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가난한 집안에 무언가 힘이 되고 싶었던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개월 후 서울이라는 곳에 가게 된다. 서울만 가면 저절로 돈이 벌어지는 줄 알았던 철부지에게 서울생활은 그야말로 가혹하리만치 냉정했다. 14살엔 이름도 없는 작은 공장에서, 15살엔 청운여자중고등학교라는 산업체학교가 있는 충남방적에서, 17살엔 서울시내버스 안내양으로, 22살엔 시외버스 안내양으로, 23살 결혼을 하기전까지 불철주야 열심히 일했다.
공장직공과 안내양을 하면서 나의 가장 아름다운 처녀시절을 보내고 맞이한 결혼생활 역시도 넉넉하지 않았다. 아들을 낳기까지 가내부업으로 연명했고, 아들이 돌 지난 다음 해에 공장에 들어가 일했다. 4살 터울로 딸아이가 태어나면서 다시 1년을 집안에서 할 수 있는 부업을 하며 지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데도 살림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돈 쓸일은 점점 많아졌고 공장에서 받는 급여로는 한 달을 살기가 부족했다. 그나마 배고파보지 않고 살았던 남편은 생활비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내가 벌지 않으면 가세는 펴질 것 같지가 않아, 시어머니께 아이들을 맡긴 나는 공장보다 월급이 많은 식당 주방부터 서빙까지 닥치는 대로, 새벽부터 밤 까지 일을 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더 힘든일을 하면서 조금씩 모아진 돈으로 식당을 차렸다가 망해 먹기도 했다. 앞이 보이지 않아 막막할 때에 구원병처럼 찾아온 다단계를 하면서 바닥에서 땅속으로 꺼진듯한 상황까지 가고 말았다. 하늘을 보고 살 수가 없다고 판단한 나는 지구를 떠나려고도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시 무엇이라도 하리라 마음먹은 내게 장사의 길이 열렸다. 밑천 하나도 없이, 친정오빠와 주변사람들의 도움으로 시작한 장사가 나를 다시 일으켜 주었다. 이제는 돈 걱정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겠다 싶을 때 병을 얻었다. 온몸을 통증으로 감싸 수저질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까지 되어서 장사를 접었다. 통증만이라도 줄여보자는 마음으로 치료에 집중 하다보니 어느순간 병이 물러나 있었다.
이미 세상의 쓴맛이라는 것들은 모두 느꼈다 싶은 후였다. 쉽사리 돈 벌고 싶은 욕구조차도 생겨나지 않아 할 일이 없어 졌을 때 나는 어릴 때 배우지 못한 공부를 하기로 했다. 이미 틈틈이 받아놓은 검정고시 졸업장을 들고 한국방송통신대학에 갔다. 그곳에서 공부를 하면서 다시 의욕을 찾게 되는데 일에 대한 의욕이 아니라 공부해서 폼나게 할 수 있는 것들을 하자는 의욕이었다. 학과 공부도 열심히 했고, 자격증공부도 열심히 했다. 학과외에 따로 취득한 자격증은 문화관광 해설사, 전통놀이강사, 효지도사, 한자2급, 등이 있고, 40대 중반부터 50대 초반까지 하고 싶었던 것들, 일반 주부들이 부러워 할 만한 일들을 다 했다. 대학에서 과대표, 학생회장을 했고, 사회에선 문화관광해설사, 고등학교사감교사, 전통놀이강사, 효지도사, 향토사위원, 한자교사등 나를 필요로 하는곳이면 마다하지 않고 했다. 유급이어도 했고 재능기부여도 했다. 그 시기에 내 이름 석자가 들어간 책자도 4권이나 발행했고 쉬지 않고 공부한 한문 실력으로 옛문서를 번역하기도 했다.
공부하고, 하고싶었던거 하고 사는 동안 가정경제는 다시 위태위태 해졌다. 노후에 대한 불안감도 슬며시 들었다. 몸도 건강해 졌고, 하고싶은 것들도 해봤으니 다시 돈 버는 일을 해도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았다. 품목을 바꾸어 예전의 그 도매시장 중매인으로 왔다. '새벽바다'라는 상호를 걸고 추위와 사나운 파도와 싸우는 마음으로 1년을 명함을 들고 손님들을 찾아다녔다. 도매만으로는 유지가 어려울 것 같아서 소매도 함께 했다.
50이 넘은 나이에 하루 16시간씩 일하는 강행군을 했다. 나의 간절함을 하늘이 알아주셨는지 어느 순간 많은 분들이 단골손님이 되어 계셨다. 이제는 자리를 잡아 새벽시간의 도매만으로도 만족할 만한 수입을 얻는다. 이제 남편과 함께 꿈꾸던 삶을 실행하기로 했다. 나는 작가의 꿈에 도전하고, 남편은 귀촌의 꿈에 도전한다.
환경좋은 곳에서 서로의 꿈을 펼칠 준비를 마쳤다. 지금 내 나이 지천명의 끝에 쯤 와있다.
知天命, 논어에 나오는 나이 오십을 일컫는 이 말은 한자대로 풀이하면 하늘의 명(뜻)을 안다는 말이다. 50이 되면 하늘이 정한 삶의 이치를 깨달아 인간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에 부딪혀도 슬퍼하지 않고, 한계를 넘으려는 헛된 노력을 하지도 않으며, 자신이 부여받은 하늘의 命만큼만 살면서 유유자적할 수 있는 나이라는 말로 나는 해석한다. 내게 하늘이 내린 명命은 성실하게 장사하면서 알뜰하게 모은 돈으로 사회에 봉사하면서 큰 욕심 내지말고 살라는 것 이었음으로 받아 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미약하나마 봉사 할 것들을 찾는다.
또 가슴설레는 꿈이 있다.
바로 작가의 꿈!
열심히 지어 놓은 글들이 [그때 그안내양 어떻게 살고 있을까?]로 출간되어 조금 팔렸다.
출간하고 서점에 입고 완료되었다 했을때는 금방 2쇄를 찍고 3쇄를 찍을 줄 알았다. 하지만 무명작가의 책이 그렇게 쉽게 팔리는 것이 아니라는 걸 가슴깊이 깨닫는 경험을 했을 뿐이다. 그래도 언젠가 한번쯤 인기를 얻고 이름이 알려지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기대를 놓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들이 겪는 아픔과 슬픔이 나만 비켜가지 않았듯이 행운이라 말할 수 있는 것들도 나만 비켜 가지 않을 것을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