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훈은 2주째 철야작업을 강행하느라 기진맥진이 되어 버렸다. 오늘 물량까지만 소화하면 이번 주말에는 원 없이 잠을 자겠노라 다짐했다. 명훈은 2주 전 병욱이 자신에게 한 말의 진의를 아직까지 알지 못했다. 병욱은 묵묵히 철야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면 징계 여부는 그 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비슷한 일을 경험한 동료 직원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무런 징계 절차 없이 이렇게 쉽게 넘어가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직원들 사이에서는 병욱이 명훈의 뒤를 봐주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수군대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만 갔다. 명훈 역시 알 길이 없었다. 왜 병욱이 자신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것일까?
“철야 2주 차 첫째 날 물량은 지금 하시는 2번 기계에서 작업을 하지 마시고 11번 기계로 자리를 옮겨 작업을 하세요. 그리고 마지막 날 물량은 4번 기계에서 작업을 하는 겁니다. 아시겠죠?”
명훈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병욱이 그러라고 하니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명훈은 2주 차 철야작업을 마치는 마지막 제품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하고는 박스를 닫았다.
다음날 아침, 공장 기계 작업반에 비상이 걸렸다. 병욱은 퇴근시간을 미루어 철야작업을 진행했던 야간근로자들까지 아침조회시간에 소집을 시켰다. 직원들은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래?”
직원들은 힐끔힐끔 명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를 못마땅해 하는 눈치는 여전했다. 병욱이 뭔가 중대한 발표를 할 것처럼 짐짓 무거운 표정으로 사람들 앞에 나와 입을 열었다.
“철야작업을 하느라 피곤하신 분들도 많으실 텐데 이렇게 힘들게 다들 자리에 남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 공장의 치부를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아시겠지만 지난 1년여간 있었던 사건사고들에 대한 것입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겠죠? 왜 박명훈 씨는 일주일째 연속으로 물품 검수 사고를 일으켰는데도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을까 하고 말이죠.”
“맞습니다. 직장님, 안 그래도 묻고 싶었던 일입니다. 박 씨 잘못을 왜 그렇게 덮으려고만 하시는 겁니까? 저희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명훈을 둘러싸고 있던 근로자들의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 소리를 잠식시킨 것은 역시 병욱의 호통이었다.
“조용히 하세요. 그래서 지금 이 말씀을 꺼내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지난 몇 주 사이 공장에서 검수 물품의 혼입과 생산 불량품이 대량으로 발생하여 여러모로 생산에 차질이 빚어졌습니다. 아니, 지난 몇 주간이 아니죠. 벌써 1년 사이 몇 번이나 발생했던 일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이 공장에서 20년을 넘게 근무하였지만 이렇게 많은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하는 건 일전에는 없던 일입니다. 예전처럼 이번 건도 다들 박명훈 씨의 실수로 알고 있으실 테죠.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금 생각을 해 보니 내가 그렇게 사람을 잘못 본 것일까 의구심이 들더군요.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본 박명훈 씨는 절대 그런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병욱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근로자들의 원성이 일순간 잠잠해졌다. 병욱은 여전히 위엄 있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는 일부러 박명훈 씨의 작업 분량을 여러 대의 기계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다들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겠습니까? 놀랍게도 특정 시간에 특정 기계에서 작업한 물량에서만 불량이 발생하더란 말입니다. 기계 결함일까요?”
병욱은 잠시 뜸을 들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별도로 확인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 이후에도 또 발생했습니다. 분명 제가 확인했던 완제품이 검수를 거치자마자 혼입과 불량이 대량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입니다. 근데 이게 최근에만 발생했던 일이 아니란 사실이 중요합니다. 다들 아시죠? 분명 저를 비롯한 우리 회사 검수반에서 이중 삼중으로 검수를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청업체로 배송된 제품에 하자가 발견되는 것을요. 물론 이번에는 원청업체에 납품이 되기 전 확인을 해서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만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더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뭔가 하나 실험을 해보고자 다짐을 했습니다. 지난 2주간 야간작업자들의 완제품 수량을 검수하면서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좀 전에 말했다시피 유독 한 개의 생산라인에서 특정 시간에만 똑같은 결함이 발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게 돼서 참으로 애석합니다만 누군가가 박명훈 씨 작업 시간에 기계를 조작하고 생산물량을 의도적으로 바꿔치기하고 있었습니다. 저기 검수반 팀원들까지 다 확인을 한 일입니다. 그렇죠?”
“네!!”
검수반의 반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대답했다. 좀 전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술렁임이 커져만 갔다. 분명 명훈을 욕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근로자들 모두 이게 무슨 일인가 혼란스러워하는 눈치다.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저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오늘 과업을 마치더라도 저는 퇴근을 하지 않고 제 방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사람에겐 제가 두 번째 기회를 드릴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 다들 각자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제 방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아시겠습니까?”
병욱의 일장연설이 끝나자 근로자들의 수군대는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병욱은 그 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더 큰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이 일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는 사람이 있을 시에는 저는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모든 것은 제 선에서 정리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억측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자, 다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세요.”
병욱의 말투에는 위엄이 있었다. 그 누구도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박명훈 씨, 이번 건은 아저씨 잘못이 아니니까 이대로 넘어갈 겁니다. 지금 하시는 대로 일을 성실하게 잘 해 주시면 됩니다. 아시겠죠?”
명훈은 병욱의 조언대로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하겠노라 또 한 번 다짐했다. 그러나 내심 병욱이 말하는 범인의 정체가 누구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대체 누구일까? 누가 나에게 억하심정을 가지고 그토록 잘못된 선택을 하였을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범인의 정체는 다음 날 어렵지 않게 알 수가 있었다. 지훈은 다시 공무원 준비를 하러 가겠다는 말만 남긴 채 다음날 바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아, 그 참. 지금 이 상황에 직장님이 말한 게 중요해요. 오늘 할당된 생산 수량 못 맞추면 내일도 철야를 해야 한다고요. 박 씨는 일요일에도 나와서 일을 할 거예요? 혼자 나와서 여기 이 물량들 다 쳐낼 자신 있으면 그렇게 해 봐요.”
태석은 명훈의 옆에 쌓여 있는 원재료 박스를 쳐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사실, 명백한 태석의 잘못이었다. 분명 오늘까지 할당된 생산 수량을 맞추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태석이 납품 계획서와 출고수량을 잘못 파악한 탓이다. 병욱이 한 번씩 자리를 비울 때면 야간작업에 애로사항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게다가 오늘은 오전부터 기계 2대가 작동 불능 상태였다.
“토요일은 작업 안 합니다.”
상시 거래 중인 수리업체에서도 이번 주만큼은 작업이 힘들다고 말했다. 빈번하게 있는 일이다. 어느 누가 주말에 일을 하려고 하겠는가? 그러나 명훈의 회사와 같은 영세한 공장에서는 주말에도 빈번하게 철야가 이어졌다. 주 52시간 법정근로시간제한이 무색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토요일 오전부터 멈춰 있던 기계의 영향으로 차주 월요일 거래처에 납품해야 할 출고수량은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다. 병욱이 있었더라면 이 위기를 어떻게든 타개했을 테지만 오늘 대신해서 직을 수행하고 있는 태석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생산시간을 줄이기 위해 작업자들에게 기계 온도를 높이라며 열을 내고 있는 것이다. 명훈은 마지못해 기계 온도를 4단계로 높였다. 명훈과 함께 작업 중인 다리두 역시 고개를 흔들며 온도를 높였다. 다행스럽게도 높아진 온도는 생산시간을 짧게 하여 완제품 수량을 늘려 주었다. 그러나 임시방편일 뿐 언제까지 기계 온도에 의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명훈은 차곡차곡 쌓여 가는 완제품 박스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수량이다. 회사 내부에서는 사정도 모른 채 그저 근로자들에게 생산량을 맞춰 내라며 닦달할 뿐이다. 당장 기계가 고장이 나서 생산을 할 수가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사측에선 근로자가 말하는 그 어떤 사유도 핑계라고 생각했다. 천재지변이 생기더라도 정해진 납기일에 수량을 맞춰 내야만 한다. 명훈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석은 공장을 한 바퀴 쭉 돌며 흡족한 듯 웃음을 지었다.
“좋아요. 좋아. 그렇게만 하면 돼요."
명훈의 눈에는 보이는데 왜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걸까? 명훈은 과열된 기계의 상태가 한계치에 다다랐음을 직감하였다. 더 큰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당장 기계를 멈춰야 한다. 명훈은 자신의 기계에서 내려와 태석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태석은 다리두가 작업 중인 기계 앞에서 완제품 수량을 체크하고 있었다. 명훈이 태석에게 다가가는 그 순간, 다리두가 작업 중인 기계에서 ‘펑’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공장 안에서 작업 중인 모든 근로자들이 화들짝 놀라 밖으로 뛰쳐나갔다.
“으악, 이게 뭐야?”
눈앞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태석은 깜짝 놀라 그만 다리를 헛짚고 자리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명훈은 쓰러져 있는 태석에게로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기계에서 일어난 불꽃은 더 큰 소리를 내며 두 번째 폭발음을 일으켰다. 어느새 옆 기계로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다. 명훈은 정신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기만 한 다리두에게 소리를 쳤다.
“다리두, 뭐해? 정신 차려. 얼른 가서 소화기 가져와.”
다리두는 아무런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명훈은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태석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 다시 한번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다리두, 정신 차려!!”
다리두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명훈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 아.. 소화기. 소화기, 알았어요. 아조씨.”
명훈은 태석의 팔을 둘러메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태석은 다시 한번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 내 다리 어떡해. 다리가 부러졌나 봐.”
명훈이 얼핏 보기엔 다리가 부러진 것 같진 않았다. 등 뒤에서 불길이 일고 있는 이 순간에도 태석은 스스로 이 위기를 헤쳐 나갈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다. 명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태석을 들쳐 업으려 자세를 잡았다.
“반장님, 제가 반장님을 업고 내려갈게요. 제 등에 업힐 수 있겠어요?”
잠시 넋이 나간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태석은 자신이 의지할 사람이 명훈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그의 어깨를 꼭 붙잡았다.
“네, 네. 할 수 있어요.”
“좋아요.”
명훈이 태석을 업으려 고개를 돌리는 그때 다시 한번 눈앞으로 불길이 확 솟구쳐 올랐다. 촌각을 다투는 급박한 순간, 명훈은 자신의 몸을 휘감는 무시무시한 화염도 불사하며 태석을 공장 밖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 다리두를 비롯한 근로자 여러 명이 소화기를 들고 달려왔다. 때때로 위기는 모두를 결집하게 만든다. 이 순간만큼은 근로자들 모두가 너 나 할 것 없이 합심하여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일제히 분사하는 소화기의 힘으로 불길은 더 크게 번지지 않고 이른 시간에 멈춰 섰다. 초기 대응이 민첩하게 이뤄진 덕분이었다. 그제야 안심을 한 명훈은 순간 정신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