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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역설 03화

일상의 틈

by 은파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오전 6시 30분이었다. 고작 네 시간 정도 잔 것 같았다. 몸은 무거웠고, 머리는 묵직하게 울렸다. 그래도 일어나야 했다. 오늘도 ‘완벽한 하루’를 살아내야 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거울을 바라보았다. 부은 눈, 거칠어진 피부, 핏기 없는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 지금의 나였다. 하지만 한 시간 후면 이 얼굴은 전부 지워지고, 전혀 다른 사람처럼 다시 태어날 것이다.

샤워하며 오늘 일정을 정리해 보았다. 오전 9시 팀 회의, 11시 프로젝트 브리핑, 오후 2시 클라이언트 미팅, 4시 마케팅 전략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이어지는 일정이었다. 나는 각각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으로 연기해야 했다. 팀원들 앞에서는 든든한 동료로, 상사 앞에서는 유능한 직원으로, 클라이언트 앞에서는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보이도록 말이다.

화장으로 어젯밤의 불안을 덮어 보았다. 파운데이션으로 피로를 감추고, 컨실러로 눈 밑 그늘을 지웠으며, 블러셔로 생기를 얹었다. 마스카라를 바르며 거울 속의 나와 눈을 마주쳤다. 점점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더 밝고, 더 단단하고, 더 자신감 있어 보이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립스틱을 바르던 마지막 순간, 손이 살짝 떨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엔 없던 반응이었다. 다시 바르려고 했지만, 떨림은 가시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채 휴지로 가장자리를 정리했다. 거울 속 얼굴은 완벽해 보였지만, 낯설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면처럼 느껴졌다.

출근길 지하철 풍경은 늘 그랬듯 무채색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들, 스마트폰에 고개를 파묻은 사람들, 광고판 속 인위적인 웃음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사람도, 풍경도, 그리고 나 자신조차도 회색빛으로 번져 있었다.

회사에 도착해 평소처럼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조금 높아진 걸 느꼈다. 의식적으로 더 밝게 하려다 보니 오히려 어색한 톤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몇몇 동료가 나를 슬쩍 쳐다본 것 같았지만, 어쩌면 내 예민함일지도 몰랐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받은 편지함에는 수십 개의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하나씩 열어가며 각기 다른 어조로 답해야 했다. 상사에게는 정중하게, 동료에게는 친근하게, 후배에게는 따뜻하게. 나는 내 안의 여러 ‘버전’을 꺼내 그에 맞는 목소리를 선택했다.

첫 번째 메일은 어제 제출한 기획서에 대한 피드백이었다. 전반적으로는 좋지만 몇 가지 수정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별일 아니라 생각했을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말들이 내 능력을 의심하는 듯 들렸다.

답장을 썼다. 피드백에 감사하다는 말, 빠르게 수정하겠다는 말, 미처 꼼꼼히 검토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담았다. 다 쓰고 나니 사과의 말이 과하게 들어간 것 같았다. 다시 지우기에는 이미 손을 떠난 기분이었다. 그대로 ‘보내기’를 눌렀다.

두 번째 메일은 새로운 프로젝트 관련 자료 요청이었다. 제목 옆에 ‘긴급’이라는 표시가 붙어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처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 단어 하나가 유난히 크게 다가왔다. 모든 일이 급했고, 모두가 빠른 답을 원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살아온 걸까.

세 번째 메일을 열려던 순간, 팀장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9시 회의 전에 잠깐 이야기할 게 있어요.”

나는 습관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은 불편하게 출렁였다. 무슨 일이지? 어제 자료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뭔가 실수를 했던 건 아닐까?

팀장의 사무실로 가는 동안, 나는 어깨를 펴고 턱을 들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최대한 자신감 있는 얼굴을 연출하려 애썼다. 하지만 손바닥에서는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평소라면 이런 미팅은 익숙한 일이었지만, 오늘은 괜히 긴장되었다. 왜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행히 내용은 심각하지 않았다. 새로운 프로젝트에서 내 역할을 확대하겠다는 제안이었다. 더 많은 책임을 맡아달라는 말이었다. 보통이라면 기뻐했을 것이다. 인정받았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그 ‘책임’이라는 단어가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평소처럼 말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말은 막힘없이 나왔고, 표정도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자동으로 재생되는 대사처럼 느껴졌다. 내 진심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말들이었다. 속으로는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잘할 수 있을까. 실수하면 어쩌지······ 더 많은 눈이 나를 지켜보게 될 텐데, 나는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사무실을 나와 자리에 돌아오는 길, 동료들의 시선이 스쳤다. 아마 중요한 이야기를 나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자랑스럽게 느껴졌을 테지만, 오늘은 그런 시선마저 부담스러웠다. 모두가 나를 평가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자리에 앉아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큰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긴장되는 걸까. 평소처럼 침착하게 행동하고 싶은데, 오늘은 모든 게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시계를 보니 회의까지 10분이 남아있었다. 자료를 다시 점검하려 했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자꾸만 쓸데없는 생각들이 끼어들었다. 혹시 오타가 있진 않을까? 발표하다가 말을 버벅대면 어쩌지? 예상 밖의 질문이 나오면 대답을 못 할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속으로 수십 개의 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하나도 확신을 줄 수는 없었다.

회의실로 향하는 복도를 걷는 내내, 나는 점점 내 걸음걸이를 의식하게 되었다. 평소보다 빠른 것 같기도 했고, 오히려 느린 것 같기도 했다. 도무지 속도를 가늠할 수 없었다. 모든 동작이 어색하게 느껴졌고, 걸음 하나에도 집중할수록 더 부자연스러워졌다.

회의실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천천히 심호흡했다.

‘괜찮아. 별일 아니야. 평소처럼 하면 돼.’

속으로 암시를 반복한 뒤, 문을 열었다.

이미 몇몇 동료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평소처럼 밝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내 목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 것 같았다. 잠깐 회의실이 조용해진 듯한 착각도 들었다. 자리에 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평소처럼 각자 자료를 정리하고, 노트북을 켜고, 펜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그들의 시선이 나에게 머무는 것 같았다. 단순한 착각일 수도 있었지만, 그 느낌을 쉽게 떨칠 수 없었다.

팀장이 회의를 시작했다. 새로운 프로젝트 개요에 관해 설명이 이어졌다. 나는 집중하려 애썼지만, 자꾸만 조금 전 팀장실에서 나눈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더 많은 책임을 맡아달라는 말. 그것이 기회인지, 짐인지 알 수 없었다.

역할 분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내 차례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모든 시선이 나를 향했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상황인데, 오늘은 그 시선들이 숨을 막는 것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목이 말랐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준비해 온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 시작되자마자 뭔가 이상했다. 내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아졌고, 말의 속도도 빨랐다. 중간에 물을 마시려 컵을 들었는데, 손이 살짝 떨렸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나는 그 미세한 떨림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는데, 점점 이상한 감각이 스며들었다. 내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말은 분명 준비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그 말을 하는 나 자신이 낯설었다. 익숙했던 자신감의 톤은 없었고, 대신 불안과 조급함이 뒤섞인 목소리만 울렸다.

그때, 한 동료가 질문을 던졌다. 복잡한 질문은 아니었다. 평소 같았으면 곧바로 대답했을 내용이었다. 그런데 머릿속이 순식간에 새하얘졌다. 답을 알고 있었음에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단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지만, 내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결국 답변을 하긴 했다. 하지만 평소보다 훨씬 길어졌다. 확신이 없었고, 혹시나 빠뜨린 게 있을까 봐 여러 가능성을 덧붙이며 설명했다. 내 말은 장황해졌고, 핵심은 흐릿해졌다. 질문을 던졌던 동료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우물쭈물한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어딘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평소의 나답지 않은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더 불안해졌다.

회의는 계속되었지만, 더 이상 집중할 수 없었다. 자꾸만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게 되었다. 나를 이상하게 보고 있는 건 아닐까. 방금 실수한 걸 눈치챈 사람은 없을까.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회의 내용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때 팀장이 다시 내게 의견을 물었다. 그런데 나는 방금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 애썼지만, 얼굴 근육이 굳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침착한 척하며 무난한 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 답은 맥락과 어긋나 있었다.

팀장이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다른 동료가 나의 말을 부드럽게 정리하며 상황을 수습했다. 그제야 나는 얼마나 엉뚱한 대답을 했는지 깨달았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런 실수는 처음이었다.

남은 회의 시간 동안 흐트러진 분위기를 만회하려 애썼다. 더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더 정확한 말을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말과 행동은 더 어색해졌다. 평소의 자연스러움은 사라졌고, 억지스러운 의욕만이 떠올랐다. 마치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다가, 갑자기 대사를 잊은 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은 하나둘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나도 조용히 일어섰지만, 다리에 힘이 빠져 있었다. 고작 한 시간 반 남짓한 회의였는데, 마치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처럼 온몸이 지쳐 있었다. 예전엔 회의 후 오히려 에너지가 올라오곤 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완전히 소진된 느낌이었다.

자리에 돌아가려다 화장실로 방향을 틀었다. 거울을 보고 싶었다. 내가 정말 피곤해 보이는지, 어딘가 이상해 보이진 않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거울 속의 나는 분명 평소와 달랐다. 화장은 여전히 정돈되어 있었지만, 표정은 아니었다. 불안과 초조함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찬물로 손을 씻으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괜찮아. 별일 아니야. 그냥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일 뿐이야. 내일은 다시 괜찮아질 거야.’

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지만, 그 말들은 나를 안심시키기보다 오히려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말의 표면은 평온했지만, 그 밑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나는 책상에 앉아 업무에 집중하려 애썼다. 하지만 모니터 속 글자들이 자꾸만 흐릿하게 보였다. 눈이 피곤해서인지, 아니면 집중력이 떨어져서인지 무엇하나 분간할 수 없었다. 몇 번씩이나 같은 문장을 읽어야 비로소 내용이 머리에 들어왔다. 평소 같으면 금방 끝냈을 업무들이 오늘은 하나같이 버겁게 느껴졌다.

그때 옆자리 동료가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권했다. 평소 같았으면 기꺼이 따라나섰을 텐데, 오늘은 왠지 사람들과의 대화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또다시 이상한 모습을 보일까 봐 걱정되었고, 결국 바쁜 일이 있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동료는 아쉬운 얼굴로 혼자 나갔고, 혼자 남은 사무실은 오히려 더 답답하게 느껴졌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손가락은 평소보다 훨씬 경직되어 있었다. 간단한 이메일 하나를 작성하는 데도 평소보다 두 배는 넘게 시간이 걸렸다.

11시가 되어 새로운 프로젝트 브리핑에 참석해야 했다. 이번에는 타 부서 직원들과 임원진까지 함께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자료를 챙기며 나는 다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조금 전 팀 회의에서의 실수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대회의실로 향하기 전,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또다시 내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화장은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지만, 표정이 굳어 있었다.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았지만 자연스럽지 않았다. 평소에는 별생각 없이 지어졌던 표정들이 오늘은 하나같이 연기처럼 느껴졌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익숙한 얼굴도 있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도 제법 많았다. 나는 빈자리를 찾아 조심스럽게 앉았다.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려 했지만, 목소리가 이상하게 튀었다. 너무 높거나 낮았고, 내게 익숙한 말투가 나오질 않았다.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프로젝트의 규모는 생각보다 훨씬 컸고, 여러 부서가 협업해야 하는 복잡한 구조였다. 일정은 빠듯했고, 내가 맡게 될 역할도 예상보다 훨씬 무거웠다. 평소 같으면 도전 의식이 생겼겠지만, 오늘은 그저 압박으로만 다가왔다.

부서별 의견을 묻는 시간이 되었다. 내 부서 차례가 되자 팀장이 나를 지목했다. 마케팅 관점에서 의견을 말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모든 시선이 내게 쏠렸고, 평소 같았으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을 상황인데도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지만, 첫 문장부터 꼬이고 말았다. 머릿속에서 정리했던 말과 전혀 다른 내용이 입에서 나왔다. 당황한 나는 다시 정리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문장은 더욱 엉켜만 갔다. 논리적이고 명확하던 내 말솜씨는 온데간데없었다. 중언부언하는 내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임원 중 한 분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청했다. 준비는 되어있었지만, 말하는 도중 내용이 엉켜버렸다. 나 자신도 앞서 말한 내용과 모순되는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중간에야 깨달았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결국 잠시만 정리할 시간을 요청했다.

몇 초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 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길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상상만 해도 괴로웠다. 평소의 유능하고 믿음직한 내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나를 숨 막히게 했다.

다시 말은 이었지만 이미 분위기는 달라져 있었다. 나는 훨씬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해야 했고, 확신 있는 문장 대신 ‘아마도’, ‘그럴 수도’, ‘~일 것 같다’라는 표현을 반복했다. 평소의 내 단호한 말투는 어디에도 없었다.

브리핑이 끝나고 사람들이 회의실을 빠져나갈 때 몇몇이 내게 다가와 괜찮냐고 물었다. 평소보다 조금 다르게 보였다는 말도 들었다. 나는 감기 기운이 있어서 그렇다고 얼버무렸지만, 그 말이 얼마나 설득력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 손을 바라보았다.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특별히 몸이 아픈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 걸까. 스트레스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자리에 앉아 조금 전 상황을 다시 떠올렸다. 준비가 부족했던 건 아니었다.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도 있었고, 말하고 싶은 핵심도 명확했다. 그런데 발표만 시작하면 모든 것이 흐트러졌다.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동료들과 함께 식사하러 갔겠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또 이상한 모습을 보일까 봐 걱정되었다. 그렇다고 혼자 먹기엔 또 그게 부자연스러워 보일 것 같았다. 모든 선택이 부담스러웠다.

결국 점심 약속이 있다며 먼저 사무실을 나왔다. 사실 아무런 약속도 없었다.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 회사 근처의 조용한 카페에 들어가 샌드위치 하나를 주문했다. 하지만 식욕이 없었다. 몇 입 먹다가 포기했고, 남은 시간은 커피만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바쁜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그들도 분명 각자의 문제와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겠지만, 겉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나처럼 흔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혹시 나만 이렇게 무너져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오후 2시, 클라이언트 미팅을 앞두고 나는 다시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해서인지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해 보였다. 파우더를 덧발라보았지만, 피로의 흔적은 끝내 감춰지지 않았다. 립스틱을 다시 바르려던 순간, 손이 또다시 떨렸다. 이제는 그 떨림조차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이번 미팅의 클라이언트는 회사에서 손꼽히는 중요한 고객사였다. 몇 달째 이어지고 있는 프로젝트의 중간 점검 자리였고, 나에게는 실력을 입증할 기회였다. 평소 같았으면 오히려 이런 자리를 반겼을 것이다. 업무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 무대였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모든 것이 짐처럼 느껴졌다. 실수할까 봐, 이상하게 보일까 봐 걱정이 먼저 들었다.

미팅룸으로 향하는 길,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모든 내용은 정돈되어 있었고 논리도 탄탄했다. 하지만 그 ‘완벽함’조차 불안하게 다가왔다. 혹시 빠뜨린 건 없을까, 숫자 계산이 틀리지는 않았을까,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나왔을 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평소라면 떠올리지도 않았을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밀려들었다.

클라이언트가 도착했다. 낯선 얼굴 세 명이 회의실에 들어섰고, 그 순간 담당자들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챘다. 종종 있는 일이었고, 평소의 나라면 새로운 관계를 맺는 걸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신뢰를 다시 쌓아야 한다는 생각이 버겁게 느껴졌다.

회의가 시작되었고, 지금까지의 진행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첫 슬라이드부터 말이 꼬이기 시작했다. 분명 준비한 대로 말하고 있었는데도, 설명의 순서가 뒤섞이고 중복된 문장이 튀어나왔다. 중간에 멈춰 정리해 보려 했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더 어지러워졌다.

클라이언트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처음에는 이해하려 애쓰는 눈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한 기색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특히 팀장급으로 보이는 남자는 시계를 보며 노골적으로 짜증을 표현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내 불안은 두 배로 커졌다.

결국 나는 휴식 시간을 제안했다. 솔직히 말하면, 내게는 정리가 절실했다. 클라이언트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혼자 남아 자료를 다시 훑었다. 하지만 집중은 되지 않았다. 글자들이 흐릿하게 보였고, 머릿속은 텅 빈 백지처럼 느껴졌다.

미팅이 재개되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엉망이었다. 내 설명은 계속해서 중언부언으로 이어졌고, 질문에 대한 답변도 명확하지 못했다. 결국 클라이언트 팀장이 입을 열었다.

“오늘 미팅은 여기까지 하죠. 다음에 더 준비된 상태로 다시 만났으면 합니다.”

그의 말투에는 실망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정리했지만. 손도 마음도 모든 게 어긋나 있었다. 평소의 차분하고 체계적인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던 길, 복도에서 동료 한 명과 마주쳤다.

“미팅 어땠어?”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괜찮았어”라고 대답했지만, 동료의 표정은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좀 바빠서”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더 이상 아무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하루를 되짚었다. 아침 회의에서의 실수, 발표 중의 당황, 클라이언트 미팅의 실수. 모든 것이 연쇄적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익숙한, ‘완벽한 이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낯선 사람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4시가 다 되어있었다. 곧 마케팅 전략 회의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또 하나의 시험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토록 하루가 길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버거웠던 날도 없었다.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중심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마케팅 전략 회의를 10분 앞두고, 책상에 앉아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같은 문장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읽었지만, 그 의미가 잡히지 않았다. 마치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외국어로 쓰인 문서를 읽는 것 같았다. 익숙했던 마케팅 용어들조차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회의 시간이 가까워지자, 팀원들이 하나둘 회의실로 향했다. 나도 따라 일어서야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일어나는 단순한 동작조차 의식하지 않으면 할 수 없었다. 평소엔 무심하게 했던 모든 몸짓이 오늘따라 너무도 어색하고 불편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몇몇 동료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들은 분명 평소와 달랐다. 걱정, 호기심, 그리고 미묘한 거리감이 섞여 있었다. 아침부터 계속된 내 이상한 모습이 벌써 사무실 안에 퍼진 듯했다. 이런 이야기는 항상 빠르게 돌았다.

팀장이 회의를 시작했다. 새로운 마케팅 캠페인을 위한 아이디어 회의였다. 평소 같았으면 가장 활력을 느끼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서로의 생각을 부딪치며, 그 속에서 새로운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은 내게 자극이자 보람이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늘 그렇게 행동해 왔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모든 것이 버거웠고, 창의성은커녕 내 존재 자체가 무게처럼 느껴졌다.

첫 번째 발표자가 아이디어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집중하려 애썼지만, 발표자의 목소리는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다른 동료들이 질문을 주고받는 모습도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혼자 이방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두 번째 발표가 시작되자, 마음을 다잡고 메모라도 해보려 했다. 펜을 들었지만, 손이 떨렸다. 단순한 단어조차 제대로 적히지 않았다. 결국 펜을 내려놓고 말없이 듣기만 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소리를 귀에 쌓아두는 일조차 힘겨웠다.

팀장은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의견을 물었다. 내 차례가 점점 다가왔다. 심장이 빠르게, 그리고 점점 더 크게 요동쳤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이미 몇 가지 아이디어를 머릿속에 정리해 두었을 텐데, 지금은 텅 빈 백지 위에 선 기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들이 이상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입을 열려 했지만, 입안이 바싹 말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말을 꺼냈지만, 첫마디부터 떨리는 소리가 섞였다. 무언가 말은 했지만 문장 구조가 없었다. 앞서 들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새로운 관점도, 날카로운 분석도 없었다. 그저 빈 껍데기처럼 울리기만 했다.

팀장은 별다른 반응 없이 다음 사람에게 시선을 넘겼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동시에 깊은 초라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아무것도 이바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활기차고 의견이 넘쳤던 예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 자리에 돌아와 컴퓨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실감조차 나지 않았다. 아침엔 평범한 하루로 시작했다고 믿었는데, 모든 게 어디선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그 시작이 어디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지만, 아무도 내게 함께 가자고 말하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누군가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을 텐데, 오늘은 모두가 미묘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들 역시 내가 뭔가 힘든 상황에 부닥쳐 있다고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회사를 나서며 나는 문득, 내일이 두려워졌다. 오늘과 같은 하루가 또 반복될까 봐. 그리고 더 두려운 건, 이 모든 일이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들이, 단 하나의 작은 균열로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조용히 그리고 분명하게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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