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영이가 먼저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버스에 올라탄 양희를 자기 뒷자리로 앉으라고 했다. 기사에게 인사도 안 하고 소영이 뒤로 앉았다. 그때 기사가 먼저 말을 걸었다. -미스정! 오늘 비번이야?- 양희는 자기에게 하는 말인 줄도 모르고 소영이만 바라보는데 소영이가 툭치며 말했다.
"너 비번이냐고 묻잖아?"
"응? 누가?"
소영이는 -기사!-라며 눈짓을 했다. 양희는 뜻밖의 기사 태도에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는 -일할 때나 잘해주지 그렇게도 날아다니더니 아는 체 하기는?- 생각하며 차 안을 둘러보았다. 출근시간이 지났는데도 차 안에는 서있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승객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
"소영이 너, 저 기사하고 친해?"
"응? 친하다기보다는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일할 때만~"
구로동에 도착해 차는 서고 소영이는 몇 명의 승객을 내려주고 다시 네댓 명을 태웠다. 차는 서서히 다시 출발했고 소영이가 말을 꺼냈다.
"너 어제 센터 깠다며? 그러게 눈치껏 좀 하지? 그 정도로 의심받게 했어?"
"야! 나는 정직하게 했어, 밥은 안 먹어도 차량청소는 했고, 10원짜리 하나도 어떻게 한적 없어, 그런데 기사들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아침에 출근하면 인사도 안 받고 하루종일 얼굴도 안 마주쳐, 손님도 안태우면서 졸면 소리나지르고, 그러고 보니 저 아저씨도 그랬어, 나 졸고 있다고 막차시간에 종점 손님 두어 명 있는데서 소리를 질렀어"
소영이는 웃었다.
"넌 그게 문제야, 너무 고지식해, 세상을 어떻게 도덕책에서 배운 대로 사냐? 그리고 저 아저씨 사람 좋아, 다른 안내양들도 다 좋다고 해, 너한테만 안 좋았으면 너한테 문제가 있는 거야"
양희는 소영이 말을 곱씹었다. -너한테만 안 좋았으면 너한테 문제가 있는 거야, 어떻게 도덕책에서 배운 대로 사냐?-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무리 정직해도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걔 아니야-라고 낙인찍어 버리면 아닌 사람이 되어 버린다. 기사들이 아마도 양희를 두고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가로 저을것이다. -걔 아니야!-
양희는 61호 기사가 일할 때 자신을 대했던 태도와 지금의 태도가 너무 다른 것도 책에서 배운 대로가 아닌 사회에서 배워야 할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적인 면과 직업상의 얼굴을 서로 다르게 해야 함을 가르쳐주는 것 같았다.
소영이는 이런저런 말로 시간을 끌다가 서울대입구를 돌아 나오는 길에 무언가 결심을 한 듯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눈치도 없는 순진한 내 친구니까 내가 한 번만 알려 줄게, 그런데 다시는 이런 말 입에 올리지 않을 거고 너도 나한테서 들은 건 잊어버려야 돼, 난 네가 나한테 이런 말 들었다고 사감실에 고자질하면 그 순간 보따리 싸야 돼, 그런 위험 안고 말하는 거니까 잘 들어, 알았지?"
무슨 말을 하려고 저리도 진지해지는지 따라서 진지한 표정이 된 양희에게 소영이는 말을 이었다.
"기사들은 토큰 몇 개 가져가기 위해서 그 이상의 승객을 태워, 너 봤지? 네 앞차 뒤차가 너보다 몇 배는 많이 입금시키던 거, 그게 너 뺑뺑이 돌리고 자기들이 미어터지게 승객을 태우면 위험하고 힘든데 무슨 회사에 충성 났다고 그렇게 승객들 태우고 다니겠냐? 다 자기들 위해서 그러는 거야, 회사는 정직한 너보다 삥땅 치고라도 돈 더 많이 벌어오는 기사와 안내양을 더 좋아해, 정직하게 산다고 형편없는 돈 벌어오는 너는 센터를 당해도 삥땅치고 앞뒤차보다 돈 더 벌어오는 안내양은 절대로 주머니 센터도 안 해, 창립기념일날 상 받는 사람들이 아마도 제일 많이 가져가는 사람일걸, 그러니 기사들이 그 난리를 치는 거야, 삥땅을 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 거지, 회사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걸"
대방역에서 소영이는 문을 열고 몇 사람을 태우고 다시 말을 이었다.
"너 계속 센터 당하며 살래? 그러다 못 견뎌 그만둘래? 아니면 그냥 여기 법대로 살래? 10년씩 근무했다는 언니들, 너처럼 정직해서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겠냐? 여기서 그만두고 다른 곳에 가면 거기는 정직한 사람들만 모 여살까?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안내양 3개월이면 모두 다 눈치 까던데, 넌 맹한 거냐? 정말 정직한 거냐? 그렇게 정직하게 한점 부끄럼 없이 살려면 전처럼 공순이나 하지 그래?"
자신의 결백함을 믿어주고 토닥여 주길 바랐던 소영이에게서 오히려 정직함을 비난하는 소리가 나왔다.
공순이와 차순이와 식순이라는 말은 공장여공, 버스안내양, 가정부를 비하해 부르는 말이다. 시골 처녀가 집안에 입이라도 덜어주려 서울로 서울로 올라왔다.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처녀들은 공장으로 버스안내양으로 식모살이로 들어가 도시사회 하층민의 한축을 이루었다. 그중에 공장을 다니는 처녀들은 공순이, 안내양을 하는 처녀들을 차순이, 식모로 간 처녀들은 식순이라고 불렀다. 차순이가 공순이를 말하고, 공순이가 식순 이를 말하고, 식순이가 차순이를 말하는 소위 삼류끼리 서로 삼류를 비하했다.
양희는 충격적인 소영이의 말을 들으며 귀가 윙윙거렸다. 자신이 그동안 기사들에게 뺑뺑이를 당한 것이 정직하게 살려는 의지 때문이었고, 다른 안내양들은 거의 모두가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조용히 살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안내양과 기사의 삥땅이라는 말은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암암리에 기정사실로 행해지고 있음을 소영이의 말을 통해서 확인하게 되었다.
개봉동 입구가 가까워오자 양희는 금희언니를 생각했다. 벌써 7년 차라고 했는데 그럼 금희언니도 다른 안내양들처럼 삥땅을 해서 기사에게 일부를 주고 자기도 가져갈까? 그래서 7년씩이나 잘리지 않고 근무를 할 수 있었던 걸까? 양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절대로 정직한 사람이 밀려나는 사회는 아닐 것이라 믿고 싶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