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드루리 Feb 16. 2022

밤밤언덕(8)

11

명훈은 아침부터 분주하게 원재료 상자를 날랐다. 오늘은 총 2박스의 원재료를 소진시킬 생각이다. 명훈은 본인의 생산 계획표를 꼼꼼히 체크하고는 흐뭇하게 웃었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고 했던가. 일전에 교도소 안에서도 노역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기분은 그때와 비할 바가 없다. 가장 큰 이유는 남들의 인정을 받기 때문이리라. 공장에서는 매달 자신의 생산 수량을 체크하여 목표치를 초과 달성하는 이에게 금일봉을 선물하였다. 명훈은 내 옆의 누군가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박수를 받는 그 광경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나도 저들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 명훈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조금씩 욕심이 생겼다. 금전이라는 보상이 주어지는 점 역시 크나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명훈은 어느덧 이 곳 생활에 녹아들어 있었다. 명훈이 행복한 상상에 빠져 있던 바로 그때, 저 멀리서 몇몇 사람이 무리 지어 다급히 공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잰 걸음으로 명훈이 있는 기계반 앞으로 다가왔다. 명훈은 그들 사이에 서 있는 병욱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병욱은 붉으락 푸르락 상기된 얼굴로 명훈의 눈앞에 완제품 박스 상자를 내밀었다. 박스 안에는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어야 할 제품들이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이거 박 씨가 품질팀으로 넘긴 박스 맞죠? 여기 박 씨 서명도 확인란에 찍혀 있으니까요.”


명훈은 박스의 서명란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신가요?”


병욱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이 박스 안에서 혼입 물품이 대량으로 발생되었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지난주에 박 씨가 작업한 모든 박스에서 불량이 나왔어요. 어떻게 이런 실수를 할 수 있는 거죠?”


“네? 그럴 리가 없는데.”


명훈은 자신이 작업한 박스를 이리저리 뒤적이며 제품을 확인하였다. 병욱의 말대로 별개의 박스에 들어있어야 할 1번 제품과 2번 제품이 각각 뒤섞여져 혼입되어 있었다.


“제가 뒤늦게나마 한 번 더 검수를 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대체 어떻게 할 뻔했습니까?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요. 주간작업물량은 별도로 품질팀에 검수를 받은 뒤에 도장을 찍으라고!!”


병욱의 호통소리가 점점 커져만 갔다. 공장에서 작업 중이던 기계 작업자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려 명훈과 병욱을 쳐다보았다. 병욱 역시 그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뒤돌아보며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다들 뭐 하는 겁니까? 작업 중에 한눈팔게 돼 있어요? 지금 어딜 보고 있어요!!”


병욱이 말로만 듣던 호랑이 선생님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다들 병욱의 호통에 겁이 난 모양인지 일제히 본인의 기계 앞으로 눈길을 돌렸다. 명훈은 여전히 눈앞에 놓여 있는 박스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내가 실수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품질팀에 검수를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럴 이유가 없잖은가. 그러나 그 얘기를 꺼내 봤자 잔뜩 화가 난 병욱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 사안에 대해서 좀 더 추궁해야 할 게 남아 있으니까 이따 쉬는 시간에 내 방으로 좀 와요. 그리고 오늘 기계 작업은 저 친구에게 넘기고.”


병욱의 옆에는 카트에 박스를 싣고 온 주간 근로자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급히 호출되어 달려온 모양이다.


“네, 알겠습니다.”


명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힘없이 방호 도구를 벗어 놓고는 탈의실로 향했다. 명훈은 탈의실 안에서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거듭 생각해 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본인의 잘못이든 아니든 이런 상황에 처한 자신이 밉기만 했다.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는데 이마저도 놓쳐 버리는 건가. 명훈은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앞으로 마주해야 할 병욱이 그저 무섭게만 느껴졌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벨 소리가 울리자, 다리두가 황급히 탈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조씨, 내가 아까부터 봤는데 그거 진짜 말도 안 돼요. 나도 옆에서 확인을 했는데 진짜 아니잖아요.”


명훈은 씩 하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다리두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조씨, 내가 가서 직장님께 말해 주께요.”


명훈은 열성적으로 자신을 변호해 주려는 다리두가 참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 작은 공장 안에서 유일한 자신의 편이라 생각했기에 그를 곤경에 처하게 할 수는 없었다.


“아냐, 다리두. 괜찮아. 그러다 괜히 너까지 욕을 먹을지도 몰라. 내가 가서 잘 말해볼게.”


“그래도요.”


명훈은 다리두를 뒤로 하고 탈의실 밖으로 나갔다. 탈의실 안에 혼자 남은 다리두는 명훈의 쓸쓸한 뒷모습을 쳐다보고는 갑자기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멀고 먼 타지에서 의지가 되는 친구를 갖는다는 게 이토록 소중한 것인 줄 예전에는 미쳐 알지 못했다.

명훈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럽게 병욱의 방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도 들어오라는 병욱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안으로 들어온 명훈은 언제나 그랬듯 90도로 크게 인사를 했다. 병욱은 명훈에게 의자를 내어주며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그런데 명훈은 힐끔 병욱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병욱이 살며시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왜일까? 분명 좀 전에 명훈에게 불같이 화를 내던 얼굴과는 전혀 다른 표정이다.     

“아이씨,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태석이 투덜대며 휴게실 안으로 들어오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지훈이 황급히 달려왔다.


“형, 어떻게 됐어요? 네?”


“아, 나도 몰라.”


“왜요? 뭐가 잘못된 거예요? 말해 봐요.”


태석은 귀찮다는 듯 신경질을 내며 말했다.


“아, 글쎄 그 양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계속 일을 한다잖아.”


“정말요? 그래도 징계는 받을 거 아니에요? 네?”


“아냐, 그런 것도 일절 없대.”


“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한, 두 번도 아니고 일주일 내내 사고를 쳤는데 어쩜 그래요?”


“나도 몰라. 박명훈, 저 양반 정말 직장님이랑 가까운 친척이라도 되는 거야? 어쩐 거야? 이번에 주간반에서 불량이 나왔으니까 다음 주에는 쭉 야간반에서만 작업을 한다는 거야.”


“아니 그게 무슨.. 그게 무슨 징계에요? 누구는 야간작업을 못 해서 안달이구만.”


지훈은 맥이 빠진다는 듯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게 말이다.”


한참 동안 자리에 앉아 있던 태석은 근로시간을 알리는 벨 소리가 울리자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지훈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무언가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뭐해? 일하러 안 가?”


“형님,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제가 한 번 더 수를 써 봐야지.”


“아서라. 이제 보는 눈이 많아서 괜히 꼬리가 밟힐 지도 몰라. 그때는 저 양반이 아니라 너랑 내가 골로 가는 거야. 알아?”


지훈은 걱정 말라는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보는 눈이 없을 때 하면 되는 거죠. 야간반에서 근무한다고 했죠? 내가 남들 몰래 손을 써 볼게요. 형님이랑 내가 주간반일 때 문제가 생기면 그 누구도 우리를 의심하지 못할 거라구요. 그거 알죠? 올 봄에도 내가 품질팀 성현이 꼴 보기 싫어서 작업했던 거. 이번에도 문제없다고요."


태석은 지훈을 보며 실실 웃었다.


“너도 창 징하다. 곧 그만 둔다며? 공부하러 갈 거라며? 그만둔다는 얘가 완전히 공장을 자기 손바닥 안에서 주무르려고 하네.”


“그만 둘 때 그만두더라도 꼴 보기 싫은 사람이랑은 같이 일 못하는 거 아닌가요? 형도 그렇잖아요.”


“그래그래, 알겠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떻게 하려고 그래?”    

 

12

“상우야, 저기 선반 위에 상자 좀 내려다 줄래. 엄마는 키가 닿지 않는구나.”


나는 엄마가 가리키는 선반 위를 쳐다보았다. 선반 위에는 작은 상자가 올려져 있다.


“이거 말이죠?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올려놓으셨어요?”


“그러게 말이다.”


내가 팔을 들어 선반 위의 상자를 내려놓는 동안 엄마는 내 등 뒤에서 한참이나 나를 관찰하듯 쳐다보았다.

“그런데 우리 아들, 요즘 몰라보게 키가 커졌네.”


“네? 그런가?”


“응, 그렇대도. 어릴 때만 해도 덩치가 너무 작아서 나중에 어떡하나 걱정했었는데 지금 보니 괜한 걱정이었구나. 우리 아들이 이렇게 건장한 청년이 될 줄이야.”


엄마는 내 등을 어루만지며 흐뭇하게 웃었다. 정말이다. 지난 몇 달새 내 키는 하루가 멀다 하고 부쩍 자랐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엄마가 가리키는 선반 위를 올려다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쯤이야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부엌 찬장, 창고는 물론이고 집안 구석구석 내 키가 닿지 않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와 엄마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할머니도 질 세라 말을 거드셨다.


“정말, 우리 상우가 이렇게나 듬직해졌구나. 장군이네, 장군이야.”


키가 커진 것이 뭐가 그리 대수라고. 나는 괜히 머쓱해졌다. 그러나 학교생활을 하면서 그게 대수롭지 않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체육시간에도, 방과 후 운동을 할 때도 나를 찾는 친구들이 부쩍 많아졌다. 특히 농구시합을 할 때면 나의 이름을 부르는 친구들의 외침이 성화를 이루었다. 나는 어느새 우리 반의 에이스가 되어 있었다. 체육대회를 겸해 열린 반 대항 농구시합은 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 주었다.


“상우야, 여기야 여기.”


종수와 눈이 맞은 나는 수비수를 따돌리고는 상대편 등 뒤로 돌아 나왔다. 종수의 패스는 오늘도 어김이 없다. 아무렴. 두말하면 잔소리지. 방과 후에 둘이서 함께 농구를 하며 호흡을 맞춘 지가 벌써 몇 년째인데. 종수에게서 넘겨 받은 농구공은 내 손을 떠나자마자 우아한 포물선을 그렸다. 내 머릿속에 잊지 못할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포물선은 게임의 위닝샷으로 이어졌다. 친구들 모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 이름을 연호했다. 그들 한가운데에 소희가 있었다. 소희는 손뼉을 치며 환하게 웃었다. 하이틴 영화에서나 보던 멋진 남자 주인공이 다름 아닌 오늘의 나였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 그렇게 평생 잊지 못할 선물이 되어준 그해 겨울이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 날이 오기 전까지 말이다.


“상우, 요즘 얼굴이 참 밝아 보여서 좋구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니?”


담임선생님의 부름에 교무실을 찾은 나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요즘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런가? 몸이 건강해지니까 마음도 편안해지나 봐요.”


내 대답이 못마땅했던 걸까. 선생님은 한참이나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시고는 이내 웃으며 말씀하셨다.


“이것 봐. 대답도 예전이랑 확실히 바뀌었잖아. 참 능글맞아졌는걸. 아니, 좋아졌다는 뜻이야. 몇 개월 전만 해도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얼버무리기 일쑤였는데 무엇이 상우를 이렇게 밝아지게 만들었을까?”

“제가 그랬나요?”


나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선생님, 왜 저를 부르셨어요?”


“아이고, 이거 내 정신 좀 봐라. 상우를 불러 놓고는 괜한 얘기로 시간만 뺏었구나. 그래, 내가 오늘 부른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상우야, 과학경시대회에 참가해 보겠니?”


“과학경시대회요?”


“그래. 군에서 주최하는 대회야. 원래는 우리 학교에서 5명이 참가하기로 했었는데 미선이가 전학을 가고 몇 명이 빠지게 되어서 말이야.”


“그런데 왜 제가요? 저는 성적이 좋지도 않은데.”


선생님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씩 웃으셨다.


“그래, 전체 성적으로만 따지면야 상우가 참가하기는 힘들겠지. 그런데 다른 과목이 아니라 과학이잖아. 그중에서도 이번 시험 주요 내용은 지구과학이거든. 그 과목만큼은 우리 상우가 최고인 걸로 아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선생님 말씀이 맞았다. 지구과학은 평소에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막연하게 과학자가 되고픈 꿈을 꾸었다. 아무래도 아버지와 함께 한 어린 시절 밤밤언덕의 밤하늘 풍경이 머릿속에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천체에 특히 많은 관심을 가졌다. 지금도 도서관에 갈 때면 과학잡지를 많이 들춰 본다. 학교에서는 수업 시간에 가르쳐 주는 내용을 맹목적으로 배우는 것이 전부이지만 언젠가는 독자적으로라도 심층적인 공부를 하겠노라 다짐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그 생각이 조금 덜했었는데 소희를 만난 후부터는 나도 무언가 멋진 사람이 되고픈 욕망이 생겨 어린 시절 가졌던 꿈을 곱씹어 보게 되었다. 순간, 지난 주에 소희가 경시대회에 참가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소희야, 나도 같이 참가하게 되었어. 기뻐하는 소희의 얼굴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어느새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어때? 내일까지 생각을 해보겠니? 여기 참가서에 서명을 해서 내일 오전까지 나한테 전달해 주면 된단다.”


“네, 알겠어요. 선생님.”


최근 들어 나는 이래저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신체적 변화가 한 몫 하긴 했지만 그보다 소희를 만나고 난 후부터 적잖은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내 뜻대로 다 이뤄질 것만 같았다. 공부도 운동도, 그리고 연애도. 그렇게 학교생활이 긍정적으로 변한 것과는 달리 유독 아버지와의 관계만큼은 여전히 진전이 없었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신지 벌써 4개월이 다 되었지만 나는 아버지와 단 한 번도 속에 있는 이야기를 터놓고 말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종종 내가 학교에서 늦게 오는 날이며 집 밖으로 나를 마중하러 나오셨다. 그런데 며칠 전 그 날은 왜인지 모르게 아버지가 학교 근처에까지 나를 마중 나와 계셨다. 아니, 나를 일부러 마중하러 오신 건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나는 아버지를 보고도 못 본체 지나치고 말았다. 옆에 소희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희에게 아버지를 만나게 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아버지와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아버지가 범죄자라 할지라도 결코 아버지를 외면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지나치는 내 등 뒤에서 한참이나 그 자리에 홀로 서 계셨다. 며칠 동안이나 그 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래서 오늘은 어떻게든 아버지와 눈을 맞추고 인사를 나눠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버지가 철야작업을 마치고 돌아오시는 날, 아버지가 으레 나를 마중 나오신 것처럼 오늘은 내가 아버지를 기다렸다. 지난 2주간 아버지는 야간근로를 하시느라 식사시간에도 얼굴을 마주할 새가 없었다. 아버지는 터벅터벅 힘든 모습으로 집으로 걸어오셨다. 나는 아버지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집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는 깜짝 놀란 듯 주춤하셨으나, 이내 밝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상우야, 지금 학교 가는 거니? 오늘은 많이 늦었구나.”


“네, 아버지. 수고하셨어요. 학교 다녀 오겠습니다.”


수고하셨다는 말이, 학교에 다녀오겠다는 아침 인사가 그렇게나 좋으셨을까. 아버지는 엄마에게 몇 번이고 그 얘기를 꺼내며 자랑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딱 그만큼이 내가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던 만큼 아버지의 삶에도 적잖은 변화가 있었던 듯 하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 빠져들어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잊어가고 있었다. 바빠진 일상에 녹아들어 어느새 아버지에 대한 좋고 싫은 감정을 지워가고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늘 그랬듯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인 것처럼.      


학교 안에서 소희와 단둘이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좁은 교실 안에서는 반 친구들의 시선이 머무르지 않는 곳이 어디에도 없었기에 더더욱 그러 했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소희와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모색했다. 그게 더 좋았는지도 모른다. 남의 눈을 피해 우리 사이를 속여야 한다는 사실이 스릴 있었다. 어느새 우리는 우리의 연애 방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체육시간이 제일 좋았다. 체육수업 중간중간 우리는 서로의 시선을 의식한 채 눈을 맞출 수가 있었다. 남들의 의심을 받을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다른 친구들과도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시선을 교환해야 했기 때문이다. 체육수업을 마친 후 주어지는 의외의 선물은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노력 끝에 결실을 맺었다. 수업을 마치고 뒷정리를 하던 중 나는 가까스로 소희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을 만들었다. 나는 조심스레 소희의 손을 잡고는 남들이 보지 않는 구석으로 향했다. 소희는 당황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그래? 상우야. 사람들이 보잖아.”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라도 한번 그녀를 안아보고 싶었다.


“아냐, 다들 일찍 들어 갔다니까. 지금 여기에는 우리밖에 없어.”


“그래도.”


그 때 저 멀리서 누군가의 인기척을 들렸다. 체육 선생님이 천천히 다가오고 계셨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비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다들 벌써 들어가 버렸구나. 미안한데 상우랑 소희가 여기 뒷정리 좀 해줄 수 있을까?”

뒷정리를 해 달라는 선생님의 부름이 이렇게나 반가울 줄이야. 나와 소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네!’라고 힘차게 대답했다.


“역시 모범생들은 다르구나. 그럼 부탁할게.”


소희와 함께 있으면 나도 모범생이 되어 버린다.


나는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소희에게 농구를 가르쳐 주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농구공을 던지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평생 동안 농구공은 물론이고 공이란 공은 제대로 잡아 본 적이 없는 그녀이기에 골대를 향해 농구공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이었다.


“공이 정말 무거워. 진짜 난 언제쯤 골대 안에 공을 넣을 수 있을까?”


시무룩한 표정으로 투덜대던 그녀였는데 나와 함께 운동을 시작한 이래로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상우야, 나 이제 잘 하지? 네 말처럼 처음보다 엄청 좋아진 것 같아.”


“맞아, 내가 계속 말했잖아. 소희는 진짜 운동에 소질이 있다니까. 내가 잠재된 천재성을 깨우고 있는 건지도 몰라.”


“피~ 거짓말.”


쉬는 시간이 조그만 더 길었다면 참 좋을 텐데. 우리는 흐르는 시간을 아쉬워하며 어서 주말이 오기를 고대했다.


“참, 소희야. 이번 주에는 운동이 아니라 공부를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 좀 있으면 과학경시대회잖아.”


“응, 그렇긴 한데. 나 때문에 상우가 또 도서관에서 주말을 보내야 하는 게 미안해서.”


“괜찮아. 나도 경시대회에 참가하기로 했거든. 잘 됐지?”


나는 환하게 웃으며 소희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소희의 반응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상우 너도? 그거 우리 학교에서 5명만 참가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응, 그랬는데. 선생님이 나를 추천하셨나 봐. 우리 같이 공부하면 좋겠다. 그치?”


“아, 그랬구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 아니. 잘 됐다. 상우야.”


소희는 웃으며 말했지만 그동안 내가 항상 보아 온 해맑은 웃음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그럴까? 분명 같이 대회에 참가하는 것을 그 누구보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 날 이후 난 계속해서 소희의 눈치를 살폈다. 왠지 개운하지가 않았다. 소희는 왜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 평소 같았으면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좋아해 줬을 텐데 그날만큼은 예외였다. 마치 싫은 것을 억지로 좋아하는 듯한 인상이랄까. 주말에 함께 공부를 하자는 나의 제안에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희는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 번씩 소희의 얼굴을 보면서 책을 읽는 것이 참 좋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한 번쯤 내 얼굴도 쳐다봐 주면 좋으련만.     


기다림은 여전히 나의 몫이다. 오늘도 소희를 기다린다. 아직 약속시간은 10분이나 남았지만 나는 기다림에 어느덧 익숙해져 버렸다. 설렘이란 감정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소희 집의 대문이 약속시간보다 훨씬 일찍 열렸다. ‘덜컹’하는 대문 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혹시나 소희의 부모님이 나오시는 게 아닐까? 나는 순간적으로 어깨를 움츠렸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대문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소희의 환한 얼굴이었다.


“진짜, 이럴 줄 알았다니까. 상우, 너 오늘도 먼저 나와 있었구나. 이래서 약속 장소에서 만나자고 한 건데.”


“아냐, 나도 좀 전에 왔어. 우리 집에서 가는 길인데 같이 가는 게 좋잖아. 근데 소희야,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천천히 나와도 되는데.”


나는 시계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소희의 옷차림은 편한 트레이닝복이었다. 아직 집을 나설 준비가 되지 않은 모양이다. 소희는 내 팔을 잡아 끌어 집안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어? 소희야. 왜 그래?”


“걱정 마. 우리 부모님 아까 외출하셨어. 저녁식사까지 하고 늦게 오신 댔으니까 집안에 우리밖에 없어. 내가 맛있는 거 해 줄게. 어서 들어 와.”


“정말?”


소희의 집은 내가 상상하던 이상으로 크고 예뻤다. 밖에서 볼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연출하고 있었다. 나는 집안 곳곳을 감탄하며 돌아다녔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갖가지 물건들이 위용을 뽐냈다. 예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물건들이다. 나는 거실에 걸려 있는 커다란 액자 속의 가족사진을 쳐다보았다. 소희네 가족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소희까지 세 명이 전부이다. 사진 속의 가족들은 하나같이 밝게 웃고 있었다. 웃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전부 소희의 얼굴과 닮아 보였다. 가족이란 닮는다는 말이 정말이구나. 우리 가족도 그럴까? 소희의 아버지는 언뜻 보기에도 한없이 인자해 보였다. 그리고 무언가 위엄이 있어 보였다. 지난번에 잠시 스쳐 뵌 게 전부였지만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딸아이를 애지중지하는 전형적인 한국인 아버지의 모습이랄까. 게다가 소희는 외동딸이었으니 하나뿐인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오죽하겠는가.


“상우야, 어서 올라와 내 방은 2층에 있어.”


나는 소희의 안내를 받아 2층으로 향했다. 소희의 방을 보자마자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소희의 방은 반 전체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인형의 집에 온 것 같은 기분이다. 소희는 부끄러운 듯 침대에 걸터 앉아 이것저것 본인의 물건들을 소개해 주었다. 소희의 꼼꼼한 심성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소희는 작은 것 하나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나와 함께 했던 여러 가지 기억들을 보물 간직하듯 박스 한켠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의 가슴속에서 또 한 번 뭉클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그동안 혼자서 별별 상상 속에 갇혀 있었던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상우야. 배고프지?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내가 맛있는 거 만들어 줄게.”


“나도 같이 가.”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소희의 뒤를 따라나섰다.


“아냐, 상우는 여기 앉아 있어. 우리 집에 처음으로 찾아온 손님이잖아. 오늘은 내가 다 만들어 줄게.”


소희는 웃으며 나를 뒤로 하고 방을 나섰다. 나는 소희의 방에 홀로 남아 다시 방안을 둘러보았다. 소희의 일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나는 소희의 손길이 닿은 일상의 흔적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기 위해 노력했다. 보면 볼수록 이 공간 안에 빠져든다. 침대에 앉으면 창밖의 풍경을 훤하게 쳐다볼 수 있었다. 가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며 한 번쯤 나도 이런 곳에서 잠이 들고 싶다고 느꼈던 바로 그 곳이다. 나는 살포시 소희의 침대에 누워 창밖을 쳐다보았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 사이로 산과 하늘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겨울이 아닌 봄이나 여름이었다면 마주할 풍경의 위용이 가히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 때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작고 예쁜 노트 한 권이 내 눈에 들어왔다. 잠겨 있지는 않았지만 자물쇠가 걸려 있는 걸로 보아 일기장인 듯했다. 일기를 쓰는구나. 역시 소희답다. 그 때 핸드폰에서 소희가 보낸 메세지가 울렸다.


‘상우야, 미안해. 내가 좀 망쳐 버려서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내가 부를 때까지 절대 부엌으로 내려오면 안 돼. 알겠지?“


나는 웃으며 답장을 작성했다.


‘응, 알겠어. 걱정하지 마.’


더 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그녀가 나를 위해 어떤 요리를 준비하고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은 참 오래도 걸렸다. 한 번 더 소희의 방을 둘러보며 서성이는 사이 내 눈은 어느덧 소희의 일기장으로 향해 있었다.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소희의 일기장을 손에 집어 들고 말았다. 잠시만 볼까? 그래선 안 되는데. 마음속의 갈등이 커져만 갔다. 에이, 뭐 어때? 나는 소희의 일기장을 몇 장 들춰보기 시작했다. 내 예상대로 소희는 참 글을 잘 썼다. 한두 장 넘기며 일기를 읽다 보니 소희의 생각에 금세 동화되고 말았다. 소희의 집에 들어온 이래로 소희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있었다. 그때 아래층에서 소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우야, 다 됐어. 이제 내려오면 돼.”


“응, 알겠어.”


나는 황급히 보고 있던 소희의 일기장을 덮었다. 순간 넘어가는 일기장의 페이지 속에서 나는 나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응? 내 이름이? 나는 호기심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그러고는 다시 침대에 걸터 앉아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 보았다.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소희가 좀 더 일찍 나를 불렀다면 좋았을 것을.. 마지막 장에 적힌 일기의 내용은 소희의 솔직한 심경을 말하고 있었다. 바로 나의 아버지에 대해서..

이전 07화 밤밤언덕(7)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