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삶의 의미를 묻다
며칠 전 밤 산책을 하다가 죽을 뻔했다.
여느 때처럼 인도를 걷고 있었는데, 식당으로 주차하려던 트럭이 갑자기 후진했다. 1~2초 차이였다. 조금만 늦었어도 나는 트럭에 치여 쓰러졌을 것이고, 바퀴에 깔려 내장이 터져 죽었을지 모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계속 가던 걸음을 이어갔지만, 죽음이 내 바로 앞까지 왔다 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뉴스에는 사건과 사고로 죽은 이들의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는 매일 누군가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소비한다. SNS 피드를 스크롤하듯, 뉴스 헤드라인을 훑어보듯.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는데, 우리는 마치 죽음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트럭 사건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그런 순간이 있었어도 매 순간을 죽음만을 느끼며 살아갈 순 없으니, 일단 그 기억은 다시 뒤로 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득 생각한다. 죽음이란 내게 무엇인가.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죽음을 '이별'로 받아들여왔던 것 같다. 내가 죽든 누군가가 죽든, 그것은 이별이다. 설사 환생한다 해도 그 환생한 '나'는 지금의 '나'가 아니고, 다른 누군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이별은 진짜 이별이다. 그래서 죽음은 슬픔으로 각인되었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그것은 내가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들과의 이별이다.
죽음에 대해 인류는 오랫동안 답을 찾아왔다.
과학은 죽음을 '소멸'이라고 말한다. 뇌의 활동이 멈추면 의식도, 기억도, '나'라는 존재도 함께 사라진다. 컴퓨터의 전원이 꺼지면 화면이 검게 변하듯, 모든 것이 그저 끝난다. 스티븐 호킹은 "사후 세계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동화"라고 잘라 말했다.
플라톤은 죽음을 '해방'으로 보았다. 육체는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고, 죽음은 그 감옥에서 벗어나 진리의 세계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영혼은 육체가 사라져도 영원히 존재한다.
힌두교와 불교는 '윤회'를 말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영혼은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듯, 다음 생으로 넘어간다. 이번 생에서 쌓은 업보에 따라 다음 생의 모습이 결정된다. 하지만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더 좋은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이 끝없는 옷 갈아입기 자체에서 벗어나는 '해탈'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최후 심판'을 이야기한다. 죽음은 신 앞에서 심판받는 순간이고, 선한 삶을 산 이는 천국으로, 악한 삶을 산 이는 지옥으로 간다. 삶은 시험이고, 죽음은 그 결과를 받는 날이다.
고대 철학자들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집중했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은 우리와 상관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지금 당장 삶을 즐기라.
반대로 스토아학파는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고 말했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매일 아침 자신에게 "네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속삭였다. 죽음을 외면하지 말고 정면으로 받아들여야 비로소 제대로 살 수 있다.
이 모든 답들 앞에서 나는 불편함을 느낀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이분법은 너무 단순한 듯하다. 삶의 복잡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어찌 보면 조금은 유치한 발상처럼 느껴진다. 카르마에 따라 계급이 달라진다는 힌두교의 윤회 역시 마찬가지다. 징벌과 보상이라는 구조가 너무 명확하다.
그렇다고 소멸설이 전부라고 믿기도 어렵다, 우리는 컴퓨터가 아니지 않나?
나는 어릴 적부터 전생과 환생에 끌렸다. 하지만 내가 상상하는 윤회는 선악의 도덕적 판단과는 무관하다. 착하게 살았느냐, 못되게 살았느냐로 다음 생의 조건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며 뿌린 모든 씨앗의 결실(우리가 생성한 에너지)은 그냥 과학 원칙처럼 맺게 되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 생에 '나'라는 의식이 남아있을지는 모르겠다.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모든 게 다르게 태어나도 변하지 않는 '핵심'은 계속될 것 같다는 것이다. 그게 영혼인지 의식인지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죽음관은 내가 만나는 인연들을 다르게 보게 만든다. 지금까지 우연히 나타났던 인연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너와 나는 전생에 어떤 인연으로 어떤 사연과 관계에 얽혀 있었기에 이번에 이렇게 만났다가 또 헤어지는 걸까.'
물론 답을 찾지 못했다.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 영혼은 정말 존재하는지, 윤회는 실재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살아있는 자는 절대 죽은 후를 알 수 없다. 그래서 질문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어떤 죽음관을 갖든, 이별은 온다. 나의 죽음으로든, 타자의 죽음으로든, 지금 나와 연결된 모든 이들과의 이별은 반드시 온다. 트럭에 치일 뻔했던 그 순간처럼, 1~2초의 차이로 갑자기 올 수도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인연들을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다.
죽음이 무엇인지 몰라도, 이별이 슬프다는 것은 안다. 그래서 지금 여기, 함께 있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언젠가 올 이별 앞에서, 후회를 조금이라도 덜 하기 위해서.
며칠 전 트럭 사건의 기억은 다시 뒤로 밀려났다. 나는 여전히 죽음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쩌면, 그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어딘가에 남아, 나를 조금 다르게 살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