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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차순이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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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숙 Aug 11. 2023

차순이 9

억울한 밤이 지나고...

기숙사 206호실, 양희는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한방에 여섯 명이 기거하는 10평 정도의 방이다. 한쪽 벽으로 길게 사물함이 있고 입구 쪽에는 신발장이 있으나 좁은 신발장으로 들어간 신발보다 나와있는 신발이 더 많다. 내일 새벽에 신고 나갈 운동화가 다섯 켤래, 슬리퍼가 여섯 켤래, 그리고 누군가의 외출용 구두까지 30 여짝의 신발이 어수선하다. 게다가 각자의 세면도구들이 담긴 각양각색의 플라스틱 대야들이 신발장옆으로 나래비를 섰다. 방에 들어서면 쾨쾨한 냄새가 먼저 반긴다. 여자들, 그것도 한참 멋 부릴 처녀들이 사는 방의 냄새는 아니다. 그곳에 밤 10시가 넘으면 형광등 세 개 중 두 개는 꺼지고 입구 쪽에 하나만 켜진다 다음날 새벽에 배차받은 안내양들이 일찍 잘 수 있도록 정한 규칙이다. 밤 10시경부터 막차까지 한 명 한 명 퇴근해 오면 조용히 세면실로 세탁실로 다니며 일을 보고는 자기의 자리에 누워 잔다. 잡담은 금물이다. 그러니 사실 말이 한방식구지 서로 시간이 엇갈려 출퇴근과 휴무가 정해지므로 서로를 알 시간은 많지 않다.           

쓸쓸한 빛에 의지해 간신히 신발 벗을 자리를 만들어 운동화를 벗고 방으로 올라섰다. 잠든 듯 누워있던 언니들과 소영이가 뒤척인다. 오늘따라 그녀들의 뒤척임이 낯설게 느껴진다. 양희는 아직도 서러운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숨죽여 콧물을 훌쩍이며 세면실로 갔다. 세수를 하면서 남은 울음을 모두 토해 내었다. 사감실에서 얼마나 실랑이를 했는지 시간은 벌써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새벽이 되자 사감은 배차시간에 맞추어 간헐적으로 와서 한 사람씩 깨웠다. 양희는 비번이라서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데 사감이 한 사람씩 깨우러 올 때마다 선잠이 깨었다. 벽을 보고 누워서 잠든 척 기척도 내지 않았다. 오늘 함께 비번인 수자가 집에 갔다 온다며 7시쯤 나가고는 방에는 양희 혼자 남았다. 양희는 그제야 참았던 소변을 보려 복도로 나왔다. 화장실 옆 세탁실에서 두세 명의 비번 안내양들이 시끄럽게 웃으며 빨래를 하고 있다. 양희는 어제 자신이 센터 당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얼른 방으로 왔다. 점심때가 되려면 아직 5시간 정도 남았다. 기숙사 식당은 아침이 8시까지이다. 서둘러 가면 밥을 먹을 수 있겠지만 그곳에서 또 누군가를 만날까 봐 그냥 굶기로 했다. 센터 당한 억울함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가슴속 바닥부터 차 오른다. 다시 한숨 자려고 이불을 걷었는데 베개 밑에 하얀 종이가 보였다. 펼쳐보니 소영이의 메모다. -나 오늘 61호야, 있다가 시간 되면 내차 좀 타, 소영-      

     

양희는 어젯밤에 삥땅을 의심받아 옷까지 벗을 뻔했는데 모두들 잠든 척 아무도 위로해 주지 않는 것이 서운했었다. 평소 친구라며 가까이 지내던 소영이 마저도 등을 돌리고 자고 있었다. 기사들의 따돌림, 회사의 의심, 동료들의 외면... 그런 것들이 센터를 당한 것 이상으로 힘들다. 지난달에 그만둔 인자 언니도 어쩌면 이런 분위기가 힘들어서 떠났을지도 모르겠다. 자신도 그만두게 되면 공장으로 다시 가야 하나 생각하다 잠이 들었었다. 그런데 소영이의 메모를 보고 조금 힘이 났다. 그나마 동갑내기 친구라고 소영이가 자신을 위로해 주려고 보자고 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다들 외면해도 단 한 명만 자신을 믿어주고 토닥여 주면 견딜 것이라고 생각을 하며 일어났다. 지금 나가면 출근시간이 끝날 것이고 버스는 한산해질 것이다. 개봉동 입구까지 다른 차를 타고 가서 내렸다가 소영이의 차를 타고 한 바퀴를 돌아오면 12시에 만나기로 한 금희언니와의 약속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소영이부터 만나자- 양희는 일어나 간단히  세수를 하고 옷을 입었다. 외출복이래야 가운 벗고 입는 티셔츠와 청바지였다.            

김사감은 퇴근하고 없었다. 오늘 근무자인 최사감이 있었다.     

"외출할게요"    

 

최사감은 양희의 얼굴을 쳐다보고 말없이 외출기록장을 내어 주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저녁 6시까지는 복귀를 해야 한다. 출발시간 8시-복귀예정시간 18시로 적고 양희는 나왔다. 5분쯤 걸어서 종점에서 1 정거장 위치로 왔다. 종점에서 여러 명의 기사와 안내양들과 정산실직원들을 마주치게 될 일을 피하고 싶었다. 60호가 왔다. 다음차는 소영이의 차인데 몇 정거장쯤 나가서 타려고 60호를 탔다.  

               

회사는 비번인 안내양이 버스를 타고 근무자인 안내양과 밀담을 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그것도 부정행위 예방차원 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안내양이 현금을 만진다는 이유로 필요 없는 규제가 참 많다. 양희는 소영이 앞차를 타고 두 정거장을 이동하면서 회사가 규제하는 방법이 안내양들이 부정을 행하는 방법이겠구나 생각했다. 화장실에 가서 속옷에 감추거나, 아는 사람을 태워서 맡기거나... 또 어떤 방법들이 있을까?   

         

양희는 고척동에 내렸다. 종점에서 다섯 정거장을 지나온 지점이었다. 10분쯤 기다리니 61호가 들어와 섰다. 전에 양희가 한번 탔던 차량이었다. 그때도 이차는 날아다녀 사무실에서 잔소리를 들었었다. 소영이는 입사 1년 차여서 자기보다 직장은 선배지만 나이가 동갑이고 한방을 쓰고 있어서 친구가 되었다. 친구라고 해봐야 기숙사에서나 수다를 떠는 정도지 밖에서 만난 적은 없다. 기숙사 사감들은 안내양들의 행동을 유심히 보고 누가 누구하고 친한지를 파악하는 것도 업무의 하나이다. 친해 보이는 안내양끼리는 휴일을 같은 날로 주지 않는다. 같이 놀러 다니며 쓸데없는 작당을 할까 봐 그럴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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