기

너는 어느 행성에서 왔니?

 교사를 하면서 기억에 남는 학생이 없느냐 묻는 아이들이 많다. 늘 너희가 가장 기억에 남을 것이다, 말하지만 사실 나도 사람인지라,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다. 아마 교직 경력에서 또 그 학생 같은 아이를 만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 아이는 나와 닮았다. 그리고 어린 왕자와 닮았다.




 새까만 머리에 하얀 피부. 모든 것에 흥미를 잃은 것 같은 눈빛. 6학년 아이라 치기엔 너무나도 직장 생활에 지쳐간 나의 눈빛과 똑 닮은 눈빛을 하고 있는 아이. 그게 그 아이의 첫인상이었다. 책을 읽으라 하면 책을 읽고, 수업시간에는 집중을 하고, 체육시간에는 또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하는 아이. 그런데 눈빛은 여전히 직장인의 눈빛을 하고 있는.. 어린 왕자 삽화와 매우 닮은 한 아이가 있었다.


 조용하고, 늘 시키는 것에 집중하는 아이. 얌전하디 얌전해 보이는 아이. 그런데 5월부터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는지, 그 무표정에 그 생기 없는 눈빛을 하고선 자꾸 내 주변을 맴돌았다. 쉬는 시간이 되면 여느 6학년 지 않게 내 주변을 알짱거렸다. 그럴 땐 교사의 부담주기 권법을 사용했다. 보통 "왜~? 선생님한테 그렇게 관심이 받고 싶어? 선생님이 좋구나?" 하고 물어보는 권법이다. 그러면 학생들은 소리 지르며 달아난다. 나는 또 능숙하게 이 부담권법을 사용했다. 녀석... 기겁하며 달아나겠지?

"어? 왜 이렇게 선생님 주변에 알짱거려? 선생님한테 관심받고 싶구나? 호호"




네. 선생님께 관심받고 싶어요.


당황스럽다. 권법이 먹히지 않다니... 이에 덧붙이는 녀석.


"선생님께 관심받고 싶어요. 그러면 안 되나요? 선생님이 좋으면 그럴 수도 있잖아요."


아...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강적 학생을 만난 것이다. 사실 내색은 못했지만 진짜 처음 보는 학생 유형이라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강에는 강으로. 물러설 수 없었다. 그 아이가 쉬는 시간에 알짱거릴 때마다 나는 배운 내용을 퀴즈로 내거나, 이전 시간에 배운 내용의 심화 내용을 알려주곤 했다. 그래도 알짱거릴 셈이냐?라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좋아하는 눈치였다. 더 신나서 나에게 찾아오는 녀석이었다. 나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그저 받아들였다. 그리고 어떤 쉬는 시간, 나를 찾아오지 않을 때에는 좀 아쉬운 기분까지 들었다. 나는 진 셈이다.


 어느 날은 또 묻는다.

"어른이 되면 어떤가요?"

"어른이 되면... 일도 해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지만 또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들도 많아지지.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

"책임이 많아지는 거군요. 그럼 저는 아이가 더 좋은 것 같아요."

흔히 아이들은 말한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어린 시절의 나도 그랬다. 예쁜 옷을 빨리 입고 싶었고, 빨리 돈을 벌고 싶었고, 빨리 술을 먹어보고 싶었고,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갖는 좋은 점만을 바라볼 줄 알았다. 책임이 많아진다라... 그리고 그 책임감이 커서 아이가 더 좋다는 말. 책임감이 얼마나 크고 부담스러운 것인지를 이 아이는 벌써부터 알고 있는 것일까?


 또 어느 날은 묻는다.

"저도 남아서 공부해도 돼요?"

"공부? 넌 공부 잘하잖아. 남아서 공부할 필요 없는데?"

"집에 가면 아무도 없어요. 여기서 공부하는 게 더 좋아요."

사실 집에 가서도 혼자 공부는 할 수 있다. 아이는 공부는 안 하고 나와 농담 따먹기를 하며 매일 그렇게 몇 시간씩 남아있었다. 사실 아이는 외로웠나 보다. 집에 가면 아무도 없다는 말을 자꾸 했다. 여름이 오면 여름 이야기를 하고, 더울 땐 아이스크림도 함께 나눠 먹고, 다른 친구들이랑 같이 남아서 대청소를 하고, 내가 업무가 급할 때에는 나는 업무를 하고, 아이는 자습을 했다. 나는 그렇게 그 아이와 친구가 되었다.


 또 어느 날은 묻는다.

"선생님은 친오빠랑 안 싸우시나요?"

"가끔 싸우지."

"저는 형이 짜증 나요. 형이 맨날 물 떠오라고 하고 저를 부려먹어요."

"동생은 가끔 심부름 서비스를 할 줄도 알아야 해. 사실 형은 너 모르게 너를 챙겨준 적이 많았을걸? 너 어렸을 때 형이 챙겨준 적이 없었나 한번 생각해 봐."

"아 그러네요. 맞아요."

순순히 인정하는 녀석이었다. 투정 부려도 곧바로 인정하고 털어버릴 줄 아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며 30 가까이 먹는 나이에도 친오빠와 게거품 물고 싸웠던 나를 되돌아보게 했다.


 어느 날은 내가 물었다.

"이사 갔는데 학교는 어떻게 오니?"

"엄마가 매일 차로 데려다주셔요."

"그래? 완전 왕자님이구나?"

그때부터였다. 나는 그 아이를 왕자님이라 불러주며 웃었다. 아이도 깔깔거렸다. 싫지 않은 별명이었나 보다.




 코가 시린 겨울이 찾아왔다.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졸업식이 왔다. 졸업식이 끝나도 아이들은 내 주변을 에워싸고 웅성웅성 수다를 떨다가 갔다. 다른 아이들이 있어서 쑥스러웠는지, 그 아이는 먼발치에서 내 주변을 쭈뼛거렸다. 아이들이 다 가고 나서, 그제야 그 아이는 나를 찾아왔다. 평상시처럼 내 주변을 아무 말도 없이 얼쩡거리다가 그렇게 제일 늦게 졸업식을 끝낸 아이였다. 가장 늦게까지 서성이다가 간 내 친구였다.



Epilogue.

중학생이 된 아이는 종종 나를 찾아온다. 4시에 그 아이가 온다 하면 나는 3시부터 반가운 친구를 기다리 듯이 기분이 좋아진다. 강적답게 오자마자 나에게 당당히 떡볶이를 사줄 것을 요구한다. 떡볶이를 함께 먹으며 이야기한다.

"학교가 저 졸업하더니 많이 근사해졌네요."

"그렇지? 학교가 공사하고 많이 근사해졌어."


"네, 그런데 선생님만큼은 아니에요."


떡볶이를 사준 보람이 생기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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