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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거진 미러 Oct 08. 2024

Vol.23 <이제는 꾸준함을 향하여>

기록보관소


사서 이선민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순간, 이 청춘이 영원할 수 있을까요? 영원할 것 같았던 이 순간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느새 저물어갑니다. 아쉬운 하루하루는 붙잡으려 해도 결국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지요. 미래가 항상 찬란할 수는 없겠지만 지속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실패와 시도를 반복하면서도 중요한 것은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의지입니다. 불확실한 앞날이 우리를 가로막더라도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삶의 의지를 찾아가며, 지속하는 행위의 의미를 탐구하는 작가 서이제를 <이제는 꾸준함을 향하여>에서 만나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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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입에서 청춘이라는 단어가 떨어지길 기대하고 있었다. 너무도 푸르러 눈물날 듯한 젊음을 대변하길 바랐다. 그러나 서이제 작가에게 욕망은 자신이 택한 예술이란 삶의 방식을 최선을 다해 지키는 것이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글과 영화로 표현해 내는 일. 그래서 그는 오늘도 읽고 쓰고 말한다. 한 손에는 집중력 향상을 위한 공깃돌을 꼭 쥔 채.



첫 책인 ≪0%를 향하여≫를 내고 8개월이 지났어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단편소설 마감이 계속 있었어요. 단 한 달도 쉬지 않고요. 출간 전과 가장 달라진 점이 있다면 요즘은 수업을 많이 한다는 거예요. 사설 아카데미나 서점, 대학 등에서 소설과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죠.


소설에도 마감이 있나 봐요. 저는 기한 없이 만족스러울 때까지 쓰는 줄 알았어요.

신인들이 데뷔하면 보통 한동안은 단편만 써요. 문예지에서 청탁이 들어오거든요. 그러면 마감일에 맞춰 발표하고, 괜찮으면 또 단편 제안이 들어와요. 몇 년간 글이 모이면 하나의 단행본으로 낼 수 있죠. 그렇게 2년 동안 모은 게 ≪0%를 향하여≫예요.


요즘은 수업을 많이 하고 있다고요. 가르치는 일은 어떤가요?

저는 ‘소설이 뭐지?’라는 생각을 확장하면서 소설을 체득했어요. 그래서 수업할 때도 학생들에게 왜 이렇게 썼는지, 왜 그렇게 쓰지 않았는지를 고민하는 시간을 갖도록 해요. ‘왜’라는 질문에 대답하다 보면 어떤 의도로 글을 쓰고 싶었는지 깨달을 수 있거든요. 새로운 스토리텔링 방식을 떠올리기도 하고요. 또 소설 이야기만 하지 않아요. 기술 발전이 예술과 문학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토론해 보기도 하죠. 이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우리가 써야하는 글의 방향성을 함께 고민하는 시간이 돼요.


글쓰기 스킬을 알려준다기보다 이야기 소재를 꺼내 주는 수업을 하는 거네요.

맞아요. 제 강의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좋겠어요. 그래서 잘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 자주 고민하고 있어요.



영화를 전공했다고 들었어요.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시나리오를 직접 써서 영화를 연출하는 창작자가 되고 싶었어요. 그때 당시에 영화학도들에게 전설처럼 내려오던 말이 있었죠. “좋은 시나리오가 좋은 영화를 만든다.” 그런데 저는 약간 의심이 드는 거예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영화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표현 방식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줄거리는 식상한데 그걸 채우는 이미지들이 식상하지 않아서 좋은 영화도 있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직접 써 보면 어떨까 했죠.


그럼 실제로 소설을 써보고 나니까 좋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나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웃음) 하지만 깨달은 점은 있어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는 상태로 글을 써도 된다는 거예요. 전에는 주제를 명료하게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적어도 작가 스스로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요. 그런데 소설을 짓다 보니 쓰는 일이 곧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그 과정 자체를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게 참 의미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죠.


영화보다 소설 이야기를 할 때 더 자유로워 보여요. 두 장르의 창작 과정을 모두 겪으며 가장 달랐던 지점은 무엇인가요?

소설을 쓰면서 능동적인 사람이 되었어요. 영화는 한 편 찍는 데 돈도 많이 들고 상당한 에너지를 필요로 해요. 그리고 다수의 사람이 얽혀 있어 순간의 판단이 굉장히 중요한 편이에요. 때문에 영화감독일 때는 모든 걸 다 통제하려고 했어요. 수많은 경우를 생각해 두었죠. 그런데 모든 계획이 다 어긋나는 거예요. 심지어 촬영하다가 벤츠를 박은 적도 있어요.


와, 정말 아찔해요.

갚느라 애 좀 먹었죠.(웃음) 하지만 소설은 나 혼자만 실패하면 되고, 잘못되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잖아요. 언제든 한글 파일을 열어서 다시 시작할 수도 있고요. 생각처럼 안 되더라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도 가끔 소설을 쓰다 실패하면 도망치고 싶을 것 같아요. 오히려 글이 잘 안 풀릴 때는 괜찮아요. ‘빨리 써서 이 고비를 뚫어야지.’라는 생각으로 임해요. 가장 도망치고 싶은 상황은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말해야 한다거나 잡지 화보 촬영, 방송 출연 등 카메라 앞에 설 때예요.


정말 의외예요. 오늘 촬영 내내 떨려 하는 티가 전혀 안 났어요.

그냥 단념하고 하는 편이에요. 어차피 도망가고 싶어도 숨을 구석도 없잖아요. 되도록 빠르게 익숙해지려고하죠. 기왕이면 잘하고 싶기도 하고요.


소설 이야기를 더 해보고 싶어요. 한 명의 독자로서 작가님의 소설은 매번 새로운 전개 방식을 보여 준다고 느꼈어요. <(그)곳에서>는 스도쿠 형식을 취하기도 하고, <미신>에서는 ‘모른다’라는 말로 어디까지 쓸 수 있는지 실험하기도 했죠. 기존 구조를 벗어나는 일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아요.

자유로운 형식을 쓰고 나서 속이 후련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나는 말을 많이 하는데, 왜 후련하지 않을까?’라는 고민이 있었거든요. 자꾸 말이나 단어에 반문이 드는 거예요. 예를 들어 ‘나 오늘 늦잠 잤어.’라는 말을 듣는다면 ‘늦게 일어난다는 건 무엇이지? 12시가 늦게 일어난 건가? 그러면 7시는 일찍 일어난 건가?’ 하고 생각이 이어지는 거죠. 이런 것들이 머릿속을 점령하니까 괴롭고 답답했어요. 그런데 글을 쓰고 다양한 전개 방식을 취하면서 해소가 되었고, 드디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죠.


소설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은 시간대가 뒤죽박죽 섞여 있어 마치 의도를 알 수 없는 영화를 보는 듯했어요. 영화를 공부하며 체득한 요소들이 소설에 사용되기도 하나요?

많은 부분에 반영되었죠. 영화 자체가 시간이 뒤엉켜 있기도 하지만 로케이션에 따라 순서를 달리하여 촬영하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시간을 자유롭게 사유하는 방식이 익숙해요.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의 경우 원고를 인쇄해서 자르고 콜라주 하듯이 맞춰 보기도 했어요. 물질과 비물질을 주제로 하고 있으니 물질로 조합하면 다른 감각이 나올까 해서요. 앞뒤에 어떤 이야기를 배치하는지에 따라 글의 분위기가 달라지거든요.


미술 작품을 만드는 과정 같아요. 앞으로 어떤 것들을 표현할지 기대도 되고요.

지금까지는 현실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가까운 미래나 어떤 세계관을 만드는 글을 쓰고 싶어요. 소설집 ≪0%를 향하여≫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오는 감각들을 물질과 비물질에 초점을 맞추어 엮었어요. 두 번째 소설집에 묶일 이야기는 디지털에 관한 거예요. 세 번째는 비인간과 동물에 관한 이야기들을 다룰 예정이죠.


현실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를 했다고요. 그래서 그런지 작가님의 작품에는 어디서 본 듯한 혹은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보았던 청춘들의 모습이 담겨 있어요. 페이스북에 우울함을 늘어놓거나 술자리에서 자랑 릴레이를 펼치기도 하죠. 이러한 인물들에 조명하여 소설을 전개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지금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것들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제 나이 또래 이야기를 쓰게 되었어요. 소설에는 변하지 않는 것들을 담는 경우가 많아요. 그 당시의 유행을 적으면 언젠가는 촌스러워지기 마련이거든요. 하지만 저는 지금을 쓰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언젠가 사라질 것들. 그래서 일부러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같은 단어들을 써요. 청춘들의 이야기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게 아닐까 싶어요. 


이들의 공통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과 예술을 이어 간다는 거예요. 영화계를 한참 비판하다 다시 영화를 찍으러 가는 것처럼요. 주변 사람들이나 작가님의 삶의 태도가 반영된 것일까요?

영화가 알려준 삶의 태도가 있어요. 바로 ‘희망없이 지속하기’예요. 예를 들면 ‘미래가 항상 밝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밝지 않아도 계속할 거야. 그런 힘이 나에게 있어.’ 같은 것이요. 영화 엔딩을 보면 이상한 낙관이 생겨요. 새 희망으로 나아가는 주인공을 보며 왠지 나도 내일은 괜찮을 것 같은 거예요. 이러한 관점이 소설에도 담긴 거죠.


소설 <0%를 향하여>에서는 “누구는 마약도 하는데, 저는 왜 예술 뽕도 못 맞아요? 왜 저는 그것도 하면 안돼요?”라는 대목이 나와요. 예술을 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는 건 사회적으로 어려운 일이기도 한 것 같아요. 작가님도 예술을 하면서 욕망을 감추거나 지워버린 경험이 있나요?

단 한 번도 없어요. 중2병이나 홍대병처럼 예술 뒤에 붙는 단어들이 있잖아요. 저는 그 단어를 정말 싫어해요. 자아도취하는 거 좋아 보이지 않나요? 그 자체로 귀엽게 봐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이야기를 통해 독립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강하고 숭고하고 즐거운 일을 하는 건지 보여주고 싶었다고요. 감히 정의하자면 이런 애정을 드러내는 게 ‘서이제식 욕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맞아요. 미래가 막막하다고 느낄 때 자신의 작업을 계속해 나가는 독립영화인들을 보면서 용기가 생겼어요. ‘아, 그냥 이 사람들과 같이 늙어가면 되겠구나.’ 결국 이렇게 함께하려고 내가 영화를 공부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욕망을 주제로 소설을 쓴다면 어떤 이야기를 담고싶어요?

말하고자 하는 욕망만이 남은 소설을 쓰고 싶어요. 사무엘 베케트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데 그의 후기작들을 보면 글이 아니라 언어 더미 같아요.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는데도 말하려고 시도하고 실패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해요. 사람들은 이런 베케트의 소설을 보고 허무주의라 불러요. 하지만 저는 이게 반대인 것 같은 거예요.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말하잖아요. 이 삶의 의지는 어디서 오는 걸까. 지속하는 행위에 대한 욕망 같아서 제겐 오히려 희망이 되었어요.


그래서 말하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된 대목을 꼽았어요.

네, 소설 <임시 스케치 선>에 있는 문장이에요. 욕망이라는 주제와 제일 잘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소리 내어 읽어봐도 좋을 거 같아요. 읽을 때 느껴질 리듬을 많이 신경 쓴 글이거든요.



우리는 2시간 동안 예술과 영화, 그리고 이를 지속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삶의 의욕이 별로 없다던 그는 언젠가 동네 서점이나 카페에서 상영회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 해맑은 얼굴을 보며 나는 ‘이건 엄청난 삶의 의지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베케트를 보며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Editor 정현지

Photographer 배범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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