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 나는 도윤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오늘처럼 버거운 날엔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위로받고 싶었다. 평소 같았으면 조용히 혼자 견뎠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손에 쥔 스마트폰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몇 번이나 통화 버튼 위를 맴돌았지만, 결국 걸지 못했다. 도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회사에서 실수를 반복했어!’, ‘오늘 하루가 엉망이었어!’— 그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윤 앞에서 나는 언제나 ‘괜찮은 사람’, ‘능력 있는 사람’으로 존재해 왔다. 그 이미지가 무너지는 순간, 우리 관계까지 흔들릴까 봐 두려웠다.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었다. 어둡고 조용한 공간이 나를 맞았다. 평소에는 이 고요함이 오히려 안도감을 줬다. 하루 종일 타인의 시선을 견디며 연기하던 내가 마침내 진짜 내 모습으로 돌아오는 공간이라 여겨왔으니까. 그런데 오늘의 정적은 이상하리만치 무겁고, 낯설었다. 숨조차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불을 켜고 가방을 소파 위에 던졌다. 평소 같으면 조용히 벗어 두었을 텐데, 오늘은 그럴 여유도 마음도 없었다.
거울 앞에 섰다. 아침에 꼼꼼히 다듬었던 화장은 번져 있었고, 얼굴엔 피로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표정은 굳어 있었고, 눈빛은 깊이 침잠해 있었다. 세수하며 오늘 하루를 천천히 되짚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땐 평범한 하루일 줄 알았다. 하지만 어딘가부터 모든 게 어긋났다. 그 시작이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어느 순간부터 실타래처럼 풀려나간 것들이, 결국에는 손쓸 수 없는 덩어리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지만,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어깨와 목은 여전히 단단히 굳어 있었다. 마음의 경직이 그대로 몸으로 이어진 것 같았다. 평소 같으면 샤워 후에 한결 개운해졌을 테지만, 오늘은 물의 온기조차 위로가 되지 않았다.
잠자리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도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하루 어땠어? 시간 되면 얼굴 보자.’
가볍고 일상적인 말투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범한 인사처럼 쓴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문장 안에 오늘 하루의 무너짐과 외로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또 하나의 연기였다. 연인에게조차 진짜 마음을 보여줄 수 없다는 사실이, 유난히 쓸쓸하게 느껴졌다.
도윤의 답장은 한참 후에 도착했다.
‘오늘 회사 일이 늦어졌어. 내일 저녁에 보자.’
평소 같았으면 웃으며 이해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바쁜 날은 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실망스러웠다. 이럴 때일수록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고 그 바람을 표현할 용기는 없었다. 괜히 투정처럼 들릴까 봐, 약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그래서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혼자 술을 마시는 건 거의 처음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 그냥 뭔가가 필요했다.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들을 멈추고 싶었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가 낯설었다. 멀리서 울리는 녹음된 소리처럼 허공에 맴돌 뿐이었다. 그 화면 속 세계는 나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듯했다.
채널을 돌려봤지만, 어느 장면도 내 마음을 붙잡지 못했다. 드라마는 공허했고, 뉴스는 지루하게 흘렀다. 결국 리모컨을 내려두고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정적이 다시 거실을 채웠다. 나는 또 혼자였다.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봤다. 도윤에게서 온 추가 메시지는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서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평소 같으면 이 고요한 밤이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줬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외로웠다.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 모순이 나를 더 지치게 했다.
침대로 몸을 옮겼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눈을 감자, 오늘 하루의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회의에서의 당황, 미팅에서의 실패, 동료들의 시선. 그 모든 순간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기억은 흐르지 않고, 같은 장면을 반복했다. 마치 고장 난 영상처럼, 같은 장면이 멈추지 않고 되돌아왔다.
도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우리는 정말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각자가 만들어낸 이미지에 사랑을 걸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항상 도윤 앞에서 밝고 단단한 사람이어야 했다. 힘들어도 괜찮다고 했고, 문제가 생겨도 혼자 해결한다고 말했다. 어느새 그것이 습관이 되었고, 지금은 그 연기를 걷어낼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도윤은 진짜 나를 알고는 있는 걸까? 오늘 같은 날의 나를, 무너지고 흔들리고 두려움에 잠 못 이루는 이현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니면, 그런 모습을 보게 된다면 실망하게 될까. 그런 질문들이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았다.
사랑이라는 것도, 결국 또 하나의 무대 위 연기처럼 느껴졌다.
다음 날 저녁, 도윤과 만나기로 한 카페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평소 같았으면 약속 시간에 맞춰 나섰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서둘러 나오고 말았다. 회사에서 일하는 내내 어제의 일들이 자꾸 떠올라 견디기 힘들었고, 동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 역시 조심스러워져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모두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고, 뚜렷한 목적이 있어 보였다. 그 모습들이 괜히 부러웠다.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무엇을 하고 있는 사람일까. 그런 의문이 자꾸만 맴돌았다.
도윤은 약속 시간보다 20분쯤 늦게 도착했다. 평소보다 더 지쳐 보였다. 머리는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셔츠도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나를 보자마자 늘 하던 익숙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분명 익숙했지만, 이상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억지로 그려낸 웃음처럼 보였다.
자리에 앉은 도윤은 미안하다며, 회사 일이 길어졌고 오늘 하루가 유난히 피곤했다고 말했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서운함이 남았다. 어제 그렇게 무너져 있던 하루를 보냈는데, 도윤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커피를 주문하고 대화를 이어갔다. 평소처럼 일상적인 이야기들뿐이었다. 날씨, 회사 일, 주말 계획. 모든 말이 겉돌았다. 나는 어제 있었던 일을 꺼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리고 도윤이 과연 그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도윤은 자신의 회사 이야기를 길게 이어갔다.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야근이 많을 것 같고, 팀장이 까다롭다는 불만도 덧붙였다. 평소보다 훨씬 말이 많았다. 그런데 그 말들이 어딘가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무언가를 감추려고 일부러 말을 중언부언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느낌이 자꾸만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나는 도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눈빛이 달라 보였다. 어딘가 불안하거나, 조급하거나 했다. 예전처럼 단단하고 여유롭던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이 모든 게 내 예민함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면서도,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잠시 후, 도윤이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스마트폰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원래 같았으면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화면이 잠깐 켜졌고, 그 짧은 찰나에 메시지 일부가 보였다.
발신자는 ‘수진’이라는 이름이었다. 낯선 이름이었다. 메시지 내용은 온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앞부분은 또렷했다.
“어제 정말 좋았어…… 다음에 또……”
그 문장만으로도 마음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수진은 누구일까. 회사 동료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사람일까. 도윤이 그 이름을 언급한 적이 있었는지 곰곰이 떠올려봤지만, 아무런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메시지, 단순한 일일까. 아니면 감춰야 할 무언가가 있었던 걸까.
도윤은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전과 다름없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지만, 내 눈에는 그 웃음이 달라 보였다.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스마트폰을 확인하지 않았다.
나는 ‘수진’이라는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엿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면, 쓸데없는 의심으로 도윤을 상처 입히는 셈이 될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의심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도윤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릿속은 다른 데로 가 있었다. 그 짧은 메시지의 문장, 그리고 ‘수진’이라는 이름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금세 잊을 수 있었을 일인데, 오늘은 모든 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도윤이 시계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한다며, 오늘은 이쯤에서 헤어지자고 했다. 평범한 말이었지만, 그 말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혹시 다른 약속이라도 있는 걸까.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건 아닐까. 마음속 어딘가에서 의심이 솟아올랐다.
헤어질 때, 도윤은 내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하지만 그 키스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너무 짧았고, 마치 정해진 절차처럼, 의무적으로 건네는 인사 같았다. 진심이 실리지 않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 감정을 분명히 느꼈다. 그런데도, 이건 내가 불안해서 그렇게 받아들인 것일지도 모른다고, 나 자신을 설득하려 애썼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머릿속은 온통 메시지 생각뿐이었다. 수진은 누구인지, 도윤과 무슨 관계인지, 그리고 왜 그는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는지. 모든 게 수상하게 느껴졌다. 의심은 마치 덩굴처럼 생각을 휘감았고, 물음표는 점점 커져만 갔다.
집에 도착해서도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도윤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무언가가 있다면? 반대로 아무 일도 아니라면? 어느 쪽이든, 나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일로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도윤을 믿었고, 우리 사이도 단단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니까, 결국 타인에 대한 신뢰도 함께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났지만 ‘수진’이라는 이름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일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잠들기 직전에도 불쑥불쑥 떠올랐다. 나는 문득, 내가 이렇게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나 스스로 되묻게 되었다. 늘 질투나 의심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라고 믿어왔는데, 지금은 모든 장면이 자꾸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도윤과의 연락도 예전과는 달랐다. 답장은 늦어졌고, 통화는 짧아졌으며, 만나는 횟수도 눈에 띄게 줄었다. 도윤은 계속 바쁘다고 말했다. 새로운 프로젝트 탓에 야근이 잦고, 주말에도 출근해야 한다고 했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말들을 믿고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하나같이 핑계처럼 들렸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도윤에게 예고 없이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평소 같았으면 약속을 잡고 만났겠지만, 그날은 그냥 보고 싶었다. 치킨을 사 들고 도윤의 원룸으로 향했다. 겉으로는 야근에 지친 그에게 맛있는 걸 사다 주자는 핑계였지만, 사실은 내 눈으로 그가 정말 혼자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도윤의 집 앞에 도착해 벨을 눌렀다. 한참이 지나서야 문이 열렸다. 도윤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예전 같았으면 환하게 반겨줬을 텐데, 오늘은 당황이 먼저 묻어났다.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옷차림도 어딘가 대충이었다. 급히 무언가를 정리한 사람처럼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낯선 기운이 방 안에 흩어져 있었다. 그의 방은 평소처럼 정돈되어 있지 않았다. 소파 위엔 베개와 담요가 놓여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샴페인 잔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묻기도 전에 도윤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친구가 잠깐 들렀다가 갔어. 같이 샴페인 한잔했어.”
말투에는 익숙하던 여유가 없었다. 오히려 급히 변명을 꾸며낸 듯한 어색함이 묻어났다. 무엇보다도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샴페인 잔 하나에 선명히 찍힌 립스틱 자국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지 못한 척, 모르는 척했다. 입술 끝에 걸린 말이 끝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묻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치킨을 꺼내며 평소처럼 대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어색하게 흘렀다. 도윤은 자꾸 시계를 확인했고, 눈에 띄게 불편해했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찾아온 걸 기뻐했을 텐데, 오늘은 오히려 빨리 돌아가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 태도는 의심을 더 확신으로 바꾸었다.
대화 중간중간 도윤의 스마트폰이 계속 울렸다. 평소보다 알림이 잦았다. 그는 그때마다 화면을 뒤집거나, 아예 스마트폰을 테이블 아래로 치워버렸다. 예전엔 내 앞에서 거리낌 없이 메시지를 확인하곤 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모든 동작이 수상했고, 모든 침묵이 불편했다.
화장실에 가는 길, 무심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때 낯선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화장대에는 내가 쓰지 않는 브랜드의 화장품이 놓여 있었고, 침실 한쪽엔 여성용 머리끈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순간 멈춰 섰다.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이었다. 도윤에게는, 다른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분명 이 집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일 것이다. 아마도, 수진······
화장실 안에 서 있는 동안,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을 느껴야 할지조차 모르겠다는 게, 이상하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거실로 돌아왔지만, 나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도윤과의 대화는 허공에 흩어졌다. 그의 말은 들렸지만, 내용은 머릿속에 남지 않았다. 치킨을 씹는 입안은 무감각했고, 기계처럼 삼키는 동작만 반복됐다. 도윤은 평소보다 말을 많이 했다. 아마도 이 어색한 분위기를 지우고 싶었던 걸 것이다. 하지만 그 노력조차, 나에겐 의미 없이 느껴졌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이제 갈게.”
도윤은 조금 더 있다가 가라고 말했지만, 그 말에 진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과 동시에 스치듯 지나간 안도의 표정이 내 눈에는 선명히 들어왔다. 그 순간, 나는 모든 걸 확신했다. 그는 진심으로, 내가 떠나주길 바라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지하철 안에서 오늘 봤던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립스틱 자국이 남은 샴페인 잔, 화장대의 낯선 화장품, 침실의 머리끈까지······ 더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명백했고, 명확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슬픔도 몰려오지 않았다. 그저 허무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진실을 이제야 확인한 기분이었다. 아니, 어쩌면 마음속 어딘가에서 이미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도윤의 달라진 모습을 보며,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오늘은 단지, 그것을 직시한 하루였을 뿐이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잠을 깊이 이루지 못한 탓이었다. 밤새 도윤과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갔다. 처음 만났던 날, 첫 키스, 첫 여행. 그 모든 순간이 지금은 전혀 다른 빛깔로 보였다. 그때도 도윤은 나에게 연기를 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도대체 언제부터 변한 걸까.
거울을 들여다보니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눈 밑은 거뭇하게 꺼져 있었고,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화장으로는 감출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출근은 해야 했다. 사람들 앞에 서서 또다시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로 연기를 해야 했다.
사무실에 도착해 책상에 앉았지만, 일은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며칠 전 실수도 아직 수습되지 않았는데, 또 다른 충격이 목을 조여왔다. 모든 게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은채에게 연락했다. 오래된 친구이자, 심리상담사인 은채. 사실 그녀에게도 모든 걸 다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혼자서는 더는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카페에서 마주한 은채는 나를 보자마자 눈빛이 달라졌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도윤과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관계가 예전 같지 않고,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는 끝내 하지 못했다. 립스틱 자국이나 머리끈, 화장품 얘기를 꺼내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바보같이 속았다는 걸 가장 친한 친구 앞에서조차 말할 수 없었다.
은채는 말없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솔직함이야. 서로에게 진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해.”
그 말이 허망하게 들렸다. 정작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도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내가 먼저 솔직하지 못하면서, 누군가에게 솔직함을 바란다는 게 모순처럼 느껴졌다.
은채는 조심스럽게 조언을 건넸다. 도윤과 솔직하게 대화해보라고, 마음을 확인해 보라고. 하지만 나는 이미 확인할 만큼 충분히 확인했다. 그 방에 있었던 샴페인 잔, 화장품, 머리끈 그리고 도윤의 태도와 시선까지. 더는 대화할 이유도, 여유도, 용기도 이제 남아있지 않았다.
카페에서 나와 혼자 걷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조차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젠 누구 앞에서도 마음을 꺼내 보이기가 두려웠다. 사람들 앞에서 끝없이 연기를 해야 하는 삶이 점점 버거워지고 있었다. 과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저녁 무렵, 도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내일 저녁에 잠깐 볼 수 있을까.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이별 통보겠지. 아니면 또 다른 핑계를 대며 천천히 멀어지겠지. 그 어떤 말이든 상관없었다. 이미 내 마음은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그날 밤, 나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내일의 만남을 머릿속으로 수없이 시뮬레이션해 봤다. 도윤은 과연 솔직하게 이야기할까. 아니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거짓말을 이어갈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소리를 지를까.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담담히 받아들일까.
하지만 어떤 장면을 상상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결론은 늘 같았다. 이 관계는 끝날 것이고,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누군가 앞에서 완벽한 나를 연기하게 되겠지. 아무렇지도 않은 척, 괜찮은 사람인 척.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모든 게 허무했다. 사랑도, 관계도, 삶까지, 이 모든 것이 연기이고 거짓이라면, 진짜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진짜 ‘나’는 누구일까. 진짜 사랑은, 진짜 행복은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그런 것들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긴 하는 걸까.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카페에 도착했다. 이곳은 도윤이 자주 찾던 곳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밖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모두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지만, 나는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가 끝나면 무엇이 남는 걸까. 1년 반이라는 시간은 그렇게 사라지는 걸까.
도윤은 정각에 도착했다. 평소보다 단정한 옷차림이었다. 마치 중요한 미팅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표정도 진지했다.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지만, 어딘가 어색했다. 그 미소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이제는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리에 앉은 도윤은 커피를 주문했다. 평소 같았으면 내가 좋아하는 것도 함께 주문했을 텐데, 오늘은 자신의 것만 시켰다.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였다. 이미 마음이 떠났다는 조용한 신호처럼 느껴졌다.
도윤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망설이는 듯했다. 마침내 도윤이 입을 열었다. 요즘 자신이 많이 달라졌다고, 예전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관계에 대해서도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모든 말이 내가 이미 예측한 범위 안에 있었다. 나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화가 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연극을 보는 기분이었다. 도윤은 정해진 대사를 읊고 있었고, 나는 듣는 척하며 그 장면의 상대역을 수행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연기 같았다.
도윤은 말을 이어갔다. 서로에게 시간이 필요할 것 같고, 각자 길을 가는 편이 좋겠다고 했다. 끝내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남기려는 태도였다.
나는 입을 열었다. 수진이라는 사람에 관해 물었다. 도윤의 얼굴이 굳었다. 당황한 기색이 분명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는 회사 동료일 뿐이라고 말했다. 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라며, 왜 그런 걸 묻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끝까지 거짓말이었다. 도윤의 말에서는 단 한 줄도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정교하게 다듬어진 변명에 가까웠다.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도윤은 내가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정도 말이면 넘어갈 거라고, 그저 조심스러운 말투와 미안한 얼굴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들 속에는 책임도, 후회도, 진심도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굳이 묻는다고 해서 바뀔 건 없었다. 도윤이 스스로 진실을 털어놓을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혹여 무언가를 더 듣게 되더라도 상처만 더 깊어질 것이 분명했다. 이쯤에서 멈추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대신 나도 연기를 이어갔다. 도윤의 결정을 이해한다고 말했고, 서로에게 좋은 선택일 것 같다고 했다. 도윤은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순순히 받아들이는 걸 다행이라고 여기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좋은 친구로 남자는 말도 덧붙였다. 그 말들이 얼마나 공허한지, 도윤은 알지 못했다.
헤어질 때 도윤은 나를 안았다. 짧고 어색한 포옹이었다. 진심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형식적인 인사일 뿐이었다. 나도 받아들였지만, 감정은 없었다. 마치 낯선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느낌이었다.
도윤이 먼저 자리를 떴고, 나는 홀로 카페에 남았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1년 반의 관계는 그렇게 끝났다. 특별한 말도, 큰 감정도 없이 조용히, 무색하게 사라졌다.
집으로 향하는 길, 나는 지난 시간을 천천히 되짚었다. 도윤과 함께했던 장면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그런데 그 기억들조차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도윤의 웃음도, 다정한 말투도, 사랑한다던 고백도 모두가 가짜였던 것은 아닐까.
아마 수진과 있을 때의 도윤은 달랐을 것이다. 나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던 자연스러운 모습들을, 그녀에게는 거리낌 없이 드러냈겠지. 그렇다면 나와의 관계는 애초부터 진심이 아니었던 걸까.
하지만 나 역시 진실하지 못했다. 도윤 앞에서 진짜 나를 보여준 적이 있었을까. 힘들어도 괜찮은 척했고, 불안할 때도 당당한 척했다. 진짜 감정은 숨긴 채, 그가 좋아할 것 같은 모습만을 연기하며 살아왔다. 결국, 우리 둘 다 서로에게 진심을 꺼내놓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 걸까. 도윤의 바람은 분명 잘못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이 관계를 진실하게 만들지 못한 책임이 있었다. 둘 다 연기했고, 둘 다 진짜 사랑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도윤과의 사진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 속 셀카,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들, 웃고 있던 순간들. 그 모든 장면 속 우리는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들이 과연 진짜였을까. 아니면, 카메라 앞에서의 또 다른 연기였을까.
사진을 하나씩 지워나가면서, 나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했다. 더 이상 완벽한 연인을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마음을 놓이게 했다. 도윤 앞에서 밝고 긍정적인 사람으로만 살아야 한다는 부담도 이제는 없었다.
그런데 동시에, 허전함도 밀려왔다. 1년 반 동안 나는 무엇을 한 걸까. 그 시간은 낭비였을까. 아니면, 그 안에서 무언가 배운 것이 있었을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는 아직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진짜 관계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마지막 사진을 삭제하며 생각했다. 사랑했기 때문에 몰랐던 게 아니었다.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도윤의 진짜 모습도, 이 관계의 실상도. 나는 모든 신호를 외면했고, 모든 변화를 애써 무시했었다. 결국, 스스로에게 편안한 거짓말을 선택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