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늦게까지 손님이 이어지는 상황을 파악하고 토요일은 2시간만 연장근무를 해달라고 제안했다. 휴무일도 화요일쯤으로 하고 일요일은 근무를 하자고 했다. 그러나 대답은 no였다. 이유는 주말 저녁과 일요일을 남편과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집을 담보 잡고 신용대출을 받아 장사를 시작한 나는 새벽 5시부터 밤 9시까지 살림은 돌아볼 여유도 없이 시장에 매여 사는데 매출이 좋은 주말에는 근무를 할 수 없다며 거절하는 직원이 너무 서운했다. 내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돈 되는 시간에 나 혼자 죽어라 벌어서 한가한 시간에 어슬렁거리는 직원 월급 주는 꼴이었다.
마음이 편치 않음을 견디던 나는 새벽에 물건 찾아오고 진열하는 일이라도 시켜서 내 몸의 힘이라도 아끼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직원이 없는 시간에 그 힘을 쓸 요량으로 출퇴근 시간을 변경하자고 말했다. 그 제안도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새벽잠이 많아서 일찍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는 사이에 직원과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 일에 필요한 최소한의 대화조차도 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아침에 출근하면 맡겨두고 외출을 해버렸다. 터질듯한 속마음을 누군가에게 하소연이라도 해야 살 것 같았다. 타격은 더 커졌다. 내가 있을 때 매출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명절 앞에 원래 손님들이 돈을 쓰지 않아서 그렇다며 당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여전히 출퇴근시간을 칼같이 지켰다.
추석 명절이 10여 일 앞으로 다가온 날, 다른 집들은 상시 인원 외에 두세 명씩 아르바이트 직원을 구하고 평소보다 몇 배의 물량을 입출고시키면서 시장은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나도 서둘러 동생들과, 딸,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해 두었다. 내게 단호한 용기가 필요한 상황은 이때 생겼다.
급한 일이 있다며 1시간 정도 외출했다 돌아온 직원은 개인 사정으로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며 3일만 더 하겠다고 했다. 당시 3일 후면 그야말로 단대목(명절 앞 며칠간 판매가 가장 왕성한 시기)이었다. 상대적으로 덜 바쁜 3일만 일을 하고 정말 바쁠 때는 그만두겠다니 완전히 날 곤경에 빠트리겠다는 말이었다.
명절대목에 아르바이트를 하면 1.5배에서 2배까지도 일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즈음에 직원들의 이직이 많이 일어난다는 말은 들었었다. 그 1시간의 외출이 그런 결정을 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생각하니 오만정이 떨어졌다.
더 이상은 조금도, 직원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대목장사를 못해도 상관없다는 오기가 생겼다.
그동안 일한 만큼 급여를 계산해 이체해 주고 당장 가라고 했다. 정말 바쁜 대목에 일할 수 없다며 그만 둘 계획을 세우고 있는 직원과 한시도 더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그녀 또한 망설이지도 않고 자기 물건들을 챙겨서 가 버렸다.
나는 부랴부랴 다른 직원을 구해보려 했지만 때가 좋지 않았다. 일할만한 사람들은 이미 대목 아르바이트로 어느 곳에 일을 나가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친정동생을 급히 불렀다. 명절연휴 첫날부터는 다른 동생과 남편, 명절휴가를 받아온 딸이 합류했다. 생선손질은 좌충우돌 내가 해냈다. 역시 가족은 용감했다. 모두 맡은 자리에서 한시도 한눈팔지 않고 해 주었다. 그건 일당을 더 준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내 가족이니까, 언니니까, 하나라도 더 팔고 싶었던 가족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장사를 시작하고 처음 맞은 명절에 예상보다도 훨씬 많은 매출을 올렸다. 몸에는 비린내가 배었고, 손은 퉁퉁 불고, 칼에 베이고, 생선가시에 찔린 상처가 훈장처럼 남았지만 -나 없으면 너 같은 초보자가 해내지 못할걸-이라고 하면서 갔을 직원을 생각하면 저절로 승리의 미소가 번지는 날이었다.
사실 직원을 보내고 생선손질을 못해 장사를 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막상 손님이 오시니 몸이 알아서 움직여 주었다. 그것이 직원과 사장과의 차이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직원은 자기가 하기로 한 일이 아니면 하려고 하지 않지만 사장은 닥치면 다하게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