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결국 남는 것
나는 1982년생이다. 계산해보니 43년을 살아왔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43년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 말이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저장된 모든 기억을 다 모아봤자 과연 10년치나 될까 싶다.
그렇다면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순간의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그때의 나는 존재했다고 볼 수 있는 건가? 유기체로서의 연결성은 육체를 통해 이어져 오고 있지만, '의식 속의 나'는 뚝뚝 끊겨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얼마 전 차란 란가나스가 쓴 『기억한다는 착각』이라는 책을 읽었다. 세부 내용이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핵심 메시지만큼은 명확했다. 잊는 것이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특별한 사건이라는 내용이었다. 뇌는 잊어버리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선택이라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하는데 특정한 것을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잊는 것이 기본인데 특정한 것을 기억하도록 선택하는 것이다.
이 내용을 읽었을 때 깊은 납득감을 느꼈다. '아, 그렇구나. 기억이 디폴트가 아니라 망각이 디폴트였던 거구나. 그래서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특정 순간만을 기억해두는 거였어.'
그러고 나니 나는 무엇을 기억해두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기에 일상과 다른 특별한 경험이라 하더라도, 내가 '의미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내 뇌는 기억해두지 않는다. 혹은 잠시 기억해두더라도 장기기억으로 옮기지 않고 지워버린다.
결국 어떤 것을 기억해 둘 지 선택하는 과정은 객관적이지 않고, 지극히 사적이다. 남이 보기에 매우 보람차고 특별한 일 투성이인 하루라 하더라도, 정작 당사자에게 별다른 의미 있는 게 아니라면 기억되지 않거나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내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렇다. 유년시절 집안이 화목하지 못했다. 부모님의 잦은 말다툼과 소란을 겪어야 했고, 그 당시 나는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가면서 유년시절의 그 힘든 기억들은 내가 일부러 소환하지 않으면 일상에서 튀어나와 나를 지배하진 않더라, 마치 없었던 일처럼. 물론 일부러 그 기억들을 불러오면 여전히 생생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결국, 내 의식은 그 기억들을 마치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의식 너머로 밀어넣어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것들은 대부분 강한 감정을 느꼈던 순간들이다. 기억은 강한 감정과 함께 저장되고, 거기에 내가 의미를 부여한 기억일수록 더욱 오래도록 남아있다.
하지만 아예 기억에 없는 것과 있지만 일부러 잘 꺼내지지 않게 해둔 것은 전혀 다르다. 일상적으로는 기억나지 않아도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다가 어떤 계기만 주어지면 순식간에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대부분은 감각적인 것들이다.
예를 들어 어릴 적 가지고 놀던 미미인형의 모습 같은 것은 평소에는 잊고 있다가도, 우연히 그 인형의 사진이나 옛 자료를 발견하면 '아!'하고 순식간에 알아보며 그 시절로 돌아간다. 어릴 적 맡았지만 40년 넘게 잊고 지내온 어떤 냄새 같은 것도 우연히 다시 그 냄새를 맡게 되는 순간이라도 오면 순식간에 그 순간으로 이동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 기억은 사라진 게 아니라 깊은 곳에 묻혀 있었던 것이겠지.
그런데 너무나 하찮아서 진짜로 영구 삭제된 순간들의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지워진 순간의 나는 더이상 존재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우리는 1분 1초 매 순간을 살아내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존속해왔다. 그런데 과거의 나는 43년치 모두가 기억나는 게 아니라 아주 일부분만 기억날 뿐이다. 진짜로 기억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그동안 살아온 시간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순간들. 그 순간의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상한 결론에 도달했다. 단순히 살아온 세월의 양으로 우리가 그 시간을 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각자가 기억해내는 만큼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닐까. 설사 두 사람이 똑같이 80년의 세월을 살았다 하더라도 기억된 시간의 양은 각자 다를 테니, 결국 존재한 시간의 양도 그만큼 다른 것 아닐까.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한다. 이것도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 의식이 특별히 기억하고 싶은 에피소드가 없는 일상들을 저장하지 않고 흘려보내기 때문에 시간이 순식간에 흐른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닐까. 그만큼 유의미한 사건이 내 일상에 더이상 많지 않다는 반증일터. 씁쓸하다.
기억에 대한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결국 남는 것은 '기억'뿐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기분 좋은 기억을 '추억'이라고 따로 부른다. 내 노년을 생각했을 때 추억할 것들이 많으면 좋을 것 같다. 특히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추억할 수 있는 기록을 많이 남겨놓으면 그래도 풍요로운 노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노년이 되어있을 때 가장 가지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몇 날 며칠을 떠올려도 계속해서 새록새록 기억나는 지난 추억들일 것 같다.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는 시간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기억을 쌓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기억하는 만큼 존재하는 것이라면 많은 기억 속에서 존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