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서 살기

풍요와 빈곤 가운데 이방인의 삶

by 묵묵

내가 맨 처음 아프리카 땅을 밟은 때는 5년 전이었다. 다니는 회사의 파견으로 그때 2015년 1월 1일부터 아프리카 대륙의 한가운데 위치한 '르완다'라는 조그만 나라에서 살기 시작했다. 르완다로 출발하기 한 달여 전부터 인터넷으로 충분히 사전조사를 했었고, 나보다 몇 달 먼저 파견 나와 있었던 동료들로부터 들은 내용이 있었기에 몇 년이 될지도 모를 세월 동안 아프리카로 살러 가면서도 두려움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긴 세월 신문과 방송에 의하여 내 머릿속에 각인된, 아프리카라면 쉽게 떠올리는 거리의 무질서와 작렬하는 태양, 극도로 조심해야 하는 비위생에 대한 걱정은 있었다. 서울에서 살 때만큼 집과 회사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쉽게 구하고, 아프면 언제든지 병원을 찾아가고, 내가 모르는 게 있으면 도와줄 수 있는 전문가를 쉽게 찾지는 못할 것이라는 아쉬움도 있었다.


하지만, 살다 보니 생활의 불편함은 있었어도 그게 큰 두려움으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처음에 비행기에서 가지고 내렸던 걱정과 아쉬움도 그다지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서울과 다르기는 했어도 여기도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었고 그들의 인생이 다양하게 펼쳐지는 터전이었다. 태어나서 자라다 결국 늙어가고, 어울려 미래를 함께 꿈꾸는 수많은 가정과 공동체들로 이루어진 사회인 점은 한국과 매한가지였다. 그들이 웃고 울고 사랑하고 싸우며 서로 부대끼는 모습은 내가 한국에서 봐오던 것들과 차이 나지 않았고, 이상하게 여길만한 것들은 아니었다. 초원을 누비는 동물들이 아니라 시멘트 인공 구조물 속 사람들의 세상이었기에 내가 살면서 필요한 물건들을 구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았고, 덕분에 서울에서 영위하던 나의 생활 패턴을 일부로 바꿀 필요는 없었다.


물론 르완다의 생활환경은 서울에 비해서 조금씩 모자라기는 하다. 쇼핑몰과 시장에서 만나는 공산품의 다양성과 품질은 한국에 비해 많이 떨어지고, 식당과 슈퍼에서 만나는 직원들의 서비스는 투박하기만 하다. 한국에서는 당연하게 즐기던 빠른 인터넷과 안정적으로 공급받던 전기와 수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교통 같은 것들은 여기에 없다. 시내에 하나밖에 없는 영화관에 걸리는 최신 영화는 한국에 비해 몇 달씩 늦은 것 같고, PC방과 노래방 같은 유흥시설은 아직 도입 전이다. 스마트폰을 열어 클릭 한 번이면 생필품이건 음식이건, 새벽이고 밤이고 배달해주는 환상적인 편리함은 없고, 술 한 잔 마시고 호기롭게 부를 수 있는 대리운전 서비스를 기대하는 것은 택시가 활성화된 지도 겨우 2 ~ 3년 되지 않은 이 사회에서는 아직 무리다. 비위생으로 자주 아픈데 르완다 의사들의 실력을 믿을 수가 없어서 병원에 가기는 부담스럽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그래도 이 동네에서 고급 축에 들지만 비만 오면 여기저기 줄줄 새는데 일반인들의 주택은 말해 무엇하랴.


그래도 나는 르완다의 삶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한국보다 모자란 점들이 많기는 하지만, 르완다에서 영위하는 삶에는 그 단점을 상쇄할 수 있는 한국에서의 삶보다 나은 장점들도 많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한 시간씩 걸리는 출퇴근의 고통은 여기에 없다. 10분, 15분이면 출근하고 퇴근할 수 있다. 한국에서 봄철이면 늘 달고 살았던 중국발 미세먼지는 여기에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매일매일이 '맑음'이기 때문이다. 우리 돈 15만 원 정도만 내면 일 년 내내 10분 거리의 테니스장을 평일이고 주말이고 무한정 이용할 수 있고, 붙어있는 수영장과 헬스클럽은 덤이다. 이 동네 최고급 호텔에서 동네 식당과 같은 가격으로 방문한 가족에게 한턱낼 수 있는 호사도 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르완다 사회 최상류층의 삶을 누리는 것은 차라리 축복이다.


반대로 충분한 누림 속에서도 내 마음에 스며드는 불편함은 어쩔 수 없다. 이는 내 주변에 아주 흔하게 널린 현지인들의 신산한 삶을 지켜보는 데서 시작된다. 내가 지인 서너 명과 즐기는 한 끼 밥값은 서빙하는 청년의 한 달치 월급을 넘고, 내가 10분 출근을 위해 운전하는 차 옆 보도에는 한 시간씩 걸어서 등교하는 꼬마들의 덩치보다 큰 책가방이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 정문을 밤새 지키는 경비는 낮에는 대학생으로 변신하지만, 경비 월급으로는 교재를 사기에도 벅차다. 내가 주머니에 넣기 불편하다고 서랍에 처박아 둔 동전들은, 시골 사람들을 여러 명 모아 위아래 주머니를 다 뒤져도 나오지 않는 귀한 물건이고, 테니스장에서 한 시간 내내 볼을 좇아 뛰는 볼보이가 받는 천 프랑은 그날 온 가족의 유일한 수입일 수 있다.


천성이 냉정하고 무심한 나는 이들의 어려운 형편을 외면하고 사는 편이다. 때로는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는 조상님들의 속담을 스스로에게 갖다 부치기 하고, '원조가 아프리카인의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든다'는 일부 경제학자의 논리로 자위하기도 한다. 이래 저래 알게 된 현지인들이 직접 찾아와 부탁할 때 돈 몇 푼 쥐어주는 외에 이 땅에 흔한 배고픔의 고통에 대해서는 남의 일로 여겼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하여 이들의 삶이 더욱 어려워진 요즘은 이들의 고통이 더 쉽고 더 크게 다가온다. 이 땅 주인들의 삶이 너무 황폐해지지 않도록 좀 더 베풀어야, 나의 이방인으로서 풍족한 삶의 기반도 유지될 수 있음을 이제 피부로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즐기는 삶이 길어질수록, 함께 살아가기 위하여 베풀어야 한다는 양심의 목소리도 커지는 아프리카에서의 삶이다.


2020년 5월 3일

묵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