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드루리 Jan 31. 2022

밤밤언덕(7)

9

“에, 또 그러니까.. 지금이 우리가 더욱더 힘을 내야 할 시기라는 것입니다. 우리뿐만이 아니에요. 세상 전체가 불경기다 뭐다 해서 다들 힘든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좌절하고 포기를 해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도 망하고 회사도 망하는 겁니다. 회사가 있어야만 여러분들의 삶도 있는 거예요. 안 그렇습니까?”


에구, 또 시작이구나.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명훈이 다니는 공장의 월례 조회시간이다. 1달에 한 번 있는 조회 시간마다 사장의 인사말은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길게 이어졌다. 부족한 시간을 쪼개서라도 생산 수량을 늘려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지만 월례조회는 만사 제쳐두고서라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하는 말이 매번 똑같았다. 불경기니까 우리가 더욱 힘을 내야만 한다. 한사람 한사람 개개인이 더 노력해서 회사에 보탬이 되어야만 회사가 살지 않겠는가. 사측에서도 근로자들에게 더 많은 급여와 복지를 보장해 주겠다. 그러나 회사에서 말하는 복지는 늘 말뿐이었다. 벌써 지난해부터 수선을 해 주겠다는 직원 화장실과 휴게실은 예산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뤄지기만 했다. 사장은 근로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의지가 없는 사람이었다. 회사가 어렵다거나 예산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원들 모두는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올해도 사장님의 자가용은 어김없이 최신 고급 승용차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에, 그리고 말입니다. 이번에 새로운 직원이 입사를 하여 여러분들과 함께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손뼉을 쳐 주시고 반갑게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갑작스레 주목을 받게 된 명훈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직원들을 향해 꾸벅 절을 하였다. 산발적으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명훈은 분명히 알 수가 있었다. 계약직으로 입사한지 2개월밖에 되지 않은 자신이 정직원이 된 것에 불만스러워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말이다. 그러나 명훈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기에 이제는 무덤덤하게 느껴졌다. 아니, 의도적으로라도 그렇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그러니까 한 개 작업이 끝나면 여기 이 버튼을 누르고 다시 재료를 넣으면 되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1년여 전부터 공장일을 시작한 지훈이 명훈에게 이것저것 기계 작동법을 알려 주었다. 지훈은 아직 30세가 되지 않은 젊은 나이다. 몇 년간 공무원 준비를 하다 실패를 하고, 다시 공부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일을 하는 거란다. 한, 두 달만 하다 그만둘 것이라 공공연하게 말해 왔지만 벌써 1년이 넘게 공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도 주변 사람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었다.


“정말이에요. 나 곧 그만둘 거예요. 저는 이런 육체노동보다 사무직이 적성에 훨씬 더 맞다니까요. 글쎄.”


“네, 알겠습니다.”


한참 기계 작동법을 머릿속에 익히던 명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그런데 지훈은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 건지 뾰로통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아는 거 맞아요? 건성으로 대답만 하는 거 아니죠?”


명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지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지훈이 겁을 먹은 것인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뭐, 하다 보면 아시겠죠. 근데 실수하면 정말 큰일 나요. 까딱하면 손가락 하나 절단나기 십상이니까. 아저씨 다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되면 주변 사람들이 죽어난다니까요.”


지훈이 자리를 뜨고 난 후 명훈은 조심스럽게 프레스 기계 안에 원재료를 집어넣었다. 작동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고 있으면 어느새 사출품이 완성되었다. 명훈은 자신이 처음으로 만든 제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만족한 듯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다음 작업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단순노동인지라 몸은 힘들지 몰라도 자신이 무언가를 생산해 낸다는 만족감 때문에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쁨을 느꼈다. 명훈이 능숙한 작업자들과 똑같은 속도로 생산 수량을 맞추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초기 작업자들에겐 늘 있는 일이다. 이 일도 숙련도를 요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처음부터 결과물을 바라는 압박감이 명훈에게 조바심을 부추겼다. 명훈은 옆에 있는 외국인 근로자의 생산 수량을 따라가려고 서둘러 작동 버튼을 눌러댔다. 꼭 뱁새가 황새 쫓아가다 가랑이 찢어지는 것처럼 불량률이 높아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내, 저럴 줄 알았다지. 아니, 저런 범죄자 양반이 대체 무슨 일을 잘 한다고 덜컥 기계를 맡겨요.”


일주일 만에 직원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어떤 조직이건 간에 불만을 조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그 장단에 동조하기 마련이다. 한두 사람이 명훈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자 공장 전체로 분위기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아조씨, 제 거랑 맞추려고 하지 마요. 그러다 불량품만 많아져서 직장님한테 욕먹어요.”


스리랑카 국적의 외국인 노동자 다리두가 한숨을 내쉬며 명훈에게 말했다.


“그렇군요. 저기, 죄송한데요. 어떻게 해야 불량이 안 나는 건지 좀 가르쳐 줄 수 있을까요?”


명훈의 대답에 다리두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다리두가 2년 넘게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한국인은 어떻게든 자신을 깔보려 한다는 것이다. 냄새가 난다고 욕을 하고 말투가 어눌하다고 구박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자신보다 한참 나이 많은 한국인이 이렇게 깍듯이 자신을 존대하다니.. 일전에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다. 한국 사람들이 왜 그를 피하려고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리두는 서툰 한국어로 다시 말했다.


“아조씨, 근데 나도 시간 없어요. 일해야 한다구요.”


“그렇죠? 미안해요. 근데 조금만 알려주면 제가 제 일당 떼서라도 보상해 드릴게요. 어떻게 안 되겠어요?”


다리두는 명훈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동안 자신을 닦달하던 이들의 눈빛과는 전혀 달랐다. 순간, 다리두는 명훈이 온전한 한국인이 아니라 자신처럼 타지에서 온 이방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요. 아조씨.”


다리두는 명훈을 애써 외면하고 고개를 돌려 자신의 기계에만 집중을 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몇 시간 동안 다리두의 머릿속에는 명훈의 얼굴이 계속해서 아른거렸다. 쉬는 시간이 되자 다리두가 조심스레 명훈에게로 다가가 말했다.


“아조씨, 대신 제가 하는 기본적인 것만 가르쳐 주께요. 저도 시간이 안 많아서 자세히는 못 가르쳐 줘요. 괜찮죠?”


“진짜요? 네네. 그럼요. 정말 고마워요.”


다리두는 쉬는 시간마다 짬짬이 명훈에게 기계 작동법을 알려 주었다. 사실, 한국인보다 외국인 노동자의 숙련도가 훨씬 뛰어나기 마련이다.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생산 수량이 곧 공장에서 살아남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잣대이고, 자연히 비자를 연장할 수 있는 방편이 되기에 그 누구보다 절실히 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명훈은 다리두가 가르쳐 주는 방법대로 열정적으로 일을 배웠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학창 시절에는 왜 그렇게 배우는 게 싫었는지 몰라. 배움이란 게 이토록 가슴 뿌듯해지는 일인 줄도 모르고.


점심시간이 되었지만 명훈은 그 누구와도 함께 식사를 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명훈의 시선을 외면한 탓이었다. 살인자라는 오명은 그리 쉽게 씻어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설령 명훈이 술에 취해 자신의 의지로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타인에게 그건 더 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 죄명으로 기소가 된 시점에 이미 명훈은 추악한 살인자로 낙인찍혀 버렸기 때문이다.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명훈이 애처로워 보였는지 병욱이 함께 식당에 들어온 무리를 뒤로하고 명훈의 앞으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명훈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90도로 절을 했다. 그러나 병욱은 인사도 받지 않고 아무 말 없이 그냥 식사를 할 뿐이었다. 먼저 식사를 마친 명훈은 병욱이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병욱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명훈이 앉아 있는 것을 상관도 하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식사를 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그날뿐만이 아니었다.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명훈은 병욱과 함께 식사를 했다. 병욱은 식사 중에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앞에 앉아 있는 명훈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나자 명훈의 생산 수량은 공장노동자의 평균 생산 수량을 훌쩍 넘어갈 정도로 숙련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일취월장이다. 다리두를 비롯한 외국인 노동자와의 사이도 부쩍 좋아졌다. 함께 간식을 나눠 먹고, 서로의 일상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속에 있는 이야기도 조금씩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쯤 되니 한국인 노동자들의 시선도 자연스레 누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늘 병욱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보면 회사에서도 그를 정식 근로자로 인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명훈을 무시하고 외면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형님, 정말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요? 저는 저 살인자 아저씨랑 한 공간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린다고요. 지난번에 내가 프레스 작동법을 알려 주려고 하니까 갑자기 나를 확 째려보더라니까요. 그때 얼마나 등골이 오싹했는 줄 알아요? 형님도 그랬잖아요. 저런 사람하고 어떻게 같이 근무를 하느냐고.”


가만히 지훈의 얘기를 듣고 있던 2팀 반장 태석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어쩔 수 없잖냐. 직장님이 저렇게 뒤에서 저 양반을 받치고 있는데 난들 어쩌겠냐? 아니꼬아도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아이씨, 정말 그래야 하는 거예요."


잠시 생각에 잠긴 지훈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님, 우리 이러는 거 어떨까요?”


“응?”


지훈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태석에게 귓속말을 했다. 한참을 듣고 있던 태석은 뭔가가 솔깃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10

“상우야, 같이 가. 같이 가자니까.”


가쁜 숨을 내쉬며 달려온 종수가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엇, 종수야. 왜 이렇게 헐레벌떡 뛰어오는 거야?”


종수는 어이없다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내가 저 멀리서 한참이나 불렀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더구만.”


“아, 그랬어? 미안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오늘은 또 왜 이렇게 정신이 없대.”


“아냐, 무슨 일은.”


종수의 말처럼 내 마음은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지금의 나에게 소희와의 관계를 빼고 더 중요한 일이 뭐가 있겠는가. 소희는 분명 나를 피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나를 보며 환하게 웃던 모습도 최근에는 전혀 딴 세상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밤마다 길게 이어지던 통화시간도 어느새 툭 끊겨 버렸다. ‘소희야,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는 거야? 무슨 일 있는 거야?’ 소희 앞에 다가가 하나하나 물어보고 싶은데 정작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내성적인 성격이 나의 발목을 잡았다. 학교에서도 매일매일 소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이게 무슨 남자친구야. 어느덧 자괴감마저 느껴졌다. 아버지와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희가 나를 피한다는 사실이 모두 다 당신 탓인 것만 같아 더더욱 괴로웠다. 소원해진 연인 사이란 이렇게 서서히 멀어지는 것이겠지.


“내일부터 기말고사인 거 다들 알고 있지? 이번 시험은 내신에 반영되는 거니까 다들 명심해야 해.”


기말고사의 시작을 알리는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여기저기서 친구들의 탄식이 들려왔다. 사실, 나는 내심 기말고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부에 적잖은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지난 몇 주간 소희와 함께 도서관을 다닌 탓일까? 아님, 소희에게 잘 보이려 열심히 공부를 한 탓일까? 일전에는 느끼지 못했었는데 어느덧 공부에 흥미가 생겨 버렸다. 모르던 걸 하나하나 알아가는 게 그렇게 재미있고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성적을 올려서 소희를 기쁘게 해 주고 싶은 마음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상우야, 이거 답 뭐야? 3번 맞지? 응?”


기말고사 마지막 날, 종수가 시험지를 들고는 나에게 달려왔다.


“음, 이건 4번이 답인 것 같은데.”


“정말? 확실한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를 어째. 난 3교시 시험도 망했나 봐.”


종수는 한참 동안 시험지를 들여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근데, 너 왜 이렇게 여유로운 거야? 설마, 이 형님만 빼고 혼자 시험을 잘 본 건 아니겠지?”


나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무언의 긍정이라 생각했는지 종수는 몸을 더 배배 꼬았다.


“아, 진짜 나는 언제쯤 성적이 올라가냐?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종수의 끝없는 응석을 들어주는 동안에도 내 머릿속에는 소희의 얼굴만 아른거렸다. 소희는 시험을 잘 치렀을까? 내 마음도 모른 채 소희는 짝꿍 지현이와 함께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소희는 무슨 급한 일이 생긴 건지 한참을 앞서 가다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집으로 향했다. 내 기분과는 다르게 하늘은 더없이 맑고 푸르렀다. 시험도 끝났겠다, 오늘처럼 화창한 날이면 어디 놀러 가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난 왜 이 좋은 날에 힘없이 터벅터벅 집에 돌아가고 있는 걸까? 온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다. 그냥 집에 가서 잠이나 실컷 자야지. 한참을 땅만 보고 집으로 걸어가다 우리 집 대문이 보일 때쯤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때였다. 무언가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상우야, 상우야.”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구지? 분명 소희 목소리 같았는데. 소희 생각을 너무 오래 하다 보니 이제 환청이라도 들리는 걸까? 그런데 우리 집 대문 옆에서 소희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는 웃고 있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랐다. 소희가 우리 집을 찾아온 것은 우리가 사귄 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소희야, 우리 집에 어떻게..”


“뭐야? 전혀 반갑지 않은 모양이네.”


“아냐. 그게.. 너무 뜻밖이라서 그래.”


“오늘 뭐 아무것도 없는 거야?”


응? 나는 영문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뭐야? 진짜. 내 남자친구 맞아? 오늘 시험도 끝났는데 데이트 신청도 안 하는 거야?”


“아. 그게 말이야."


“그럴 줄 알았어. 대신 내가 생각해 둔 곳이 있어.”


“어. 어디?”


“나 따라오면 돼. 어서 가자.”


소희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소희가 가는 곳으로 따라나서는 나의 발걸음이 어느새 가벼워졌다. 마치 10분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어느덧 하늘이 조금씩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상우야 힘들지? 이제 거의 다 왔어,”


나와 소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언덕 위로 올라갔다. 소희가 나를 이끌고 데려간 곳은 전혀 낯설지가 않은 곳이다. 밤밤언덕. 아버지가 이름 붙여 준 바로 그곳이다.


“나 어릴 때 아빠랑 여기 와 본 적이 있었거든. 그런데 밤하늘이 너무 예쁜 거야. 그래서 지난 몇 년간 다짐한 게 하나 있었어.”


나는 물끄러미 소희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그게 뭔데?”


“내가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같이 와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거. 지금처럼 말이야."


소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오늘, 마침내 그 소원을 이룬 것 같아.”


그랬구나. 소희도 이 언덕에 나와 같은 추억이 있었구나.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났다. 어린 시절 당신과 함께 했던 이 추억의 장소가 나에게 또 다른 행복을 안겨주려 하고 있다.


“나도..”


“응?”


나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추억을 공유해 보려 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고 입을 닫았다. 괜히 껄끄러운 아버지 이야기로 분위기를 엉뚱하게 몰고 갈 필요는 없을 테니까. 아직까지는.


“아냐, 아무것도.”


한동안 우리는 아무런 말도 없이 밤하늘만 쳐다보았다. 날씨가 많이 쌀쌀해진 탓에 우리는 서로를 꼭 끌어안고는 서로에게 더할 나위 없는 온기가 되어 주었다. 마침내 내가 진정한 그녀의 남자친구가 된 기분이다.


“난 있지. 아까까지만 해도 소희 네가 나를 피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어. 요 며칠간 연락도 잘 안되고 해서 내가 싫어진 게 아닐까 하고 말이야. 우습지?”


“말도 안 돼. 정말 우습다. 시험 때라 내가 연락이 잘되지 않아서 그랬구나.”


소희는 조심스럽게 내 얼굴 표정을 살폈다.


“상우야, 그런 생각 하게 해서 미안해. 우리 부모님이 워낙 극성이라서 말이야. 이번 기말고사는 정말 잘 치러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했거든. 그래서 지난 한 주 동안은 시험공부에 전념하느라 그랬나 봐. 대신 시험 끝나면 난 너랑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생각에 엄청 기대에 부풀어 있었는데 상우, 넌 안 그랬어?”


“무..물론이지. 그게 내가 제일 바라는 건데.”


“그렇다고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어떻게 내가 널 피한다고 생각하냐?”


소희는 눈을 흘기며 나를 쳐다보았다. 순간 창피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남자답지 못하게시리. 내가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보.”


그때였다. 누군가가 색칠을 하듯 별똥별이 밤하늘에 새하얀 그림을 그렸다.


“봤어? 방금, 별똥별!! 내가 제대로 본 거 맞지?”


소희가 소리쳤다.


“응. 나도 분명히 봤어. 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별똥별을 본 것 같아.”


눈 깜짝할 새도 없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와 소희는 분명히 그 모습을 확인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얼굴을 맞대었다. 하늘은 언제나 나의 편이었다.


“상우랑 같이 있으니까 참 좋다. 이렇게 귀한 것도 보고. 사실, 오늘 어디로 놀러 갈까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여기 오길 참 잘한 것 같아. 그치?”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진난만하게 웃는 소희의 얼굴이 너무나 예뻐 보였다. 어쩌다가 한 번씩 되살아나는 용기는 지금이 바로 적기라고 나를 재촉했다. 밤하늘을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수많은 별들에 힘을 얻어 나는 조심스레 소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소희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이전 06화 밤밤언덕(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