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리심장 May 14. 2024

부장 성윤모! 가 된 것 같은 기분

해고 통보 열다섯 번째 날

어제 출근해서부터 고객사 문의 때문에 아침부터 정신머리가 하나도 없었다. 이래저래 뭔가 휩쓸려서 뭔가를 해야 했고 실상 제대로 된 논의를 회사와 할 수는 없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나서야 드디어 나는 일방적인 합의 종용서에 대해 일부는 받아들일 수 있다, 인정한다. 하지만 너무 일방적이니 한 개의 항목만 추가해 달라 요청했고 역시 합의서 내에 정확한 금액을 표기해 달라고 다시 한번 요청했다.


그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또 한 가지, 사용하지 않은 연차에 대해서 사용자 측의 임의 사용 처리는 부당하며 동의할 수 없다. 했다. 사용자 측에서는 연차 소진을 조건으로 소진 처리의 절반 정도 되는 연차를 복원해 주겠다고 했으나 역시 마찬가지로 동의할 수 없다고도 했다. 또한 연차 소진을 강제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연차 소진하지 않겠다 했다.


그 요청 역시 받아들여졌다.


인사팀장님이 같은 방에 초대해 둔 인사팀 직원에게 혹시 이전에 사용 내역을 찾을 수 있으면 그것을 제외한 연차들은 다시 미사용으로 전환하고 수당 처리 하라고 지시했다. 거기에 대해 나는 나 역시 사용 내역이 있으면 공유하겠다고 답했다.


점심시간 이후 잠시 오가다가 만난 인사팀 직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머리를 쓰거나 영리하게 굴어서 나에게 무조건 유리한 쪽으로 협상을 원하는 게 아니다. 결과적으로 내가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플러스, 마이너스가 없이 정확하게만 처리되었으면 한다.
그게 내가 회사에 바라는 것이다.


이미 오전에 내가 실제로 연차를 가겠다 말한 대화 장면을 캡처해서 보내줬다. 그 사용은 잘 기록에 남겨져 있었다. 내가 완벽하진 않아도, 그래도 요령 피우거나 농땡이를 피우는 타입은 아니다. 잘한다, 못 한다에 대한 평가는 받아들일 수 있어도, 열심히 하지 않는다라는 평가가 나오면 너무너무 상처받는다.


연차는 모두 복원되었다. 쓰지 못한 대체휴무수당까지 모두 합해 정산하기로 했고 나는 5월 말까지 정상 출근하는 것으로 협의가 끝났다.


그리고 드디어 퇴사 합의서에 사인을 하고 동의서를 받았다. 너무도 오래 걸려 쉽게 넘어가지 못할 같던 하나를 넘은 기분이었다.




처음에 입사할 때와 지금의 회사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처음 내가 회사에 왔을 때 가지고 있던 삐죽삐죽하지만 그래도 각자의 장점들을 몰입하여 뽑아내는 분위기와는 달리, 지금은 옆으로 치고 위로 쳐서 네모 반듯하게 맞춰나가는 걸 가장 큰 미덕으로 여기고 있다. 이거 하지 마, 저거 하지 마. 이거 안 돼, 저것도 안 돼.


내가 결국 윗사람 눈에 나게 된 그 재택근무와 평일 휴무도 그중 하나일 거다. 다른 팀에서도 주말 근무, 출장도 다녀와도, 심지어 오전에 귀국했어도 오후에는 나오는데 너는 왜 안 그러냐. 그런데 그게 맞는 거냐는 질문에는 다들 회피한다.


지난 명절 때인가... 어떻게 같이 대기해 줄 사람이 없어서 연휴 내내 혼자 대기했다. 피곤함이 엄청 쌓였는지 하루는 아침에 잠드는 바람에 대신 상급자가 받아준 적도 있을 정도로 나는 심신이 지쳐있었음에도 대체할 사람이 없어서 그냥 그랬어야만 했다.


연휴가 끝나고 아침에 출근했더니만, 최고 상급자가 어어, 잘 쉬었어? 왜 이렇게 눈이 빨개?라고 한다. 순간 울컥했다. 아, 이 사람은 자기 부서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배치되고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관심이 없구나. 그래서 아우~ 저는 일했죠~ 연휴 내내요~ 했다. 그럼, 어! 고생했네! 하고 넘어가면 될 것을,

그럼 잠은 안 잤어?라고 받아치니 그다음엔 진짜로 할 말이 없어졌다.

잠만 자도 회복될 거면 직장인들이 왜 휴일을 가지며 나라에선 왜 연차를 강제 지급하겠니.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런 일도 비일비재했다.




몇 번의 면담을 거치면서 나는 내가 이 조직에서  '성윤모' 같은 존재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다들 참고 다들 견디고 다들 그냥 그렇게 넘어가고, 불합리하더라도 이치에 맞지 않더라도 넘어가고 따지지 않고.


그 와중 불합리하다, 맞지 않다고 계속 말하면서 바꾸려는 내가 윗분들 입장에서는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 같았을 거다.


휴일 근무를 했지 않냐, 그럼 대체 휴무를 가야지. 대면 미팅이 필요한 날이 아니지 않냐, 특이 사항 없으면 재택 하겠다. 출퇴근 체크를 할 거면 제대로 해라. 회사에 나와서 고정 아이피로만 출근 체크하게 하면 토요일 근무한 건 체크가 안 되지 않냐. 대충 해라, 토요일은 안 하셔도 된다라고 하지 말고 아이피 풀어라. 주말 근무 때도 내가 제대로 체크하도록 하겠다.


어쩌면 윗분들 눈에는 모든 일직선에서 늘 한 발자국씩 삐죽 튀어나와 있는 내가, 그렇다고 곱게 곱게 말 듣는 타입도 아닌 내가 참 싫기도 했겠다라고도 생각했다.


부장 성윤모!



안 그래도 이전 상급자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이런 제가 힘들지 않으세요? 뭐 말만 하면 그냥 넵! 하면 될 걸, 그건 이렇지 않나요~ 저렇지 않을까요~


이전 상급자는 대답했다.

그게 필요해, 이 회사는. 그걸 하고 있는 거고, 난 잘못되었다고 생각 안 해.


뭐..... 다 지난 일이다.





어제 우리 부서 최고 상급자는 내가 5월 말까지 근무한다는 사실에 적잖게 당황한 눈치였다. 아, 물론 5월 말까지 근무하자고 협의한 건 우리 부서 최고 상급자와 협의한 게 맞다. 다만, 그 사람은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는 연차를 다 소진해서 당장 어제부터 안 나오는 줄 알았다 보다.

이번 텀에 나처럼 나가는 다른 사람들처럼.


어... 이것도 또 일직선 상에서 한 걸음 삐죽, 이구나. ㅎ...


이제 큰 이슈들은 지나갔다. 잔잔바리들과 사직서, 그러니까 개인 사정으로 인한 권고사직만 안 쓴다 버티면 진짜 모든 과정이 끝날 거다. 아닌가? 돈을 받아야 끝나나? 뭐 여하튼, 이렇게 반 강제로 흐르는 시간이란 게 지금 입장에서는 참 고맙긴 하다.


지금은 무조건 시간이 흘러야 하는 타이밍이다.

얼마나 다친지, 얼마나 찢어졌는지, 얼마나 지쳤는지 옷을 헤쳐 들여다볼 틈도 없고 일단은 앞으로 팔을 번쩍 높이 들고 칼날을 세운 채 뛰어야 할 타이밍이라고 생각이 든다.

이전 12화 연진아, 절대 아끼면 안 되는 돈이 노무사 비용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