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록 사랑한 죄....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자질로 세 가지를 꼽았다. 친절함, 유머, 그리고 자기 억제. 이 세 가지는 본질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이는 비단 소설 속 인물뿐 아니라 소설 밖 인간에게도 꼭 필요한 덕목이다. 만약 이 세상에 작은 친절과 유머가 없다면, 삶은 한층 더 삭막하고 팍팍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균형을 더하는 것이 바로 자기 억제다. 나는 자기 억제에 취약한 인간이다. 억제하지 못하고 남용한 무언가가 내 몸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자 가장 먼저 내 생활을 뒤돌아본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내 몸을 이렇게나 망가지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자궁근종의 원인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가족력이라는 이론도 있고, 환경호르몬의 영향, 여성호르몬 과다, 잘못된 식습관, 비만, 늦은 결혼과 임신 등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하지만, 그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찬 음료와 카페인, 그리고 우유를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꼽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스 카페 라테’다.
일단 내 생활 습관을 살펴봤을 때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나와 커피의 지난한 역사는 일찍이 시작되었다. 중, 고등학교 시절. 시험 기간이면 나는 밤을 새워야 한다는 미명하에 커피믹스를 달고 살았다. 달콤하고 따뜻한 그 맛에 중독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는 커피믹스와 커피 자판기가 어디를 가나 있었고, 손만 뻗으면 쉽게 마실 수 있었다. 굳이 발품을 팔아 찾지 않아도 그야말로 사방에 널린 게 커피믹스였다. 물론 내가 다니던 도서관에도 커피 자판기가 있었고, 나는 수시로 휴게실을 들락거리며 커피를 뽑아 먹었다. 출출할 때는 에이스 과자를 찍어 먹으면 또 얼마나 든든하던지.
스무 살이 되어서는 매일 아침을 커피 우유와 함께 시작하는, 새로운 루틴이 시작됐다. 아침잠이 특히나 많았던 나는 매일 몽롱한 정신을 깨우기 위해 편의점에 들렀다. 편의점에서 500ml 용량의 진한 커피 우유를 한 팩 사서, 큰 빨대를 꽂아 쭉쭉, 시원하게 들이키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커피 우유는 대학 시절 내내 나의 졸린 아침을 깨워주는 등교 메이트였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커피는 한 층 더 내 삶 깊숙이 파고든다. 출근길에 커피 우유를 마시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고, 근무 시간 중간중간, 카누를 얼음물에 타서 물 대신 수시로 음용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후식으로 꼭 달달한 카라멜 마키아토나 바닐라라테를 아이스로 시켜서 마셨다. 오후 시간에도 회사에서 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습관처럼 옆에 뒀고, 그 중간중간에 달콤한 커피 믹스를 양념처럼 마셔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이스커피 중독은 해를 더할수록 심해졌다. 나이를 먹을수록 체력은 바닥을 쳤고, 그걸 겨우 끌어 올려주는 것이 커피였기에 의존도는 높아만 갔다. 그러나 카페인 민감성이 높았던 나는 내 몸에 첩첩이 쌓인 커피 때문에 매일 밤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고,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다. 그러니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커피 앞으로 달려갈 수밖에.... 이런 악순환의 고리는 쉽게 끊을 수 없었고, 나의 커피 의존도는 최근까지 계속되었다. 다만 달달한 커피믹스는 오전 한, 두 잔으로 제한하고 바닐라 라테 대신 시럽이 빠진 고소한 카페라테로 바꿨다는 점만 달라졌다.
프랜차이즈 커피집이 우후죽순으로 생긴 것도 내 커피 중독에 한몫했다. 좋아하는 브랜드의 카페가 집 앞 오 분 거리에 생긴 뒤로, 나는 정말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추우나 더우나 아이스 카페라테와 함께 해왔다. 커피에 대한 내 애정이 남다르다 보니, 가족이나 지인들도 나와 만날 때는 알아서 아이스 카페라테를 사 오는 지경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미 한 잔 먹은 커피를 하루에 몇 잔이고 먹은 적도 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인생에서 지치지 않는 끈기와 변함없는 애정을 가지고 주구장창 사랑한 것이 진정 커피였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게 해비 커피 드링커였던 나는 올해 커피를 끊었었다. 이 일은 나에게나 주변 지인에게나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사건이었는데, 그만큼 건강이 악화되는 것을 온몸으로 체감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궁근종이 점점 커지는 것이 느껴졌고, 아이스 커피를 쭉쭉 들이켜면 곧바로 아랫배가 묵직하게 뭉치는 것을 경험했다. 철분 부족으로 커피에 든 얼음을 우적우적 씹어먹게 된 것도 한몫했다. 나는 그렇지 않아도 부실한 이가 제대로 아작나기 전에 얼음과 커피를 내 삶에서 치워야 했다.
그러나 내가 아이스 카페라테를 끊는 것은 참새가 방앗간을 끊는 것만큼이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나는 그 시원하고 고소한 맛을 쉽사리 잊지 못했고, 사방에서 흘러나오는 커피 향을 맡을 때마다 괴로워했다. 대한민국에서 카페는 정말 5분 거리마다 하나씩 있는듯 보였고, 어디를 가나 커피 냄새가 흘러넘쳤다. 커피의 유혹은 너무 잦고 강력했고, 나는 쉽게 굴복했다. 나는 다시 주말에만 커피를 마시는 것을 허용했다가, 점차 주중 하루도 허용했고, 다시 이틀에 건너 하루 커피를 마시게 됐다. 쓸수록 이건 뭐 중증 알코올 중독자의 수기 같다.
그러던 내가 커피를 다시 멀리하게 된 것은 하혈을 시작하고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아이스 커피를 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병원 진료를 받고 근종의 심각성을 확인한 뒤에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답답한 속에 시원한 아이스 카페 라테를 한잔 떼려 넣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진짜 지독한 커피 사랑, 커피 중독이다.
최근 샤오미 밴드를 사서 건강을 체크하고 있다. 내가 하루에 몇 보를 걷는지 체크하고, 수면의 질도 살핀다. 매일 ‘나쁨’이 기본값이던 수면의 질이 커피를 끊고는 ‘보통’으로 바뀌고 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도중에 잠이 깨는 횟수도 줄었다. 앞으로도 내 삶에 커피를 오래도록, 어쩌면 평생 멀리해야 할지도 모른다. 커피는 누군가에게는 약이지만, 나에게는 독이었다. 내 안에 자궁근종에 커피의 지분이 100%는 아닐지라도 절반 이상 되는 것만은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걸 다 아는데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도 아이스 카페라테가 너무 마시고 싶다.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하루키의 말처럼 ‘자기 억제’는 인간을 진짜 인간답게 만드는 자질이다. 그게 결핍된 인간은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나는 지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그런데도 이 미련한 인간은 여전히... 떠나온 것을 내 삶에서 진짜 떠나보내야 할 것을 자꾸만 뒤돌아본다. 건강하게 잘 살고 싶지만... 커피는 마시고 싶다.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이번에야말로 최후 이별 통첩을 날려본다. 정말이지 죽도록, 원 없이 사랑했었다... 이 죽일놈의 커피야... 그동안 즐거웠고,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