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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련의 여주인공

거대 자궁근종을 임신했다. 

by 손여름 Dec 22. 2024

비련의 여주인공     

머릿속에 한 장면이 영화처럼 펼쳐진다.  


병원, 원장실 내부. 하얀 가운에 은색테 안경을 쓴 의사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있다. 두 손을 꼭 쥔 채, 의사의 입만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나. 무거운 침묵만이 흐른다. ‘제발, 암은 아니기를...’ 속으로 하나님, 부처님을 찾으며, 의사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리지만 굳게 다문 입은 요지부동이다. 살짝 찌푸러진 미간으로 짐작해 봤을 때, 경증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선생님... 상황이 많이 안 좋은가요?” 더 이상 참지 못한 내가 염소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재촉한다. 그제서야 의사도 더는 숨길 수 없다는 듯이, 천천히 입을 뗀다. “6개월 남았습니다.” 어쩌면 예상했을 법한, 그러나 결코 아니기를 바라고 바랐던 말... 무슨 소리를 듣더라도 최대한 의연해야지... 잘 모르는 의사 앞에서 우는 꼴만은 보이지 말아야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굳건했던 다짐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충격으로 일그러진 얼굴 위로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엄청난 양의 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그런 상황까지 상상하고 있자니, 당장에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다. 아니, 울기에는 아직 이르다. 고개를 저으며 무서운 생각을 애써 떨쳐낸다. 그런데도 ‘설마...’ 하는 생각은 쉽게 지울 수 없다. 정말로 만에 하나, 나에게  그런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일이 현실이 된다면 나는 당장 무엇부터 해야 하는 것일까?    증명사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새로운 사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2년 전, 아빠의 장례식에 영정사진으로 쓸 마땅한 사진이 없어서 온 가족이 애를 먹었다. 찍은 지 최소 8년은 지난 것 같은 신분증 속의 내 모습은 지금의 나와 차이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동안 살뜰히 불어나는 살 때문에 새로 찍기를 미뤄왔던 증명사진을 이제라도 다시 찍어야 하나? 사진을 새로 찍고, 그다음은? 통장 비밀번호를 가족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써 붙여 둬야지... 그동안 꾸준히 써 온 일기장도 몽땅 태워서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또한번 울컥한다. 나는 진짜 어쩌자고 상황을 이 지경까지 몰고 온 것일까. 후회를 해 보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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