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킬 수 없는 운명<오버랩 나이프 나이프>_조예은

그럼에도 끝까지 달려가야 하는 인간의 숙명

by 손여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절대 두 번은 안 보는 영화 목록이 있다.

첫째, ‘타이타닉’이다. 주인공들의 서사보다 배가 침몰할 때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심정을 지켜보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못 본다. 두 번째로 ‘곡성’이다. 영화관에서 처음 ‘곡성’을 봤을 때의 충격을 희석하고 싶지 않아서 아끼는 마음으로 안 본다. 마지막이 ‘나비효과’다.

앞의 두 영화와 달리 ‘나비효과’는 내 인생 최악의 영화라 재관람 금지 목록에 들어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 집에서 봤는데, 정말이지 안 본 눈을 사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영화였다.

다양한 결말 버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는데, 내가 본 버전은 주인공이 몇 차례의 타임리프 끝에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태아기로 돌아가 스스로 탯줄을 목에 감고 죽는 버전이었다.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운명을 절대 거스를 수 없다는 것과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게 돼 있다는 절망적인 운명론이 깊은 무력감을 불러일으켰다.

소재에 있어서 아동포르노를 취한 것이 무엇보다 끔찍했다. 자세한 내용은 스포가 될 수 있어서 생략하겠으나, 이 글을 읽고 혹시나 ‘나비효과’가 궁금해서 보려는사람은 없었으면 좋겠다. 호기심이 트라우마로 남을 수있음을 경고한다.

주인공이 몇 차례나 타임리프를 해서라도 인생을 바꾸고 싶을 정도의 절박한 서사를 부여하기 위한 것은 알겠으나, 이건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오직 자극을 위한 설정으로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가 최악의 영화가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결말이 가장 최악이었다. 결국 세상에는 처음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 그게 모두를 위해 가장 좋은 운명이라는 것이 결론이라니......

타임리프라는 흥미로운 소재에 자극적인 서사와 허무주의적인 결말로 그야말로 충격의 트리오였던 ‘나비효과’는 그 강렬함으로 인해 웹툰, 개그 프로그램 등 다양한 장르에서 꾸준히 콘텐츠로 차용되는 영화다.

여전히 콘텐츠 산업에 회자 될 만큼 강렬하고 영향력이있는 영화라는 말이겠으나, 영화의 결말에서 결국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이 있다고 보여주는 것처럼, 나는 이 영화가 처음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나비효과’를 보고 ‘이야기’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됐다. 이야기가 새로움과 충격, 원초적인 자극과 호기심을 위한 오락으로만 존재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모든 이야기가 교훈을 지닐 필요는 없지만, 단순히 작가의 배설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조예은 단편집 <칵테일, 러브, 좀비>에 실린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를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영화 ‘나비효과’였다.


‘타임리프’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과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과거로 몇 차례 돌아간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해진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결말이 ‘나비효과’를 연상케 했다.

이것은 흔하고 흔한 이야기이다. 영화에서, 책에서, 드라마에서, 뉴스에서, 중후한 목소리의 연예인이 진행하는 사회 고발 프로그램에서, 범죄 다큐멘터리에서, 우리 일상의 곳곳에서,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접했을 진부하지만 자극적이고, 안쓰럽지만 불편한 그런 이야기.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였다.

소설은 아들의 시점으로 시작된다.


평소 자신을 외면하던 어머니가 오랜만에 아들에게 말을 건다. 초밥이 먹고 싶다고. 아들은 기쁜 마음에 재빨리 뛰어가 초밥을 사 온다. 한 손에 초밥을 들고 집에 돌아온 아들이 마주한 광경은 아버지가 칼로 어머니를 찔러 죽인 살해 현장이었다. 소설은 그렇게 시작된다.

아들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머니를 다시 살리고 싶다. 그때, 어떤 목소리가 말을 걸어온다. 시간을 되돌려 주겠노라고. 딱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지고, 아들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이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일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생각지 못한 변수들이 끼어들어 결국 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아들은 각자 다른 시간대로 돌아가지만, 매번 실패를 반복할 뿐이다.


절실함이 커질수록 비극은 고조된다.

결말은 ‘나비효과’와 같다.


어머니를 지극히 사랑한 아들이 모든 것을 걸어 비극적인 운명을 바꾸려 하지만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

“어떻게 되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말했다. 맞는 말이다. 결국, 벌어질 일은 벌어지는 법이다.

아들은 의문 속에 죽음을 맞이한다.

나의 이야기는 끝났다. 나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내가 쥐었단 칼날이 내 목을 꿰뚫었기 때문에, 그 차가운 쇠에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아들은 그제야 자신이 받은 세 번의 기회가, 진짜 기회가 아닌, 그저 악마의 장난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이게, 어떻게... 시간을 되돌려 준다며 깔깔깔 웃던 목소리의 주인은 신이 아니라 악마였다.

아들이 죽고, 어머니의 시점으로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거기에는 희망이 있을까? 아니다. 서로의 계획을 알지 못하고, 각자의 입장에서 노력할수록 모자의 운명은 비틀어질 뿐이다.

이 단편소설은 조예은 작가의 데뷔작으로 '황금가지 타임리프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은 작품이다.

데뷔작으로 이렇게 강렬한 작품을 써내다니 작가의 이야기를 직조하는 솜씨가 대단하다.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체에 빠른 호흡의 스토리 덕에 정신없이 책에 빠져들어 읽었다. 결말이 충격적인 만큼 후유증이 오래갔다.


그래서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뭐였을까?

‘나비효과’의 모자 버전이라 조금 더 숭고하다는 점?


결국 일어날 일은 인간이 안간힘을 써도 막을 수 없고, 운명을 기필코 정해진 길로 들어서고야 만다는 것?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가 매력적인 스토리라는 것을 증명하듯 2023년에는 단편 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영됐다.


드라마 내용을 찾아보니 소설과 달리 결말이 각색됐다.

내가 소설을 읽고 들었던 의문을 각색자도 품었던 모양이다. 일말의 여지도 없이 무지막지하게 끝나버리는 소설과는 달리 드라마에는 어떤 여지를 남겨둔다.


소설이 주로 아들이 엄마를 구하기 위해서 달려가고, 엄마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구하기 위해서 달려가는 일방통행의 구조를 취한다면, 드라마는 모자가 쌍방을 바라보는 방식을 택했다.

어쩌면 식상할 수 있는 아들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뛰어넘는 모정으로 소설과 달리 조금 더 애틋하고 여운을 남기며 끝난다.


드라마를 보고 울었다는 후기가 있었다.


각색 본도 나쁘지 않았지만, ‘나비효과’의 반감과 달리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의 원작 결말은 내게 조금 다른 뜻으로 다가왔다.


내가 이미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경험을 한 뒤여서 그랬을 거다.

누군가의 죽음을 통한 상실을 경험한 후, 나는 오랫동안 죄책감과 후회에 시달렸다.

그때 그러지 말았다면, 조금 더 따듯하게 말할걸, 조금 더 옆에서 잘 챙길걸, 마지막에 그 손을 그렇게 빨리 놓지 말걸...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련한 후회는 멈출 줄 몰랐고, 나는 그 때문에 더 괴로웠다.


슬픔을 압도하는 후회였다.


그래서 내게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의 허무한 결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어차피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더 좋아지는 것도 없으니, 후회는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라고.

단념은 묘하게 위안이 됐다.

살면서 몇 번이고 우리는 뒤를 돌아본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죽는 날까지 수많은 선택에 대한, 지난 과거에 대한 후회가 발목을 붙잡고 늘어질 것이다.


그런데, 죽음을 통한 상실은 말한다. 지나간 것은 결국지나간 거라고.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고. 애초에 왜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 그 이유도 모른다고. 그러니 인제 그만,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고.


진실은 때로 진실이기에 더 잔혹하지만, 그게 인생 아닐까.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인간은 결코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의 비통한 열망과 그에 응해주지 않는 세계 사이에 영원한 대립이 생겨나고, 그래서 ‘부조리’가 탄생한다.

어떻게 해도 삶을 이해할 수 없고, 인간의 욕망은 결국 좌절되고 만다면, 삶이 다 무슨 소용인가? 어쨌든 큰 운명이 결국 다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인간의 노력이 다 수포가 될 게 아닌가?


카뮈는 이 문제에 대해 허무와 포기로 부조리를 해소하려 하지 말고, 부조리에 끝까지 대면하고 반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자신을 넘어서는 현실을 부둥켜안고 대결’해야 한다고. 그게 결국 삶의 위대함을 회복시킨다고 말이다.


인간의 생각으로 우리는 결코 인생을 다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냥 포기하고, 좌절하고 있을 것인가?


우리는 그저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묵묵히 할 뿐이다.

이미 지나간 것, 내가 잃어버린 것,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아닌, 지금 내가 가진 것, 내 곁에 있는 것, 지금 바꿀 수 있는 것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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