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길, 혹은 '순리'라고 불리는 그것
40년을 살아오면서 내 인생에서 내가 의도하고 계획한 대로 이루어진 것이 얼마나 있을까. 손에 꼽을 정도다. 아니, 어쩌면 손가락 하나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사람들은 마치 인생이 의지와 생각으로 흘러갈 거라는 착각 속에서 산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 뜻대로, 내 계획대로 된 것은 아주 극소수였다.
지금의 나를 보면, 젊은 시절 꿈꾸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사회적 성공의 전형적인 궤도에서도 한참 벗어나 있다. 서울도 답답해 더 넓은 세상에서 살거라고 했던 내가 지방도시에 내려와 10년 넘게 살고 있고, 당연히 자식 둘은 낳고 살겠지라고 어릴적 상상하던 것과 다르게 자녀를 낳지 않기로 했고, 10대 때 그렇게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도 영어를 가르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던 내가 기업에 출강해서 영어 강의를 하고 있다. 현재 내 삶의 모습은 10대 혹은 20대 때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모습이다. 모든 것이 뜬금없게 느껴진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애초에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었던 적이 있기는 했을까. 태어나는 국가, 성별, 세대, 부모, 가정환경, 신체 조건.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다. 그냥 주어진 대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출발선이 절대적이기에, 그 이후 우리가 해볼 수 있는 여지는 생각보다 훨씬 적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 내 곁에 있는 존재들, 내가 하고 있는 일들. 이 모든 것이 과거의 내가 상상했던 40대의 내 삶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삶은 결국 내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어떤 정해진 루트를 따라 흐르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지을 수 없다. 이미 그려진 길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걸어가지만, 살아가는 당사자인 우리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으니 모든 게 자신의 의지로, 혹은 우연이 겹쳐 일어난다고 믿게 되는 것은 아닐까.
물론 확신할 수는 없다. 그저 어렴풋이 그런 것 같다고 느낄 뿐이다. 그 정해진 루트에 나는 예측하지 못한 불행이 다가올까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내면 깊은 곳에서는 나를 이끌어줄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도 있다. 그게 무엇인지 이름 붙일 수는 없지만, 내 삶에 대한 희미한 신뢰 같은 것.
지금의 삶이 실망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니까, 앞으로의 흐름을 믿고 싶다.
'잠시 웅크리고 있는 것일 뿐이야'라고. 동양의 음양 원리처럼, 웅크리는 시기가 있으면 도약하는 시기도 오는 법이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니까.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우리 사회에는 어떤 것들을 '적절한 시기'에 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다. 운전면허가 그중 하나다. 대부분 수능이 끝난 겨울 방학이나 20대 초반에 딴다. 그 시기를 놓치면 왠지 뒤처진 것 같고, 나중엔 아예 엄두가 안 나기도 한다. 나도 그랬다.수능 끝나고 우리집은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운전면허 학원비까지 부모님이 지원해주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서울 살면서 차가 없어도 대중교통 이용이 얼마든지 가능했고, 차를 살 형편도 아니었기에 굳이 딸 필요를 못 느낀 점도 있다. 그렇게 한참을 미루다가, 마흔이 되어서야 비로소 운전면허를 땄다.
객관적으로 보면 많이 늦은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에서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는 그때가 딱 맞는 시기였다.
그렇게 느끼는 데는 면허를 딴 이후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돌이켜보니 그렇다.
면허를 따고 차를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울진에 대형 산불이 났다. 불법 개 농장이 산불 피해를 입었고, 동물권 단체가 그곳의 100마리에 가까운 개들을 구조했다. 우리 부부도 동물권단체의 구조활동에 동참하고자 울진으로 수차례 자원봉사를 다녀왔고, 그중 국내 입양이 어려운 도사견 한 마리를 입양하기로 했다. 그 개를 받아들이려면 견사를 지어야 했다. 시골 땅까지 자재를 실어 나르고, 공사를 하고, 환경을 만들어야 했다. 차가 없었다면 우리 부부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80평 땅에 견사를 짓고 개농장에서 구출한 개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성공했다.
그해, 서울에 혼자 사시는 엄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한밤중이었다. 차로 4~5시간을 달려가야 하는 거리였다. 차가 없었다면 당장 달려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 밤 전화를 받자마자 차로 달려가 밤새 내내 엄마곁을 지킬 수 있어서 엄마는 다행히 지금도 건강히 계신다. 하지만 그 때 차가 없었다면 결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이 사건들말고도 면허를 따고 차를 사지 않았다면 결과가 달랐을 사건들은 더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니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다.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뭘 해도 안 된다다고. 순리대로 살면 삶이 더 부드럽게 흘러간다. 문제는 우리가 그 순리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욕망, 욕구, 생각을 중심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그 욕망, 욕구, 생각은 내 안에서 나왔다기보다 사실 외부 세상에 자극받아 생긴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것들 너머에 '더 깊은 목소리'가 있다. 그 메시지를 읽으려 하는 것이 바로 순리를 따르는 것이다. 순리를 따르면 삶이 훨씬 수월해지는 것 같다.
정해진 루트가 있다해도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설령 모든 게 정해진 대로 흘러간다 해도, 그 안을 살아가는 당사자인 우리는 계획하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안 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 다만,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손에서 놓는 것. 그것이 체념이 아니라 일종의 자유라는 걸, 이제는 안다.
즉, 우리는 매 순간 눈앞의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어떻게 다음으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다. 그런 부분에서 우리는 오히려 마음의 짐을 덜 수 있다.
사람들이 인생에서 자주하는 실수는 외부세상에 너무 집착한다는 데에 있다. 세상 사람들이 대체로 하는 것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의 순리와 어긋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다수가 어떤 시기에 무언가를 이루고, 그것이 정상이라고 여겨질 때, 그 궤도에서 벗어난 자신을 바라보며 '왜 나는'이라는 억울함에 사로잡히기 쉽다. 마치 내가 수능 끝난 겨울방학에 가정형편이 어려워 운전면허학원 등록은 생각도 못했던 그 당시 '왜 나는 남들 다 하는 걸 못하는거야?'라며 속상해하고 억울해 했다면 아니 잠깐은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살아가는 내내 그걸 한스러워했다면 어땠을까. 뭐 그런 감정이 올라오는 자체는 잠시 허용해도 괜찮지만, 그것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콤플렉스나 강박, 집착으로 키운다면 더 깊은 메시지 즉, 순리를 놓치게 된다. 순리를 놓치면 우리는 훨씬 더 멀게 가야할 길을 가게 되어있다. 삶이 어려워지는 순간이다.
형편이 안 되어 그 시기를 놓쳤더라도, 내 삶에는 적절한 때가 따로 있을 거라는 믿음. 그것이 순리를 읽는 시작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내가 품은 그 뜻이 진짜 내 내면에서 나온 뜻인지, 세상이 주입한 욕망인지 구분하는 게 중요하다. 그 구분이 '순리를 따르는 첫걸음'이다.
정해진 길을 간다는 것은 체념도, 포기도 아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집착을 내려놓고, 내 안의 더 깊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 뒤돌아봤을 때 '아,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납득하는 순간이 온다. 지금은 실망스럽고 뜬금없어 보여도, 이것 또한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받아들이게 되는 날이.
나는 그런 날을 믿으며 오늘도 눈앞의 일들을 한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내맡긴다.
그것이 내가 마흔을 지나가며 배우고있는, 삶을 조금은 더 수월하게 사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