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쓰지 못한 자, 책방지기가 되라.
가방 안에 책이 없다. 난감하다. 집을 떠나 어디론가 여행을 가거나, 출장을 갈 때, 혹은 잠깐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할 때도 언제나 가방에 책 한 권씩은 챙겨 다니곤 한다. 내가 가진 가방이 죄다 최소한 소설책 한 권은 수용할 수 있는 크기인 까닭이다.
제주도로 1박 2일 출장이 잡힌 밤, 여행 짐을 싸면서 가장 먼저 시간 날 때 읽을 책을 챙겨뒀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책을 꺼내 보려는데 가방을 아무리 뒤져도 책이 없다. 전날 잘 챙겨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꺼내 놓기만 하고 그냥 두고 온 모양이다.
여행이 아니라 출장으로 제주도에 가는 거라 여유 시간이 많지는 않겠지만, 밤에 숙소에서, 또는 비행기 안에서, 짬짬이 시간 날 때 꺼내 읽을 책이 없다니... 몹시 황망한 기분이다. 막상 책을 챙겨오면 한 번도 못 펴보고 돌아가는 일이 종종 있지만, 없으면 꼭 더 읽고 싶어지는 게 책이다. 이런 경우 여행이 끝날 때까지 아쉽고 허전한 기분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제주도에서 마지막 출장지는 그림 할망들이 사는 선흘마을이었다. 마을 농협 창고에서 열리는 그림할망 전시회를 보고, 그림할망 엽서를 파는 비건 책방에도 들렀다. 원래 목적은 엽서를 사는 것이었지만, 나는 곧장 책을 집어 들었다.
짧았던 제주도 출장 일정도 모두 끝났고, 공항까지 팀원들과 같이 움직이는 여정이라 혼자서 책을 볼 수 있는 시간이라고는 돌아오는 비행기 안, 겨우 30분 정도가 전부일 거다. 그런데도 책을 사지 않을 도리가 없다.손 닿으면 닿을 거리에 언제든지 펼쳐볼 수 있는 종이책이 한 권도 없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서다. 막상 볼시간이 없을지언정 심신의 안정을 위해 사는 수밖에.
제주도에 살면서 글을 쓰는 작가의 에세이 한 권, 서울 연남동에서 10년 동안 독립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책방지기의 에세이 한 권, 이렇게 두 권을 샀다. 그제야 숨통이 트인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해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읽었고, 제주도에서 돌아와서 <책방지기의 혼자말>을 읽었다.
<책방지기의 혼자말>은 제목에 들어간 '혼자말'에서 알 수 있듯이 10년차 책방을 운영한 자의 소소한 일상 기록, 일기 같은 책이다. 사실 읽는 내내 조금 심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짧은 호흡의 글에 작가의 담백한 성격이 더해져서, 내가 기대한 깊이(?) 있는 책방지기의 우여곡절 같은 것은 크게 없었다.
책방을 10년 했고 글도 쓰고 책도 만들었지만 결국 무엇도 되지 못한 사람. 하지만 이런 삶도 나쁘지 않아.
책 표지의 쓰인 글귀다. 단지 책을 좋아해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연남동에 책방을 낸 작가. 그로부터 10년동안 책방지기로 살아간 세월을 담담하게 써 내려간다. 책 속에도 나오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삶이다. 매일 소소한 일상의 연장이지만, 작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공간에 책을들여놓고, 그것도 독립서적들을 쌓아놓고, 손님들에게 책을 추천하기도 하면서 책방 운영을 이어나간다. 그 일을 자그마치 10년을 했다니, 그것만으로 대단한 일이다.
그렇게 좋아하는 일을 하는 책방지기지만, 그런 삶에도순간순간 권태는 찾아온다. 하루는 무기력을 온 몸으로표출하며 퇴근시간만을 기다리는데, 계좌번호를 모르는 작가의 책이 한 권 팔린다. 입금을 위해 작가에게 연락했더니, 바로 회신이 온다.
"책이 한 권 판매가 되었다고 하니 기분이 묘하네요. 저에게도 유료 독자가 처음으로 생긴 거니까요. 책방에 제 책을 전시해 주시는 고마움을 뭐라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판매금은 책방 운영비로 사용하라고 하였다. 순간 무표정했던 내 얼굴이 미안함으로 일그러졌다.
그래, 내가 파는 건 책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꿈이라고.
독립서점 책방지기는 책을 파는 게 아니라 책을 쓴 이들의 꿈을 파는 거라니.... 너무 멋진 말 아닌가.
책방 지기는 책방을 운영하는 것이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것을 복기함과 동시에 자신이 팔고 있는 것이 다른 이들의 꿈임을 되새긴다. 그와 동시에 눈꺼풀을 무겁게하고, 퇴근 욕구를 부르던 권태를 제대로 무찌른다.
좋아하는 것이 밥벌이가 되는 일을 '덕업일치'라고 한다. 말로는 더없이 이상적이지만, 덕업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다. 10년차 책방 지기 이보람 작가는 하루 판매량에 일희일비 하고, 오랜 세월 책을 팔아도 여전히 가볍기만한 통장 잔고에 시름한다.
오늘따라 왜 이러지. 불안하다고 이렇게 손님 내 쫓고 중간에 문 닫는 건 처음이었다. 불안의 원인이 뭘까 생각해봤다. 솔직히 생각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고는 있었다. 이번 달 매출액이 목표에 턱도 없어서였기 때문이다.
하루의 기분도 그 날, 그 주, 그 달의 매출액을 채웠는가에 좌지우지 된다.
책방을 5년 하는 동안 빚만 늘고 모아둔 돈이 어쩜 이렇게 하나도 없을까. 그럼 앞으로 책방을 더 한다고 한들 내가 돈을 모을 수 있을까.
어쩌면 덕업일치를 위해 가장 먼저 포기해야 하는 것이 '돈'이 아닐까?
사실, 이 책을 집어들게 된 이유는 동네 책방을 여는 것이 나의 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독립출판사를 세워, 내가 만든 책과 그림책을 출판하고, 그 옆에 작은책방을 열어 커피와 함께 판매하며 살고 싶다.
점점 꿈이랄게 없어지는 일상 속에서, 조심스럽게 품은새로운 꿈이었다. 그래서 책방에 대한 책, 서점을 열고,폐업을 하는 책 등은 보이는 대로 읽는 편이다.
개인이 동네 서점을 그것도 독립서적만 판매하는 책방을 운영하기에 현실은 녹록지 않다. 최근 나도 몸이 안 좋고, 가족 중에 서울로 병원을 오가야 하는 사람이 생겼다. 한 번씩은 월차를 내고 동행하지만, 그런 순간에 내가 회사에 묶이지 않은 몸이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한다. 언제 경제적, 시간적 자유를 얻어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글을 쓰며 살 수 있을까?
그러나 책방 지기의 삶도 남들이 주 5일 근무를 할 때도, 주 6일을 책방으로 출근해 주구장창 자리를 지키고있어야 하는 삶이었다. 거기다 통장은 거의 항상 '텅장'이다.
작가는 책방을 차리려는 사람에게, 책방을 하려면 우선책방의테마를 잘 정하고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차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텅장'에 주 6일 근무, 게다가 유동인구가 많은 입지....어렵다. 나는 내가 사는 소도시에 책방을 차리고 싶었기에, 유동인구에서 벌써 탈락이다.
거기다 이번에 방문한 제주도 비건책방도 그렇고, 헬로인디북스도 그렇고 대부분의 개인 책방이 단순히 책을 전시하고 파는 공간만은 아닌, 따뜻하고 아늑한 인테리어에 공간 자체가 주는 안정감과 매력이 있어야 하는 곳 같다.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채워진, 언제든 가서 오래 머물고픈 아늑한 장소 말이다.
그런데 나는 아기자기와 인테리어 등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나는 책방을 코지하게 꾸밀 능력도 없거니와 평생 돈이없이 살기는 더더욱 싫다.
이토록 책방 지기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과는 백만광년 쯤은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도 왜 나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책방 주인을 꿈꿀까?
그리고 여기는요, 왠지 안전하게 느껴집니다. 아무도 상처주지 않을 것 같은 곳, 매일 와도 되나요?
손님이 헬로인디북스 sns에 남기고 간 문구다.
안전하다는 말. 사람들 사이에서 수시로 상처를 주고 받는 우리는, 어쩌면 아무도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며칠 전 친구가 책방은 위로의 공간이라고 했는데 진짜 이 시간이 위로의 공간이라는 수식에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책방지기인 나도 위로 받는 곳. 문화 공간은 개뿔, 헬로인디북스는 위로의 공간 할 거다.
이보람 작가는 자신 또한 책방에서 위로를 받으며, 누군가에게 헬로인디북스가 위로의 공간이 되길, 고단한 삶의 쉼표 같은 휴식이 되길 바란다.
그렇기에,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0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킨다.
어찌 살아야 할 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일단 책방을 계속하자.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자.
책방 지기는 앞으로도 쭉 연남동 책방을 지킬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머지않은 어느 날, 내가 태어난 작은 시골마을에 나만의 책방을 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