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아버지의 일을 도와야 한다며 새벽부터 막내를 나에게 맡기고 품꾼들을 따라 아버지의 배추밭에 일하러 가셨다. 한 포기라도 더 갖고 가야 돈을 더 받는 줄 알았던 엄마는 품꾼들이 지나간 자리의 속이 덜 찬 배추들을 따고 있었다. -그런 거 실리먼 서울 사람들 돈 안 주니께 속이 꽉 찬 놈들만 골라서 따란 말여!- 아버지는 역정을 내며 엄마가 딴 배추들을 밭두덕 밖으로 집어던졌다. 속이 조금 덜 찼을 뿐 멀쩡한 배추를 버리는 아버지를 보고 엄마는 서울 사람들이 안 먹는 저 배추들일랑 집으로 갔다 달라고 했다. -내가 서울 시간 맞춰 가야는 디 저걸 원재 뽑아서 집이 갔다 오남? 서울서 팔고 몇 포기 챙겨 올 틴게 구질거리게 넘들 안 먹는 배차 줏어다 먹을 생각 말어!- 하면서 아예 발로 차버렸다. -애들은 푸성귀도 읎어서 간장 찍어 밥 먹는데...-
끝내 그 배추를 버릴 수 없었던 엄마는 아버지가 속찬 배추가 한가득 실린 트럭을 몰고 서울로 출발하는 것을 보고 서둘러 아버지가 집어던진 배추를 주워 이고 집으로 오셨다. 그것들을 삶아 우거지를 만들어 새우젓 국을 끓이고, 소금에 무쳐서 밥상을 차렸다. 소금에만 무쳐도 걸신들린 듯 먹어대는 자식들 입을 바라보며 밭가에 버려진 배추들이 눈에 어른거렸을 것이다. 더듬더듬 어둠 속에서 배추를 찾아 광주리에 담아 이고 십여 리 되는 밭과 집을 오가며 배추를 날랐다. 그리고 밤새 소금을 뿌려 절였다. 쌓이는 배추 위로 흰 눈이 소금처럼 쌓였지만 그 밤에 하지 않으면 다음날은 다시 아버지의 일을 도와야 하니 마음이 급했을 것이다. 그 밤길을 오가며 느꼈을 무서움과 추위 따위도 자식들 입을 생각하는 엄마를 막지 못했던 것이다.
겨울이 깊어 배추장사가 다 끝나도 양식사라고 돈을 갖다 주기는커녕 고리로 얻어 쓴 빚을 갚아야 한다며 밤마다 천붕기택, 출가외인을 위치는 아버지 등살에 엄마는 외삼촌을 찾아가 사정해야 했다. 생선장사로 몇 항아리 모아둔 곡식들도 아버지가 모두 내다 팔았다. 그 헛헛함과 빈 항아리를 엄마는 아버지가 버린 배추로 채웠다. 겨울을 나고 보릿고개를 넘었다. 멀건 고춧물로 담근 김치나마 다 떨어지면 서걱서걱한 짠 배추를 꺼내다 씻어 물에 담갔다가 썰어 주었다. 짭조름하면서도 개운한 그 맛이 밥 한 그릇을 금방 비우게 했다.
햇볕이 쨍쨍하던 어느 초여름 엄마는 항아리 하나를 열었다. 윗부분의 볏짚을 걷어낸 그 속에는 꼭꼭 눌러져 있던 배추가 시큼한 향을 뿜으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선명한 푸른 잎을 들추어 노랗게 익은 속을 보이며 -짠지가 맛있게 익었네-라며 엄마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부터 나에게 소금 배추는 짠지가 되었다.
짠지는 아버지의 밥상에도 올라갔다. 속살만 썰어 가지런히 접시에 담긴 짠지랑 고봉으로 푼 밥사발을 다 비우면서도 그것이 아버지가 버린, 남들이 안먹는 배추로 만들었다는 것을 아버지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