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역설 07화

배경 없는 사람

by 은파

스마트폰이 울렸다. 아침 7시 30분,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화면에는 ‘고모’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평소 자주 연락하는 사이가 아니었기에, 그 시간에 걸려 온 전화는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음을 직감하게 했다. 이상하게도, 그조차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나 자신을 먼저 인식하게 되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고모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항상 차분했던 고모가 그렇게 흔들리는 음성을 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고모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민준이가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어젯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했다. 장례식은 모레부터 시작된다며, 내가 참석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민준’이라는 이름이 들리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이었던 민준. 키가 크고, 유쾌하게 말을 많이 하던 친구였다. 대학은 서로 다른 곳으로 진학했지만, 그 후로도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던 몇 안 되는 어릴 적 친구 중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연락했던 것이 언제였는지 떠올리려 애썼지만,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았다. 몇 달 전이었는지, 작년이었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난 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민준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쉽게 믿기지 않았다. 그것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는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어딘가에서 숨 쉬고 있었을 사람이, 이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 건, 그 사실 앞에서도 내가 충격을 받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슬프지도 않았고, 놀랍지도 않았다. 머릿속은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지만, 정작 감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황스럽기만 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만이 선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보통 어떤 감정을 느끼는 걸까. 나는 그조차도 떠올릴 수 없었다. 마치 감정을 사용하는 법을 완전히 잊어버린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민준과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려보려 했다. 카카오톡을 열자, 마지막 메시지가 석 달 전이었다. 민준이 먼저 연락해 왔다.

“요즘 어때? 잘 지내?”

짧고 평범한 인사였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습관처럼 답했다.

“괜찮아. 바쁘게 살고 있어. 너는 어때?”

의례적이고 무미건조한 대화였다.

“나도 그냥 그래. 요즘 좀 힘들긴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지.”

그 문장이 이제야 또렷하게 가슴에 박혔다. ‘좀 힘들긴 하지만’이라는 말. 그땐 대수롭지 않게 스쳐 갔지만, 지금은 유난히 날카롭고 무겁게 읽혔다.

“힘내. 다 괜찮아질 거야.”

익숙하고 기계적인 위로. 그것이 민준과 나눈 마지막 문장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민준은 그 짧은 문장 속에 무언가를 담고 있었던 건 아닐까. 단순한 하소연이 아니라, 진심 어린 도움 요청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신호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다. 복잡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고, 누군가의 고통에 깊이 관여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냥 말로만 위로하고, 빠르게 대화를 마무리했었다.

그런 나 자신이 원망스러워야 마땅했다. 친구가 힘들다고 털어놨을 때 진심으로 들어주지 않았고,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데 정작 나는, 그런 나를 원망하는 감정조차 느끼지 못했다. 머리로는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가슴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감정을 느껴야 할 자리에 감정이 없었다. 죄책감이 들어야 할 순간에도, 공허함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슬픔도, 아픔도, 놀람도, 내게서 너무 멀리 떨어진 채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오후 내내 나는 민준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들은 어딘가 어색하고 낯설었다. 민준은 어떤 아이였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려 애썼다. 키가 컸고, 수다스러웠다. 농구를 좋아했고 수학은 잘했지만, 국어는 늘 어려워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에게 말대꾸하다 혼나는 일도 자주 있었다. 그런 모습이 때로는 무모해 보였고, 때로는 부러웠다. 내가 쉽게 하지 못하는 말들을 민준은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낼 수 있는 그 자유로움이, 그 시절의 나에게는 이상하리만치 선망의 대상이었다.

대학에 진학한 이후 처음 몇 해 동안은 방학마다 만나 수다를 떨었고, 각자의 생활을 공유하며 막연한 미래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어느새 그런 만남은 줄어들었고, 연락의 간격도 길어졌다. 바쁘다는 핑계, 귀찮다는 이유로, 우리는 점점 각자의 세계로 갇혀갔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한 달 전, 예전에 살던 마을에 갔다가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근처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그날 민준은 평소처럼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직장 생활에 대한 불만, 지루한 회식 이야기, 별 의미 없는 농담들. 특별히 우울해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은 불평처럼 들렸다. 누구나 하는 이야기, 흔한 피로와 짜증처럼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와서 다시 떠올려보면, 그날의 민준은 조금 달랐던 것 같기도 하다. 웃음이 어딘가 인위적이었고, 지나치게 말을 많이 했던 것도 어쩌면 무언가를 감추려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신호들을 알아채지 못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알아채려 하지 않았다. 상대의 복잡한 감정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고, 깊이 관여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표면만 훑고 지나가고 싶었다. 그게 편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장례식에 갈 것인가, 가지 않을 것인가. 모레부터 장례가 시작된다고 했으니, 참석하려면 내일 퇴근 후 바로 출발해야 했다. 하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침울한 분위기, 우는 사람들, 건네야 할 위로의 말들. 그 모든 것이 버겁게 느껴졌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고등학교 동창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민준의 소식을 알고 있는지, 장례식에 참석할 예정인지 물었다. 모두가 충격을 받은 듯한 반응이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말이 반복됐고, 마지막으로 봤을 땐 멀쩡했다며 의아해했다. 그리고 대부분이 장례식에 간다고 말했다.

그 대화 속에서 문득, 내가 그들과 얼마나 다른지 깨달았다. 친구들은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고, 슬퍼하고 있었으며,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반면 나는,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사건을 겪고 있음에도, 나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마치 서로 다른 종족인 것처럼.

집에 도착한 후, 나는 장례식에 입고 갈 옷을 준비했다. 장례식장에서 해야 할 행동도 머릿속으로 미리 그려보았다. 조용히 인사를 건네고, 유족에게 적절한 말을 하고,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한다는 것. 그 모든 것은 하나의 연기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연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날 밤, 잠들기 전 나는 민준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해 보려 했다. 그는 외로웠을까. 무서웠을까. 후회했을까. 아니면 그냥 모든 걸 끝내고 싶었던 걸까. 민준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었지만, 쉽게 닿지 않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 가능성을 조합하고, 그럴듯한 감정을 추측할 수는 있었지만, 가슴에서는 어떤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새벽까지 잠들지 못한 나는 민준의 소셜미디어 계정을 찾아보았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최근 몇 달간 게시물은 거의 없었고, 마지막 게시물은 6개월 전이었다. 일상적인 사진 한 장, 짧은 문장 하나. “오늘도 수고했다.” 댓글도 거의 없었다.

그 글을 바라보며 나는 민준이 얼마나 외로웠는지, 얼마나 조용히 사라져갔는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짐작조차도 내 가슴에서가 아닌, 머릿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감정이라기보다는 수학 문제를 푸는 것처럼,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구조화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나는 친구의 외로움, 절망, 마지막 선택조차도 오직 이성으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공감은 없었고, 마음에서 연결도 없었다. 나는 누군가의 죽음을 이렇게까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튿날 오후, 나는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안은 조용했다. 평일 오후라 승객도 드물었고, 대부분 나이 든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각자의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나도 그들처럼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민준의 장례식장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민준 어머니를 만나면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까. 머릿속을 맴도는 건 온통 그런 실용적인 고민뿐이었다. 친구를 잃었다는 슬픔이나 그리움은 어디에도 없었다.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거울을 보며 슬픈 표정을 연습했고, 머릿속으로 위로의 말을 반복했다. 마치 무대에 오르기 전 대사를 점검하는 배우처럼, 감정이라는 연기의 톤을 미리 조율해 두고 있었다.

장례식장에는 조문객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대부분 낯선 얼굴이었지만, 그 속에서 익숙한 이들도 눈에 들어왔다. 고등학교 동창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보자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왔지만, 그 반가움은 어딘가 어색했다. 슬픔과 반가움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빈소로 향했다. 민준의 영정사진이 흰 국화꽃 사이에 놓여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서 봤던 사진과 닮아 있었다. 나는 그 사진을 한참 바라보았다. 무언가 올라올 줄 알았다. 하지만 끝내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사진이었다. 아무 일도, 아무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다.

민준의 어머니는 조문객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있었다. 민준 어머니는 나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바쁠 텐데 와줘서 고맙다. 민준이도 기뻐할 거야.”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준이 힘들다고 말했을 때, 더 진지하게 듣지 못했고, 더 다정하게 반응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가슴을 때려야만 했다. 그런데 역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이 아니라 손끝에서 느껴지는 건 단 하나, 민준 어머니의 손이 너무 차갑다는 사실뿐이었다.

나는 준비해 온 위로의 말을 건넸다. 좋은 곳에서 편히 쉬고 있을 거라고, 너무 상심하지 마시라고. 그러나 나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 말들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한 문장 한 문장이 공기를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가벼웠고, 그 안에는 어떤 체온도 담기지 않았다.

장례를 마친 뒤, 동창들과 근처 카페에 들렀다. 모두가 민준과의 추억을 꺼냈다. 고등학교 시절의 에피소드, 함께 웃었던 일들, 민준의 장난기 어린 말투까지. 그러고는 모두가 한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표정도, 말투도 조절했다. 슬픔을 흉내 내고, 충격을 흉내 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내내, 나는 내가 무대 위에서 혼자 연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사람은 진짜였고, 나만 가짜였다.

밤늦게 모텔로 돌아와 하루를 복기했다. 민준의 영정사진, 어머니의 눈물, 동창들의 진심 어린 애도까지. 모든 것은 진짜였다. 오직 나만이 가짜였다. 모두가 슬퍼하는 이 자리에, 나만 아무 감정 없이 서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친구의 죽음 앞에서 뭔가를 느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왜 나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걸까.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 너머로 조용한 거리와 멀리 흩어진 불빛들, 희미하게 빛나는 간판이 보였다. 예쁜 풍경이었다. 정갈하고 고요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감동은 없었다. 경외심도, 따뜻함도, 마음을 흔드는 그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다.

슬픈 것도, 아름다운 것도, 소중한 것도 이제는 모두 같은 결로 다가왔다. 마치 필터가 씌워진 것처럼. 세상이 멀쩡한 척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나도 멀쩡한 척 그 안에 끼어 있었다. 그게 연기인지 현실인지조차 헷갈리는 밤이었다.

발인식 날, 민준의 관이 영구차에 실리고, 상주들과 조문객들이 그 뒤를 따라 화장터로 향했다. 나도 다른 동창들과 함께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은 고요했고, 누군가의 흐느낌만이 간헐적으로 들릴 뿐이었다. 모두가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나는 창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이 모든 과정이 언제쯤 끝날지를 계산하고 있었다.

화장터에 도착했을 때, 민준의 어머니는 관 앞에서 오열하고 있었다. “아들아, 아들아” 하고 부르며 관을 어루만지는 모습은 너무도 처절했다. 주변 조문객들도 대부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그 눈물 속에는 절망과 분노, 끝나지 않을 슬픔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나도 무언가를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슬픔이든, 연민이든, 안타까움이든.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저 한 여인이 울고 있는 장면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내게 물었다. 민준과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언제였느냐고. 나는 한 달 전이라고 답했고, 그때 민준이 조금 힘들다고 말했던 이야기도 덧붙였다. 친구들은 그게 어떤 징후였던 건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냥 일상적인 하소연 정도로만 여겼고,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정말 몰랐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정말 몰랐던 걸까. 단순한 하소연이라고만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던 걸까. 복잡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누군가의 감정을 짊어지고 싶지 않아서, 애써 외면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 질문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화장이 끝나고 유골을 수습하는 시간이 되었다. 민준의 아버지와 형이 조심스럽게 뼛가루를 항아리에 담았다. 민준의 어머니는 그 모습을 보며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정말로 아들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듯 보였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죽음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 역시 가슴에서가 아닌, 머리로만 이루어지는 사고였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조문객들은 하나둘씩 장례식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나도 동창들과 함께 버스에 올랐다. 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더 조용했다. 모두가 지쳐 있었다. 나 역시 피곤했다. 하지만 그 피로는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긴 시간 동안 감정을 흉내 내는 연기를 했기 때문에 쌓인 피로였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지난 이틀 동안의 일들을 정리해 보았다. 민준의 죽음, 장례식, 오랜만에 마주한 동창들. 모든 장면이 마치 스크린 속에 흐르는 영화처럼 느껴졌다. 내가 실제로 겪은 일이 아니라, 배우가 되어 하나의 장면을 연기한 후 현실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버스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에게는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 왜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할 수 없는 걸까. 왜 친구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원래부터 그랬던 걸까, 아니면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변해버린 걸까.

집에 도착한 뒤 거울을 바라보았다. 장례식장을 다녀온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친구를 떠나보낸 얼굴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직장인의 얼굴이었다. 슬픔도 없고, 무너짐도 없었다. 너무 멀쩡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마주한 나는, 내가 마치 배경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감정도, 과거도, 관계도 모두 희미해졌다. 실체를 잃어버린 사람. 그저 ‘존재’만 하고 있는, 내용 없는 껍질 같은 사람. 어떤 말도, 어떤 위로도 그 껍질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단지, 그 껍질 안에 머물러 있었다.

keyword
이전 06화그때부터 어긋났던 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