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는 그들끼리 하는 대화니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자신에게 들으라고 한 말 같아서 꺼림칙했다. 찜찜한 하루 일과는 끝나고 퇴근 시간이 되었다. 내일은 비번이니 늦잠을 자고 금희언니를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터덜터덜 빨간통을 들고 기숙사 정문에 들어섰다. 그때 사감이 불렀다. -정양희! 너 이리 와봐!- 사감의 얼음 같은 목소리에 양희는 선체로 돌이 되어버렸다.
사감실에서 퇴근길에 부르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밤 10 시 넘어 피곤에 찌들어 퇴근하는 안내양들이 얼른 씻고 잠들 수 있도록 그나마 인간적인 배려를 해주는 부분이다. 어쩌면 그마저도 다음날 근무 중에 부족한 잠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사고로 회사 측의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을 최소한 줄여보겠다는 의도일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도 굳이 호출하는 이유는 다음날 대타를 탈것인지 묻는 경우와 부정행위를 적발하려는 경우 두 가지이다. 의심되는 안내양을 기숙사 사감이 소지품을 검사하고 몸수색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는 막차를 타고 밤 12시가 넘어 들어와도 부른다.
양희는 내일 금희언니를 만나기로 한 약속을 떠올리며 대타근무 하라고 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대타를 요청할 때는 목소리가 부드러웠다는 것도 떠올랐다. -사감의 목소리가 저리도 차갑다면...- 대타근무와는 다른 경우를 떠올리며 몸과 생각이 멈춰버렸다. 다른 경우? 대타가 아니라면???? 그러나 곧 자신은 떳떳함을 상기하고 사감실로 들어섰다. 날카롭게 쳐다보던 김 사감은 양희를 작은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지난번 인자언니가 -오늘 센타 깠어-라며 투덜대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그 센타가 어떤 건지 양희는 아직 직접 당해보진 않았다. 빨간통을 뒤지고 가운주머니 정도 검사하는 걸까? 그때 강자가 말했던 속옷까지 벗는것?! 양희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처음 입사할 때 서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곳에 명기된 내용 중 -부정행위가 의심될 때 회사 측의 조사요구에 불만 없이 응할 것-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근래 인권운동이 각 분야에서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 이전에는 그런 사전의 예고도 없이 불러다 옷을 벗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권침해라고 반발의 조짐이 보이자 입사 전에 순순히 응하라는 예고에 도장을 찍게 했던 것이다.
김 사감은 먼저 빨간통을 바닥에 쏱았다. 껌. 박카스, 생리대, 마른 수건, 치약칫솔이 바닥에 와르르 쏟아졌다. 치약갑의 사이까지 열어보고 마른 수건을 펼쳐 털었다. 그리고 양희를 쳐다보았다. 양희는 두 손을 모으고 김 사감의 행동을 보고 있었다. 양희와 눈이 마주치자 김 사감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기를 눌러보겠다는 의도였나 보다. 그리고 "벗어"라고 짧게 말했다. 양희는 벗으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판단을 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가운 벗으라고!" 얼음 같은 김 사감의 목소리가 작은 빈방을 울렸다. 속옷까지 뒤져보겠다는 뜻이라는 걸 알아챘다. 양희는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센타가 이런 거구나, 강자가 말하던 그것이 사실이었어- 그대로 서 있었다.
사감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퇴사사유가 된다. 만약에 몸에서 동전 한 닢이라도 나오면 그 또한 퇴사사유다. 그 돈이 자신의 떳떳한 돈이어도 기숙사를 나올 때부터 퇴근하고 숙소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몸에 지니고 있으면 안 된다. 어떻게든 회사는 양희를 자르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아챘다.
49호 기사가 하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내가 오늘 결단 내줄게- 49호 기사는 입금액 상위를 인정받아 공로상도 받은 기사이다. 그런 기사와 일을 한 안내양이 입금액이 형편없으니 안내양이 의심받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지간한 안내양들은 옷 벗김을 당하고 자존심을 지킨다며 떠나기도 했고, 숨긴 무언가가 발각되어 떠나기도 했다. 양희가 둘 중에 하나는 걸려들기를 기사들이 바라고, 회사는 기사들의 바람에 사실확인도 안 하고 동조하고 있다. 그동안 말대꾸도 안 하고 부지런히 앞유리를 닦아주고 성실하게 일했던 날들이 원망스러웠다.
떳떳함을 밝히려고 못 벗을 것은 없었지만 그런 의심을 받았다는 것이 자존심 상했다. 그러나 벗지 않으면 당장 보따리를 싸야 하는 기로이다. 아버지의 근심 어린 얼굴이 떠오른다. 두 달만 지나면 아버지도 자유로울 수 있는데.. 어떤 이유든 소위, 잘린 사람은 다른 버스회사에 취직하기도 어렵다고 들었다.
망설이는 양희에게 사감은 한 건 했다고 생각을 했는지 직접 가운을 벗기려 했다. 양희는 사감의 손을 잡고 만약에 내 몸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사과할 거냐고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것이? 떳떳하면 벗으면 되지 사과는 무슨 사과야?" 김 사감의 목소리는 커졌다. 양희는 가운의 앞자락을 잡고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때 사과 한다고 약속하라고 버텼다. 그때 윤 사감이 들어왔다. 밖에서 이미 방안의 상황을 모두 판단한 것 같았다. 윤 사감은 김 사감보다 선임으로 기숙사의 총책임을 맡은 사람이다.
"정양희! 너 맹세할 수 있어? 네 몸에 아무것도 없다는 거?"
양희는 서러움을 삼키느라 딸꾹질을 하며 대답했다.
"사감님 아시잖아요? 딸국!, 제가 껌값도 안 준다고, 딸국! 소문나서, 딸국! 기사들이 뺑뺑이 돌리는 거요? 딸국! 그런데 제 몸에 뭐가 있겠어요? 딸국! 전 맹세코 떳떳해요. 딸국!"
윤 사감은 김 사감에게 눈짓을 했고 김 사감은 마지못해 -들어가 봐-라고 말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