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_답이 없어도 괜찮은 이유
지난 10여 년, 나는 단 하나의 답을 찾으려 했다. 내게 딱 맞는 이상적인 직업. 그것만 찾으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았다.
SNS를 열면 누군가는 "가슴 뛰는 일을 하세요"라고 말했고, 미디어는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어디선가는 "요즘은 이 직업이 뜬다"는 정보가 쏟아졌다. 그 소음 속에서 나는 계속 물었다. 왜 나는 아직 그 답을 찾지 못했을까?
발버둥 쳤다. 이것저것 시도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시험지의 주관식 답처럼 딱 한 단어로 정의될 수 있는 답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애초에 그런 답은 없었던 게 아닐까.
직업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순간, 뭔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답을 찾으려 하지 않고, 그저 질문했다. 직업은 정체성인가, 생계 수단인가, 아니면 자아실현의 도구인가.
질문을 하니 보였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건 '직업'이라는 단어 하나로 정의될 수 없는 무언가였다는 것을. 나는 정답이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끊임없이 갈증을 느꼈다. 있지도 않은 오아시스를 찾아 사막을 헤매듯.
이 연재를 시작하고 14편의 글을 쓰는 동안, 나는 계속 질문했다.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왜 삶이 공허할까. 인간은 왜 이렇게 살까.
하나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확정적인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런데 묘한 일이 벌어졌다.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붙들고 씨름하는 동안, 나는 나 자신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내 삶을 더 깊이 관찰하게 되었다.
답을 찾지 못해도 괜찮았다. 아니, 답이 없다는 게 오히려 자유로웠다.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에 정답을 요구당하며 산다. 어떤 직업이 좋은가, 어떻게 사는 게 옳은가, 무엇이 행복인가. 마치 객관식 시험지처럼, 보기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할 것 같은 압박.
하지만 삶은 시험지가 아니다. 정답을 찾거나 결론을 내리는 게 인생이 아니다. 삶은 그 과정 자체다. 질문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또 질문하는 그 여정 자체가 삶이 아닐까.
철학적 질문들은 대부분 답이 없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답이 없어도 질문하는 것, 그 과정에서 내 삶을 더 풍부하게, 더 깊게 만드는 것. 그게 진짜 의미가 아닐까.
답은 각자가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답도 인생의 여정마다 달라질 수 있다. 스무 살의 나와 마흔 살의 내가 다른 답을 내려도 괜찮고, 오십 살의 나는 또 다른 걸 말할 수도 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지금도 정답 찾기 습관은 불쑥불쑥 올라온다.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여전히 '정답'을 찾으려는 나를 발견한다. 오랜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예전과는 조금 다르다. 숨 가쁘게 답을 찾아 헤매는 대신, 잠시 멈춰 서서 질문을 던진다. 이게 정말 답이 필요한 문제인가. 아니면 답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문제인가.
그렇게 질문하는 순간, 조금은 더 느린 템포로 살 수 있게 된다. 조금은 덜 갑갑하게.
14편의 글을 통해 나는 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이제 이 연재의 마지막에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사는가.
이 질문에도 답은 없다. 하지만 이 질문을 품고 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질문이 있는 삶은 조금 더 깊고, 조금 더 풍부하다.
답을 찾지 못해도 괜찮다. 질문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어쩌면 그게 산다는 것의 의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