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장 입구까지 사모님의 장바구니를 들고 왔다. 약속이 있어 더 들어다 드리지 못하는 것이 죄송했지만 금희언니와 약속한 시간이 5분쯤 지나고 있어 어쩔 수 없이 헤어졌다. 사모님의 뒷모습이 애잔하여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금희언니가 -양희야!- 하고 불렀다.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니 언니와 우리 회사의 훈남 총각기사가 함께 서 있었다. 양희와는 한 번도 같이 일한 적이 없지만 소문엔 매너 좋은 총각기사로 알려진 사람이다.
"어! 언니! 오셨어요? 그런데 이분은?"
금희언니는 하늘거리는 원피스에 고급 샌들을 신고 있었다. 양말을 신지 않아 뽀얗고 작은 발이 다소곳이 샌들 끈 속에서 수줍어하고 있었다. 훈남기사도 나뭇잎 무늬 셔츠에 청바지를 입었는데 배우처럼 멋지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누가 봐도 한쌍의 연인이었다. 이 모습을 보고 누가 버스기사와 안내양이라고 할까? 옷만 갈아입었을 뿐인데 물오른 제비 같은 모습에 양희는 설레기까지 했다.
"가자, 저 안에 순댓국 맛있는 집 있어, 내가 살게"
금희언니는 양희 손을 잡아끌었다. 기사는 말없이 흐뭇한 표정으로 따라왔다.
언니는 순댓국 두 그릇을 시키고 공깃밥 하나를 추가하고 순대 한 접시를 시켰다. 순댓국 한 그릇은 양희에게 주고 한 그릇은 밥을 말아서 훈남기사와 나누어먹으며 순대접시를 양희에게 밀어주며 많이 먹으라고 했다. 순댓국만으로도 배가 부른 양희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금희언니와 훈남기사는 순대접시도 깨끗하게 비웠다. 국밥집 아주머니는 순대 몇 조각을 서비스로 주며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아가씨는 볼수록 이뻐. 오늘은 더 이뻐 보이네, 매번 이렇게 알뜰하니 살림도 잘하겠어, 총각은 복터졌수"
말하는 것으로 봐서 금희언니와 훈남기사는 이 집 단골 같았다. 국밥집 아주머니 말이 아니어도 양희에게도 금희언니의 알뜰함이 보였다. 그런데 철저히 기사와 안내양의 연애를 금지하는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을까 호기심이 일었다.
훈남기사는 이름이 오병운이다. 나이는 서른둘, 스물여덟에 입사하여 4년 차 근무를 하고 있는데 두 사람의 애정이 싹 뜨게 된 것은 2년 전 삥땅 때문이었다. 입사선배인 금희언니가 오병운 씨 차를 몇 차례 타게 되었는데, 탈 때마다 요령껏 운전을 하며 승객도 많이 태워 앞뒤차보다 금희언니의 입금액이 많았다. 혹시나 삥땅을 바라는 것이 아닐까 싶어 막차로 들어오면서 토큰 20개를 주었다. 그때 금희언니를 바라보는 오병운 씨의 눈길은 싸늘해졌다.
"이거 뭐요? 왕고참 이래서 정직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이러고도 5 년이나 안 잘리고 일했단 말이요? 그리고 내가 그까짓 토큰 몇 개에 양심을 파는 사람으로 보인단 말이요? 나 이만큼 주면 미스최는 얼마나 가져가는 거요?"
얼굴이 빨개진 금희언니는 자기도 똑같이 가졌다고 자백을 했다. 오병운 씨는 오늘 전부 입금시키지 않으면 회사에 말하겠다고 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날 금희언니는 동전 한 닢도 남기지 않고 모두 입금을 시켰다.
사실 금희언니도 삥땅을 하는 것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기사들 안 주면 승객도 태우지 않고 날아다니며 급정차 급출발을 일삼는 경우는 물론이고, 사감실에서 옷까지 벗는 수치를 당한 이후로 요금에 손을 대게 되었다. 처음엔 자신만이라도 양심을 지키겠다며 기사에게만 토큰 몇 개씩 주고 자신은 한 개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런데 분위기가 다들 하는 거 자신만 안 한다고 정직한 사람으로 믿어주지 않는 것을 느꼈다. 기사들 껌 사다 주는 것이라도 가져와야겠다 싶어서 소리 나지 않는 천 원짜리 한 장씩 주머니 바늘땀 사이에 끼워서 가지고 들어왔다. 그렇게 모아진 돈이 한 달이면 2만 원이 넘었다. 사물함 껌박스 아래에 차곡차곡 쌓인 지폐는 월급날 가지고 나가 필요한 것들을 샀다. 그 돈으로 생필품을 사니 월급은 모두 은행으로 넣어야 되는데 공돈이라 생각되어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도 사게 되고 오히려 지출이 더 많아졌다. 그 지출을 메꾸기 위해 가져오는 돈은 더 많아졌다. 기사에게 주는 토큰도 많아졌다. 그런데도 회사입금액은 상위권 이어서 기사에게 주기시작한 이후로 한 번도 센터를 당한 적이 없다. 언니는 그것이 안내양으로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오병운 씨를 만나고 처음으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어느 기사도 삥땅 챙겨주는 걸 마다한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안 주면 불편하게 했는데 준다고 발끈하는 오병운 씨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다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