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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많이 가서 손 씨인가요?

서울 산부인과 방문기2

by 손여름 Jan 01. 2025

초음파 검사를 마치고 다시 돌아온 진료실, 의사 선생님의 표정만 봐도 결과를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절실해진 나는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으로 가지런히 세우고는 다짜고짜 신앙고백을 쏟아낸다. 거대 자궁 근종 수술을 개복이 아니라 복강경으로 성공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서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호소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의사 선생님이 어렵게 입을 연다. 모든 거대 근종을 복강경으로 수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 기사에도 쓰여 있을 거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영 틀린 것인가.... 나에게는 더 이상 희망은 시간 낭비일 뿐인가? 결국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인제그만 현실을 받아들이고, 최대한 빨리 차가운 수술대에 올라 배를 가르고 자궁을 들어내는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남들은 개복수술이 복강경이 되고, 있던 근종도 자연적으로 사라지는 기적이 일어나는 마당에 나에게 일어난 기적이라고는 고작 남들이 쉽게 가질 수 없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근종을 가진 것뿐인가? 진짜 이럴 수는 없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지금 내게는 절실했다. “어려운가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본다.      

“일단 근종이 너무 커서 초음파로는 자궁 상태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유착 정도를 보기 위해서는 MRI 촬영을 해야 합니다.” 당일 촬영은 어려워서 다시 예약을 잡아 주겠다는 말을 뒤로 진료실을 나온다. 자궁 적출 여부와 복강경 수술의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는 차마 묻지도 못했다. 선생님의 좁혀진 미간만큼이나 처참한 답변이 돌아올 것만 같아 무서웠다. 서둘러 진료실을 빠져나온 뒤, 다시 상담실로 이동해 다음 진료 일정을 예약한다.      


대기실 복도로 나오니 나보다 더 심각한 표정의 언니가 결과를 물어온다. 일단 다음 달에 다시 와서 MRI 촬영을 해야 그 결과를 보고 최종 결정이 날 것 같다고 말한다. 희망을 품고 여기까지 고생해서 왔는데, 기대했던 결과가 아니라서 우리 둘 다 조금 좌절했다. 극심한 피로가 몰려온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만 싶다.      


돌아가는 기차 시간이 언제냐고 묻는 언니에게 예매한 기차표 화면을 내민다. 표의 숫자는 20시 34분. 숫자에 약한 나는 실망한 결과에 한층 혼미해진 정신으로 이거 8시 맞지? 하고 묻는다. 나와 달리 언제나 계산이 빠른 언니는 12 더하기 8! 이라고 복잡한 소리를 하더니... 6시! 라고, 짜증스럽게 말한다. 뭔가 이상한 것 같지만, 더는 생각할 여력이 없다. 나는 혼자 ‘20시가 6시였던가?’하는 생각을 잠시 하지만, 숫자에 관한 일이라면 언니가 맞을 것이라며 곧 의심을 지운다.       


다시 택시를 타고 용산역에 도착한 우리는 이번에는 베트남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었다. 둘 다 밥 생각은 별로 없었는데, 막상 음식이 나오니 또 들어는 간다. 곧 기차 시간이 다가와 서둘러 탑승구로 향했다. 그런데 몇 번 승차 홈에서 기차를 타야 하는지는 출발 시간 15분 전에 뜬다는데, 아무리 새로고침을 해봐도 뜨지 않는다. 탑승 시간 12분 전, 그때까지도 전광판에도 우리가 탈 기차 번호가 뜨지 않자 다급해진 나는 스마트 승차권을 들고 곧바로 매표소로 뛰어갔다. 


남자 직원에게 핸드폰 화면을 들이밀며, 승차 홈 번호가 안 뜬다고 말했다. 재차 화면을 두드리면서, 감감무소식인 승차 홈을 확인시키듯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게 탑승 15분 전에 승차홈이 나온다는 문구만 뜨고, 아직 안 나와요. 전광판에도 안 떠요.” 다급한 나와 달리 직원은 담담하기만 하다. “탐승 구는 출발 시간 15분 전에 뜹니다.” 아... 답답하다. 그걸 누가 모르나? 지금이 기차 출발 시간 12분 전이라고 이 양반아! 나는 내적 비명을 간신히 삼키고는, 문화인답게 다시 한번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한다. “그러니까요. 그런데 이게 아직도 안 뜬다니깐요.”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탑승 2시간 전이니까요.” “네?” 투명한 유리 창구 너머로 싸늘한 눈빛이 느껴진다. 영원 같은 잠깐의 정적, 그리고 이어지는 현실 자각 타임.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나는 핸드폰을 챙겨 도망치듯 창구를 빠져나온다.      


“이거... 6시가 아니라 8시잖아.... 언니가 6시라며! 내가 방금 저기서 얼마나 망신을 당한 줄 알아?” 괜히 언니에게 화풀이해 보지만 언니는 언제나처럼 태평하기만 하다. “그래? 그럼 두 시간 더 구경하다 가면 되겠네.” 그러나 나는 이 기차역에서 2시간을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피곤하기도 했고, 아기도 보고 싶었다. 남동생이 돌아가는 기차표가 저녁 6시라는 것을 듣고는 기차역으로 마중 나오겠다고 했던 참이었다. 올케가 낳은 아기를 병원에서 보고 지금까지 못 보고 있었는데, 오늘 집에 들러서 보고 가라는 것이었다. 언니는 신정에 온 식구가 동생네로 가서 아기를 보기로 했는데, 오늘 꼭 무리해서 갈 필요가 있냐고 한다. 그러나 나는 동생을 많이 닮은, 게다나 나도 조금 닮은 아기를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 나는 다시 창구를 향해 달린다.     

 

조금 전에 들렀던(?) 남자 직원의 앞이 비어 있었지만, 일부러 그 옆에 있는 여자 직원에게로 향한다. “지금 A, B, C로 가는 기차표 중에 제일 빠른 걸로 두 장만 주세요.” 여자 직원의 표정이 좋지 않다. 이번에는 또 뭐가 잘못된 것일까? “고객님, 어디 가는 기차표가 필요하신가요? 정확히 말씀해 주세요.” 당황한 나는 세 개의 선택지를 다시 두 개로 좁혀, A나 B로 가는 기차 중에 아무거나 빠른 걸로 달라고 다시 한번 말한다. 직원의 표정이 한 층 더 싸늘해진다. 나는 더듬거리며 내 동생이 그중에 어디로든 데리러 온다고 했다고,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말을 쓸데없이 덧붙이고야 만다. “고.객.님. 목적지를 정.확.히! 말씀해 주세요. 지금 정.확.히! 어디를 가야 하시는 거예요?” 그제야 정.확.히 내 실수가 무엇인지 깨달은 나는 조그맣게 목적지를 말한다.  

    

마음이 앞선 탓에 일어난 일이었다. 순간 나의 부족한(?) 점을 옆에서 살뜰히 챙겨주던 전 직장 동료의 면박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이거 참, 답답하네! 선생님은 참~ 손이 많이 가! 손이 많이 가서 손 씨인가?” 어린 시절, 성이 손 씨라는 이유만으로 황당한 별명이 참 많이도 붙었었다. ‘손오공’, ‘손바닥’, ‘손가락’, ‘손수건’ 등등. 그 중, 손이 많이 가서 손 씨냐는 말은 손 씨 성이라서 들은 말 중에 가장 황당한 말이었다. 그러나 종종 대면하는 이런 상황이면 가슴에 손을 얹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맞다. 나는 다급한 상황일수록 쉽게 당황하고, 멘붕이 오면 한 층 더 버퍼링이 걸리는, 손이 참 많이 가는 사람이다.      


성이 손 씨라서 손이 참 많이 가는 나는 그렇게 어렵사리 구한 기차표 두 장을 들고 언니에게로 향한다. 민망함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여유가 없다. 기차 시간이 당장 코앞이었다. “언니, 뛰어!” 손에 기차표를 들고 전속력으로 질주한 우리는 겨우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한숨을 돌리고 나서야 매표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주저리주저리 털어놓는다. 기차 시간을 착각한 것부터 목적지를 두서없이 말해서 면박을 당한 것까지... 당시에는 민망하기만 했는데, 이야기로 풀고 보니 조금 웃기다. 그러는 사이, 병원에서의 결과로 무거웠던 기분도 제법 가벼워졌다. 급하게 구한 좌석은 역방향. 밤의 거리를 뒤로 달리는 기차를 타고, 걱정은 잠시 뒤로 미뤄둔 채로 나는 조카를 만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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