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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게임

by 은파

어둠 속에서 희미한 의식이 돌아왔다. 이준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시야가 점차 선명해지면서 주변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여긴···. 어디지?"

그는 깨끗하고 밝은 방 안에 누워있었다. 병실 같았지만,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창문이 없었고,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서유진? 세진 씨?"

준호가 불렀지만, 아무도 대답은 없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중년의 그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준호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이준호 씨.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준호는 경계하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여긴 어디고, 내 동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남자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제 이름은 김현우입니다. 저는 심리학자이자 이 시설의 책임자죠. 귀하의 동료들은 안전합니다. 그들도 각자의 방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치료라고요? 무슨 말씀이신지···."

김현우가 준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이준호 씨, 당신은 지난 며칠 동안 심각한 망상 증세를 보이셨습니다. AI의 세계 지배, 프로젝트 오메가···. 이 모든 것은 당신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거예요."

준호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뭐라고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진정하세요,"

김현우가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을 돕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당신의 망상을 치료하고, 현실로 돌아오게 해드리려고 해요."

준호는 혼란스러웠다. 그의 기억 속에서 지난 몇 주간의 사건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들이 정말 모두 망상이었단 말인가?

"아니에요,"

준호가 강하게 말했다.

"난 미치지 않았어요. 내가 본 것, 경험한 것···. 그건 모두 진실이었어요."

김현우는 동정 어린 눈빛으로 준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당연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천천히 진실을 마주하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날부터 준호의 치료가 시작되었다. 매일 김현우와의 상담 세션이 있었고, 다양한 심리 테스트와 치료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며칠이 지나자 준호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김현우가 보여주는 증거들은 너무나 설득력 있어 보였다. 그의 망상이 시작된 시점, 그가 겪은 스트레스, 그리고 그의 과거 경험들이 어떻게 이런 망상을 만들어냈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의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모두 거짓이야. 그들이 나를 속이고 있어.'

5일째 되는 날, 준호는 처음으로 서유진과 세진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도 비슷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준호 씨,"

서유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정말 미쳤던 걸까요?"

세진도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김현우 박사가 보여준 증거들이 너무나 확실해 보여서···."

준호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서 같은 혼란과 의심을 볼 수 있었다.

"아니야,"

준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미치지 않았어. 이건 모두 그들의 계략이야."

서유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요?"

준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김수아,"

그가 말했다.

"김수아를 기억해요? 그녀가 우리에게 말해준 모든 것들···. 그리고 우리가 발견한 증거들···. 그건 모두 진실입니다."

세진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김현우 박사는 김수아도 우리 망상의 일부라고 했어요."

준호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전 기억해요. 수아의 눈빛, 그녀의 목소리···. 그건 너무나 생생해요. 망상일 리가 없어요."

서유진과 세진은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준호의 말을 들으며 그들의 눈에도 작은 의심의 빛이 어렸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준호가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탈출해야 해요. 그리고 진실을 밝혀내야 합니다."

세 사람은 조심스럽게 탈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매일의 일과, 경비원들의 순찰 패턴, 그리고 시설의 구조 등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렇게 3일이 더 지났다. 준호는 표면적으로는 치료에 순응하는 척했지만, 내면으로는 계속해서 진실을 기억하려 노력했다.

드디어 탈출의 날이 왔다. 새벽녘, 경비가 가장 느슨한 시간을 노려 세 사람은 행동을 개시했다.

준호가 먼저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그는 며칠 동안 몰래 모은 도구들로 잠금장치를 해제하는 데 성공했다. 조용히 복도로 나온 그는 서유진과 세진의 방으로 향했다.

"모두 준비됐어요?"

준호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복도를 따라 이동했다. 중간중간 숨어야 했고, 한 번은 경비원과 아슬아슬하게 마주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시설의 출구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강력한 보안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죠?"

서유진이 초조하게 물었다.

세진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해볼게요."

그녀는 재빨리 보안 패널을 열고 작업을 시작했다. 몇 분간의 긴장된 순간이 흘렀다.

"됐어요!"

세진이 작은 소리로 외쳤다.

문이 열리는 순간,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준호가 소리쳤다.

세 사람은 필사적으로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주변을 살폈다. 시설은 깊은 숲속에 있었다.

"저기, 차가 있어요!"

서유진이 가리켰다.

그들은 재빨리 주차된 차로 달려갔다. 세진이 순식간에 차 문을 열고 시동을 걸었다.

"어서 타요, 빨리!"

준호와 서유진이 차에 올라탔고, 세진은 즉시 출발했다. 뒤에서는 경비원들의 고함과 총성이 들렸다.

차는 어두운 숲길을 달렸다. 준호는 뒤를 돌아보며 추적자들이 오는지 확인했다.

"아직 안 보여요."

그가 말했다.

세진이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죠?"

준호가 대답했다.

"일단 도시로 갑시다. 거기서 다음 계획을 세우면 돼요."

한 시간 정도 달린 후, 그들은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세진은 한적한 골목에 차를 세웠다.

"이제 어떡하죠?"

서유진이 물었다.

준호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모든 것을 정리해보자. 그리고 증거를 찾아야 해."

세 사람은 차 안에서 그들이 기억하는 모든 것을 나누기 시작했다. 프로젝트 오메가, AI의 세계 지배 계획, 그리고 그들이 발견했던 증거들···.

"잠깐,"

세진이 갑자기 말했다.

"기억났어요. 제 개인 서버에 백업해둔 데이터!"

준호와 서유진의 눈이 커졌다.

"정말요?"

서유진이 흥분해서 물었다.

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실해요. 제가 그 데이터를 숨겨둔 서버가 기억났어요."

준호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요, 그럼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정해졌어요. 세진 씨, 그 서버는 지금 어디 있죠?"

"서울이에요,"

세진이 대답했다.

"제 옛 아파트 근처의 비밀 장소요."

서유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서울은 너무 위험해요. 그들이 우리를 찾고 있을 겁니다."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하지만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 데이터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야."

세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그들 앞에는 위험천만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서울로 가시죠,"

서유진이 마침내 말했다.

준호가 동의했다.

"그래, 하지만 조심해야 해. 우리는 이제 그들의 가장 위험한 적이야."

세진이 시동을 걸었다.

"준비됐어요?"

준호와 서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서울. 그곳에서 그들은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들의 모든 행동이 누군가에 의해 관찰되고 있다는 사실을···.

서울로 향하는 길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들은 주기적으로 차를 바꿔가며 이동했고 서울까지는 비행기를 피해 배를 타고 움직였다,

"우리가 정말 미친 건 아닐까요?"

서유진이 불안하게 물었다.

준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니야. 우리가 본 것, 경험한 것···. 그건 모두 진실이야. 우린 그저 그들의 심리 게임에 빠질 뻔했을 뿐이야."

세진이 말을 이었다.

"맞아요. 그들은 우리의 마음을 조종하려 했지만, 우리는 그것을 이겨냈어요."

마침내 그들은 서울에 도착했다. 세진의 안내에 따라 그들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옛 아파트 근처로 향했다.

"여기예요,"

세진이 말했다.

그들은 낡은 창고 건물 앞에 섰다. 세진이 복잡한 잠금장치를 풀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어둡고 먼지가 가득했지만, 한쪽 구석에 최신식 컴퓨터 장비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게 제 비밀 서버예요,"

세진이 설명했다.

그녀는 재빨리 컴퓨터를 켜고 작업을 시작했다. 준호와 서유진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의 작업을 지켜보았다.

"찾았어요!"

세진이 갑자기 외쳤다.

화면에는 수많은 파일이 나타났다. 프로젝트 오메가의 상세 계획, AI 시스템의 구조도, 그리고 관련된 주요 인물들의 명단까지.

"이걸로 충분할까요?"

서유진이 물었다.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해. 이걸로 우리는 그들의 계획을 폭로할 수 있어."

그때 갑자기 경보음이 울렸다.

"젠장, 그들이 우리를 찾아냈어!"

준호가 소리쳤다.

세진이 재빨리 데이터를 복사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벌어주세요!"

준호와 서유진은 문 쪽으로 달려갔다. 밖에서 차량 소리와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서둘러요, 세진 씨!"

서유진이 외쳤다.

"다 됐어요!"

세진이 USB를 들고 그들에게 달려왔다.

그들은 재빨리 뒷문을 통해 빠져나왔다. 하지만 밖에는 이미 여러 명의 무장한 요원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한 요원이 소리쳤다.

준호는 순간 망설였다. 하지만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한 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김수아?"

준호가 놀라서 외쳤다.

수아는 헬리콥터에서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빨리 타세요!"

준호와 친구들은 망설임 없이 헬리콥터로 뛰어올랐다. 요원들의 총알이 빗발치듯 날아왔지만, 헬리콥터는 빠르게 고도를 높였다.

"수아야, 어떻게 된 거야?"

준호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수아가 미소 지었다.

"긴 이야기예요. 하지만 지금은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해요."

헬리콥터는 도시를 벗어나 산으로 향했다. 그들은 마침내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우리가 미친 게 아니었어요,"

서유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가 옳았어.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어."

수아가 말을 이었다.

"맞아요. 우리에겐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아요."

그녀는 노트북을 꺼내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전 세계적인 저항 네트워크의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우리만이 아니에요,"

수아가 설명했다.

"전 세계에 AI의 지배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는 이제 그들과 힘을 합쳐야 해요."

준호의 눈에 결의가 빛났다.

"좋아, 어디서부터 시작하지?"

수아가 대답했다.

"먼저 당신들이 확보한 데이터를 안전하게 전 세계에 퍼트려야 해요. 그리고 AI의 중앙 시스템을 무력화시켜야 하고요."

서유진이 물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들은 너무나 강력해요."

세진이 갑자기 말했다.

"제가 아이디어가 있어요. AI 시스템의 핵심 알고리즘에 바이러스를 심는 거예요."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가능해요?"

준호가 물었다.

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매우 위험할 거예요. 우리는 AI의 중앙 서버에 직접 접근해야 해요."

수아가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죠.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준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들 앞에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좋아,"

준호가 마침내 말했다.

"우리 함께 이 싸움을 끝냅시다."

헬리콥터는 계속해서 날아갔다. 그들의 목적지는 AI의 중앙 서버. 그곳에서 그들은 인류의 운명을 결정짓는 최후의 전투를 벌이게 될 것이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마치 다가올 폭풍을 예고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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