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부인과 의사도 경악한 거대근종의 크기
병원에 가는 길, 눈이 내린다. 지인에게 추천받은 병원은 집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에 있다. 여전히 운전이 서툰 나는 이른 새벽 눈 소식에 눈을 핑계 삼아 진료를 다음 주로 미룰까 고민하고 있었다. 무섭게 쏟아지던 하혈이 조금 잠잠해지자, 그새 병원에 안 갈 핑계를 또 찾는 모양이다. 그걸 알았는지,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병원까지 태워줄 테니 언니 집으로 차를 몰고 오라는 것이다. “눈도 오고 해서 다음 주에 갈까 봐...”, “아직 길에 쌓이지도 않았는데, 뭔 소리야. 당장 와!” 최대한 병원 방문을 미뤄보려 했지만 소용없게 됐다. 하는 수 없이 옷을 챙겨입고 언니 집으로 향한다.
언니랑 병원으로 가는 길, 창밖에 내리는 눈을 보며 생각한다. ‘혼자서도 잘 산다는 것은 뭘까?’ 최근 아빠가 돌아가시고, 한없이 약해진 엄마를 보며 언니에게 푸념한 적이 있었다. 엄마가 이제 그만 툭툭 털고, 혼자서도 야무지고 즐겁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러자 언니가 대뜸 ‘그러는 너는 혼자서 잘 사냐?’라고 반문했다. 나는 나 나름 혼자서 잘 산다고 생각했는데, 언니가 보기에는 그러지 않았나 보다. 나도 모르게 많은 부분을 언니네 집에, 그리고 조카들에 의지를 해 왔던 걸까? 그래서 하혈하면서도, 병원도 누군가를 대동하지 않고 씩씩하게 혼자서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또 언니랑 가고 있다. 만약 수술하게 된다면, 보호자가 있어야 하고 간병인도 필요하다. 그러면 또 언니의 도움을 받게 될 거였다. 나도 혼자서 잘 살지 못하고 있구나. 혼자 사는 사람이 주변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건강부터 제대로 챙겨야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병원에 들어서니 다시 긴장되기 시작한다. 일단 접수하고 기다리자 간호사가 먼저 상담실로 부른다. 어떤 연유로 왔는지 묻는 간호사에게 최근 하혈을 심하게 한 것부터 이야기하고, 원래 자궁근종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게 커져서 이렇게 된 게 아닌가 싶다며, 만삭의 배를 간호사도 볼 수 있게 일부러 어루만지며 상담을 이어갔다. 상담할수록 간호사가 경악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병원에 안 왔다고요?’ 안경 너머의 눈빛이 매섭다. 나를 한심하고 무식한 여자로 보는 게 틀림없다. ‘그냥 살이 계속 찌는 줄 알았어요. ’어림도 없는 변명을 하며,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떨군다. 죄인 맞다. 나 자신에게 진짜 몹쓸 죄를 지었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일을 이렇게 부풀려, 가래로도 못 막게 만들어 놨으니... 상담실을 나오자 또 기다림의 시간이 이어졌다. 그래도 언니가 옆에 있으니 제법 안심이 된다. 한참을 기다리자 이번에는 원장실로 부른다. 간단한 상담 내용을 확인하고 초음파실로 들어간다. 초음파로 보지 않아도 내 배는 심각하게 부풀어있다. 배 여기저기를 살펴보던, 의사 선생님 표정도 곧 심각해진다. 두려움에 선생님의 눈만 보고 있던 나는 그래도 중병은 아니기를... 자궁암, 난소암만은 아니라고 말해주기를 속으로 빌고 또 빈다.
“근종이 여기까지 가득 차 있어요. 어떻게 이렇게 커질 때까지...” 의사가 말을 잇지 못한다. “이 정도면 일상생활이 어려웠을 텐데요... 장기들이 거대 근종에 눌려서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는 상태예요. 심장도 안 좋을 거고요.” 상황은 예상대로 안 좋았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암은 아닌 모양이라고 안심하고 있었다. 사실, 속으로 암이 아닐까, 그것도 몇 달 남지 않은 말기가 아닐지 걱정에 걱정하며 왔던 탓에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최대한 빨리 수술하는 게 좋겠어요. 한 달 안에 수술해야 할 것 같아요.” 결국 수술뿐이구나. “이 상태면 복강경으로는 어림도 없고, 개복수술을 해야 할 것 같고, 자궁도 적출해야 합니다.” 청천벽력 같은 말이 떨어진다. 세상에... 개복 수술도 무서운데... 자궁적출이라니... 물론 병원에 오기까지 수많은 자궁근종 후기를 보며, 근종이 엄청나게 커진 상태면 자궁 적출이 불가피하다는 후기를 봤었다. 그래도... 제발... 나는 적출만은 아니기를... 바랐는데...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구나. 암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상황도 몹시 좋지 않다. 울컥 눈물이 솟구치지만, 몇 번이고 다짐했던 대로 의사 앞에서 울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문다.
빈혈 수치도 지금 당장 길에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수치란다. 일단 수술 전에 빈혈 수치부터 올려야 하니, 오늘 바로 철분주사를 맞고 가란다. 그리고 당장 월요일에 대학병원에 전화를 돌려 가장 빠르게 수술을 잡을 수 있는 병원에서 수술을 잡으라고 한다. 바로 주사실에 가서 철분주사를 맞고 있으니, 언니가 들어왔다. 나의 처참한 몸 상태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브리핑하듯 짧게 공유한다. 말하는 순간 몇 번인가 울컥했지만, 충분히 예상했었고, 암은 아니라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어서 울지는 않았다.
철분제를 맞고, 병원을 나섰다. 남동생에게 전화가 온다. 올케가 어제 둘째를 낳아서 온 가족이 병원에 가서 둘째를 보고 왔었다. 좋은 소식을 앞둔 동생네 식구에게는 오늘 산부인과 진료를 하러 간다는 말을 안 한 터였다. 동생은 엄마에게 오늘에서야 소식을 전해 듣고 전화를 한 모양이다. 의사에게 들은 말을 동생에게도 브리핑했다. 동생의 목소리가 흐려진다. 그러기에 병원에 좀 빨리 가라고 하지 않았냐고 울먹인다. 동생이 우니 나도 눈물이 조금 났다. 그런데, 처음 병원에 갈 때 6개월 선고도 생각하고 갔기에 이 정도는 괜찮다고 말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이 와중에 배가 고프다. 언니가 근처에 아는 식당이 있으니 거기로 가자고 했다. 식당에서 밥을 한술 뜨자 속이 메슥거렸다. 아마도 철분제 때문인 듯했다. 그래도 언니와 같이 밥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니 곧 괜찮아진다.
집에 와서야 병원에서 준 진단서를 열어본다. 거기에 적힌 근종의 크기는 어떤 후기에서도 본 적이 없는 크기였다. 복강경 수술이 가능한 근종의 최대 크기가 15cm라는데, 내 뱃속의 근종은 복강경 근처에도 못 갈 법한 진짜 거대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크기였다. 그날, 올케가 꼬물거리는 둘째의 동영상을 가족 톡방에 올렸다. 10초도 안 되는 짧은 영상을 몇 번이고 다시 돌려 본다. 동생을 많이 닮은 아기가 너무 예쁘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잠시 울었다. 병원에 다녀온 후 처음이었다. 올케는 이렇게 예쁜 아기를 낳았는데, 나는 이 아기만큼이나 큰 거대 근종을 임신했고, 곧 낳아야 할 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