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과 헤어진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이상하게도 내 일상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같은 시간에 일어났고, 같은 지하철을 탔고, 같은 업무를 반복했다. 마치 도윤이라는 사람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그 사실이 오히려 더 씁쓸하게 느껴졌다.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간단히 지워질 수 있다니······
아침에 거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별일 아니야.”
그 말을 반복하면 정말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아니, 최소한 괜찮은 사람처럼 보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말을 되풀이할수록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마치 나조차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회사에서는 아무도 내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며칠 전 실수를 연달아 저질렀을 땐 잠시 조심스러운 기류가 돌았지만, 그마저도 금세 사라졌다. 나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사람처럼 보였다. 밝게 웃으며 인사했고, 성실히 업무에 임했고, 명랑한 목소리로 대화에 응했다. 겉으로 보기엔 모든 게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연기였다. 이전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치밀한 연기였다. 실수 이후, 나는 더 철저하게 감정을 숨기기 시작했다. 흔들림이 들키지 않도록, 속내가 새어 나오지 않도록 조심했다. 마치 프로그램된 로봇처럼, 계산된 표정과 말투만을 반복했다.
동료들과 함께하는 점심 식탁 위에는 가벼운 이야기들이 흘러넘쳤다. 누군가는 주말 계획을 이야기했고, 누군가는 연인과의 데이트를 자랑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가족 모임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웃으며 풀어놓았다. 사람들은 자기 삶을 자연스럽게 꺼내놓고 있었고, 나도 그 흐름에 맞춰 적당한 웃음을 보냈다.
그러던 중 누군가 내게 물었다.
“요즘 어때? 남자 친구는 잘 지내? 주말엔 뭐 해?”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잘 지내고 있다고, 바쁘지만 충실하다고, 특별한 일은 없다고. 진심은 하나도 담기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내 대답에 아무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깨달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 어쩌면 수백 번씩 거짓말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괜찮다.’
‘별일 없다.’
‘행복하다.’
그 말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진실은 점점 안으로 숨었고, 겉으로 드러나는 건 연기뿐이었다.
오후에 혼자 커피를 마시러 나갔다. 카페 창가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왜 이렇게 거짓말이 익숙해졌을까. 언제부터 진실보다 거짓이 더 편해졌을까. 어릴 적에는 뭐든 솔직하게 말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곰곰이 떠올려보니, 거짓말은 효율적이었다. ‘괜찮아’라고 말하면 상대도 편하고, 나도 편했다.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었고, 위로나 공감도 필요 없었다. 문제를 마주하지 않아도 되었고, 단 한 마디로 모든 상황을 덮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자주, 그리고 점점 더 자주 사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쌓인 거짓말들 속에서 나는 진짜 감정을 잃어버렸다. 내가 정말 괜찮은 건지 아닌 건지조차 헷갈렸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흐려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하는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그저 훈련된 반응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때 스마트폰에 메시지 알림이 떴다. 은채였다. 며칠 전 만났을 때 내가 안 좋아 보였다며, 괜찮은지 궁금하다고 물었다. 은채는 참 따뜻한 친구였다. 하지만 그런 은채에게도 나는 진심을 말할 수 없었다.
‘괜찮아. 그날은 좀 피곤했어. 지금은 잘 지내고 있어.’
또 하나의 거짓말을 보냈다. 그래도 그 말이 은채를 안심시킬 거라고 믿었다.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 나는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았다. 몇 번이나 거짓말을 했을까.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런데 그 모든 거짓말은 타인을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말들이었다.
‘나는 괜찮다’라는 말은 듣는 이를 안심시키면서도 동시에 나를 달래는 주문이었다. 계속해서 그 말을 반복하면, 정말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아니면, 적어도 괜찮지 않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효과는 늘 잠깐뿐이었다. 금방 꺼지는 불빛처럼, 그 위안은 오래가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일도 오늘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언제까지 자신에게 거짓말을 반복해야 할까.
‘나는 괜찮다.’
그 주문을 도대체 언제까지 외워야 할까.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그 말 없이 하루를 버틴다는 건 더 두려운 일이었다. 진실과 마주하는 건 너무 벅찼다. 내가 괜찮지 않다는 것, 이미 많은 것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차라리 외면하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거짓말을 택했다.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오직 나 자신을 위한 거짓말을.
며칠 뒤, 은채를 만났다. 그녀가 자꾸 걱정된다는 메시지를 보내왔고, 더는 피할 수 없었다. 만나기 전, 나는 여러 번 연습을 반복했다. 밝은 표정, 자연스러운 미소, 경쾌한 목소리 톤까지 하나하나 점검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완벽한 연기를 위해 필요한 준비였다.
은채는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멀리서 나를 보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고, 곧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살폈다. 심리상담사로서의 습관이기도 했겠지만, 나는 그 시선이 불편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주문을 마친 뒤, 은채가 먼저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 내담자가 늘어 바쁘고, 까다로운 사례들이 많아 고생이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나를 관찰하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눈빛에 또다시 감정이 들키는 건 아닐까,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결국 은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즘은 좀 어떠냐고, 지난번보다 나아 보여서 다행이라고도 했다. 나는 준비해 둔 대답을 꺼냈다. 그때는 일이 조금 복잡했지만, 이제는 다 정리되었다고, 그리고 모든 게 괜찮다고 말했다. 목소리에 확신을 실으려 애썼지만, 은채의 표정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그러다 도윤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도윤과는 헤어졌다고 말했다. 서로 자연스럽게 끝났고,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덧붙였다. 은채는 놀란 듯한 얼굴로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마음의 정리는 끝났고, 슬프지도, 힘들지도 않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말하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듯 공허했다. 내가 하는 말이 너무 가볍게 흘러나오자, 나 자신조차 믿지 못할 정도였다.
은채는 정말 괜찮은 게 맞느냐고 되물었다. 힘들면 언제든 이야기하라고, 자신은 준비가 되어있다고 했다. 고마웠다.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나는 또다시 괜찮다고 대답했다. 오히려 홀가분하다고, 이제는 내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어 좋다고 덧붙였다. 은채는 한층 더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혹시 도윤이 무슨 잘못을 한 건 아니냐고, 내가 더는 혼자서 견디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이 점점 더 지쳐갔다. 은채의 시선, 말투, 표정까지 모든 게 부담스러웠다. 선의라는 건 알았지만, 나에게는 그 모든 것이 일종의 고문처럼 느껴졌다. 진실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가장 고통스러웠다. 동시에 거짓말을 이어가는 일 역시 너무나 피곤했다.
은채는 전문가답게 조언을 시작했다. 이별 후의 감정 단계를 설명했고, 부정과 분노, 타협과 수용의 과정을 천천히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말들은 내게 공허하게만 들렸다. 그건 은채가 틀려서가 아니라, 내가 진짜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상황은 그녀가 아는 것과는 전혀 달랐고, 그렇기에 그 조언들은 나와 닿을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척했지만, 마음속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은채조차 내 진심을 모른다는 사실이 외로웠다. 가장 오래된 친구이자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끝내 진실을 나누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나 스스로조차 그 진실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은채는 마지막까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정말 힘들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혼자서 끙끙 앓지 말라고 했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녀에게 연락할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어지기 전, 은채는 나를 안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포옹이었다. 진심이 담긴 위로였지만, 나는 그 온기를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마치 두꺼운 유리 벽을 사이에 두고 건네받는 감촉 같았다. 그리고 그 유리 벽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 쌓아 올린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오늘의 만남을 곱씹었다. 은채는 정말 좋은 친구였다. 진심으로 걱정했고, 도와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그 호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진실을 말하지 않는 이상, 진짜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진실을 말하지 못했던 걸까. 부끄러워서일까. 약해 보일까 봐서? 아니면 은채가 실망할까 봐서? 어쩌면 그 모든 이유가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정작 나 자신조차 그 '진실'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괜찮다.’
이 말을 너무 자주 반복한 나머지, 이제는 그것이 진심인지 거짓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정말 괜찮은 건지, 괜찮다고 믿고 싶은 건지, 아니면 괜찮아야만 하는 건지, 모든 것이 뒤섞여 있었다.
은채를 만난 지 열흘이 지났지만, 그날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의 걱정스러운 표정, 의심스러운 눈빛, 마지막 포옹의 따뜻한 온기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모든 순간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지만, 오직 나만이 거짓이었다. 그 사실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무겁게 마음을 짓눌렀다. 친구 앞에서도 진실할 수 없다는 현실이, 생각보다 훨씬 외로운 일이었다.
며칠 전, 회사 화장실에서 동료 두 명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요즘 내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말했다. 유난히 밝고 억지스러워 보인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스트레스가 쌓인 걸지도 모르니, 잠시 쉬게 해주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안간힘을 다해 감춰온 연기가, 오히려 타인에게는 어색하게 비쳤다니······ 완벽하다고 믿었던 나의 연기가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건 예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나는 그제야 자연스러움이란 건 노력만으로 만들어지는 감각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날 밤, 나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보았다. 과연 정말 과했던 걸까. 웃음이 지나치게 밝았던 건 아닐까. 말투가 필요 이상으로 자신감에 차 있었던 건 아닐까. 행동이 유난히 적극적으로 보였던 건 아니었을까. 하나하나가 의심스러워졌다.
어떻게 해야 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타인의 눈에 ‘정상’처럼 비칠 수 있을까. 나는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문득, '정상'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전의 내가 정상일까. 지금의 내가 정상일까. 아니면, 두 모습 모두 어딘가 비정상인 걸까. 기준을 잃은 지금, 나는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그리고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할 자신이 없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또 다른 형태의 연기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자연스러워 보이기 위한’ 연기였다. 지나치게 밝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침잠하지도 않는 중간쯤의 태도를 유지하려 애썼다. 말할 때도, 행동할 때도, 심지어 표정을 지을 때조차 모든 것을 ‘적당함’에 맞췄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애쓴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부자연스러웠다. 연기를 하지 않기 위해 또 다른 연기를 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렇게 모든 것이 서로 충돌하며 모순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얼굴은 어떤 감정을 흉내 낸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며칠 후, 회사에서 정기 면담이 있었다. 상사가 조심스럽게 내 컨디션을 물었다. 필요하다면 휴가를 써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도 덧붙였다. 그의 말은 분명 배려였지만, 내게는 일종의 경고처럼 들렸다. 나는 곧장 대답했다. 아무 문제 없다고, 업무에도 집중하고 있으며 휴가도 필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상사의 눈빛은 끝내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가 내 말을 완전히 믿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면담을 마친 뒤,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나는 피곤함이 역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그늘이 눈가에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피곤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거울 속의 얼굴이 거짓말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거짓된 걸까. 몸은 분명 지쳤다고 말하고 있는데, 마음은 괜찮다고 말하고 있다. 어느 쪽의 말이 진실일까. 아니, 어쩌면 둘 다 거짓일지도 모른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나는 괜찮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위안을 얻으려 했다.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하지만 그 말을 되풀이할 때마다, 의심이 끼어들었다. 정말 괜찮은 걸까. ‘괜찮다’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잠든 후에도, 꿈속에서도 나는 누군가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끊임없이, 습관처럼, 아니 어쩌면 자신을 설득하듯 ‘괜찮다’라고 반복하고 있었다. 그 말은 꿈속에서도 끝없이 나를 따라다녔고, 끝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면서, 점점 감정적으로 무감각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슬픈 영화를 봐도 눈물이 흐르지 않았고, 기쁜 소식을 들어도 마음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모든 일은 그저 그런대로 흘러갔고, 감정의 결이 사라진 삶은 편편하고 밋밋하게 이어졌다. 마치 감정의 볼륨을 가장 낮은 수준까지 줄여놓은 듯한 기분이었다.
회사에서는 한 동료가 승진 소식을 전해왔다. 예전 같았으면 진심으로 축하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입술로만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표정도 말투도 이전과 다를 것 없이 자연스러웠지만, 내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동료가 보이는 기쁨의 크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과연 승진이라는 일이 저토록 기쁜 일일 수 있는지, 나는 그저 의문을 품었을 뿐이었다.
점심시간에 혼자 앉아 샐러드를 씹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서는 한 여자가 울고 있었고, 그녀의 친구는 조용히 등을 토닥이며 위로하고 있었다. 그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연인과 헤어진 듯했다.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사랑 때문에 저토록 울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다가왔다. 나 역시 도윤과 헤어졌지만,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그것은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단지, 나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그 감정 자체를 차단해 버렸는지도 몰랐다. ‘괜찮다’라는 주문은 어느새 모든 감정을 가로막는 두꺼운 벽이 되어있었다.
저녁이 되어 뉴스를 보다가, 나는 화재 사고 소식을 접했다. 가족을 잃은 피해자의 인터뷰가 화면에 나왔고, 평소 같았으면 마음이 무거워졌을 장면이었지만, 이번엔 어떤 감정도 일지 않았다. 화면 너머의 일은 그저 멀고 먼 타인의 이야기처럼 느껴졌고, 공감이라는 능력이 내 안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그 순간, 나 자신이 무서워졌다. 감정이 제거된 로봇처럼, 정해진 틀 속에서만 작동하는 기계처럼 느껴졌다. 거울을 보며 조용히 물었다. 지금 내 기분은 어떤지,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감정 없는 채로 살아가는 삶을 과연 ‘살아 있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시간이 더 흐르자, 나는 어느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감정이 사라진 삶에 익숙해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임을 체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감정 없는 삶을 하나의 새로운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이제 아무도 나를 걱정하지 않았다. 외적으로는 안정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실수 없이 업무를 처리했고, 침착하고 조용하게 하루를 보냈다. 감정이 없으니 실수할 여지도 줄어들었고, 당황하지 않았으며, 흥분하지도 않았다. 오직 기계처럼 업무에만 집중했다. 어떤 면에서는 이전보다 더 효율적인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니, 판단은 냉정했고 결정도 빨랐다. 동료들은 내가 성숙해졌다고 말했다. 한결 차분하고, 중심이 단단한 사람처럼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 성숙이 아니라는 것을. 이것이 안정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그저 포기의 다른 이름이었다. 나는 감정을 포기했고, 진심을 포기했으며, 결국 나 자신마저도 포기하고 있었다.
오후 무렵, 은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예상하지 못한 연락이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너 요즘 왜 그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은채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깊게 묻어있었다.
“문자 답장도 너무 짧고, 뭔가 좀······ 이상해.”
잠시 멈춘 그녀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무슨 일 있는 거야?”
나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진짜야. 요즘 좀 바빠서 그래. 답장이 짧았던 건 그냥 여유가 없어서지, 딱히 문제는 없어.”
내 목소리는 담담했고, 흔들림 없이 안정적이었다.
은채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알겠어.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믿을게.”
그 말끝에 묻어나는 안도의 기색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 정도 안심한 듯 보였다. 그러나 전화를 끊고 난 뒤, 내 마음 한편에는 묘한 감정이 남았다. 내가 또다시 은채를 속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죄책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감정이 사라진 나는, 죄책감조차 느낄 수 없었다. 다만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만 인지할 뿐이었다.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온 나는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조용히 스스로에게 말했다. 오늘도 괜찮았다고, 아무 문제 없었다고, 무사히 하루를 보냈다고. 그러나 그 말에는 이제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매일 반복되는 형식적인 의식처럼, 몸에 밴 습관처럼 흘러나오는 말이 되었다.
‘나는 괜찮다’라는 말을 되뇌던 나는 어느 순간 이상한 깨달음에 닿았다. 그동안 수없이 반복해 왔던 그 말이, 이제는 더 이상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감정이라는 것이 사라진 지금, 나는 정말로 괜찮은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마음이 아프지 않았고, 슬픔이 밀려오지도 않았으며, 무언가를 감당하기 버거운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감정 없는 고요함 속에서 나는 완전히 잠긴 듯한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상태가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 평온이 진짜 ‘괜찮음’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나는 살아 있었지만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고, 존재하면서도 존재하는 것 같지 않았다. 과연 이것이 내가 바라던 ‘괜찮음’이었을까.
결국 나만을 위한 거짓말로 만들어낸 감정의 감옥 안에 나 자신을 가두고 말았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나를 상처 입힐 수 없었고, 어떤 일도 내 마음을 흔들 수 없었다. 철저히 안전하고, 완벽하게 통제된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감정을 버린 대가로 얻어진 장소였고, 고요한 만큼이나 생기 없고, 마치 숨을 멈춘 무덤과도 같은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