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필 모 독 ​

by 민감성




책상 그 위에 흰 종이와 연필이 있다. 그것들 뿐이었다. 잠시 생각한다. 조금 뒤 책상 서랍에서 커터칼을 꺼내어 연필을 깎는다.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모양이 차츰 뾰족해 진다. 잘려나간 부스러기는 둥그렇다. 한쪽 눈을 감고 깎은 연필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본다. 두눈으로 어디에서 보아도 연필은 뾰족하다. 뾰족한 연필을 손에 쥐어본다.

종이 위로 연필을 가져간다. 연필이 종이에 닿기 바로 직전 연필이 멈춰 섰다. 뾰족한 연필은 망설여하고 있다. 깎인 연필 반대쪽으로 종이를 툭툭 건드려 본다. 한참을 멈춰선 연필이 종이 위에 닿고 무언가를 쓰기 시작한다.

먼저, 생각나는 여러 단어를 쓴다. 단어와 단어들이 서로를 당긴다. 그러나 연관성은 없다. 일단은 적는다. 의미 없는 단어들이 없지만 의미를 부여한 단어들 양옆으로는 의미가 불분명한 단어들이 늘어서 한줄이 완성된다. 그런 한줄이 연이어 자리를 차지해가며 흰 종이의 여백을 계속 채워 나간다. 마지막은 점으로 마무리 한다.

한줄을 띄우고 다시 단어들 사이사이 새로운 단어들로 적절한 한줄을 완성한다. 한줄 한줄 완성되어 갈때 뾰족한 연필은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글의 탄생과 맞바꾼다. 하지만 의식하지 않는다. 의식하는 순간 희생은 댓가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점으로 끝맺음을 한다. 틀린 부분과 불필요하게 쓰여진 부분은 없는지 다시 읽어본다. 여기서 연필의 더 많은 희생을 요한다. 깊지 않고 복잡한 생각으로 쓴 글은 썼다 지우는 일을 반복하게 만들고 이는 연필의 쓰임새를 모독하는 일이며 연필의 희생을 가볍게 여기는 처사이다. 멈춰야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이해하지만 이해하지 않는다 아니 이해하지만 어쩔수 없는 것이라 여긴다. 그렇게 지나간 많은 세월처럼 수많은 연필이 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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