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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심장 May 15. 2024

부처님은 오시지 않았고 스승을 잃었다

해고 통보 열여섯 번째 날

고작 보름 정도 지났을 뿐인데... 몇 번째 '날'을 '달'로, 멋대로 손가락이 움직이는 걸 진정해(짝), 진정해(짝)으로 달래 가며 고쳐 넣는다. 아마 심리적으로는 그렇게나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는 모냥이다.


토요일 밤에 상담을 한 노무사는 상냥했지만,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지 심리적으론 위로가 되었지만 실질적 도움이 충분치 못하다는 생각에 다시 일요일 오전 중 노무사와 실제 연차 계산에 대해 다시 물어봤다.



노무사의 조언에 따라 월요일에 처리했고 잘 끝난 줄로만 알았다. 퇴사 합의서까지 진행했으니까.

하지만 한숨 돌렸던 순간, 끝이 아니라는 걸 다시 느끼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화요일에 인수인계 교육을 끝낸 다음의 일이었다.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루, 이틀 만에 문서만 툭툭 던져두고 끝인 인수인계가 아니다 보니 앞뒤 설명, 히스토리, 그리고 광범위한 범위의 업무와 실습이 필요하기도 하다. 5월 말까지 고작 12일 정도가 남았으니 히스토리 사례 케이스 교육하고 업무 협업 툴 교육과 실무를 옆에서 끼고 봐주면 거의 5월에 끝이 날 거라고 생각했다. 넉넉하진 않아도, 헐레벌떡 뛰어나가게 될 일은 아니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또다시 다음 주부터 나오지 말 것을, 연차를 사용할 것을 계속 강요했다. 이 바보 같은 반복을 도대체 언제까지 할 건지, 언제 즈음에야 포기할 건지, 아니 사실은 한 2주만 지나도 끝이 날 일을 이렇게까지 계속 반복해서 이기지도 못할 걸 싸움을 거는지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스승 오신 날이기도 했다.

부처님은 평온함의 대명사라는데 부처님 대신 차갑고 깊은 비가 계속 왔다. 적어도 내 마음과 하늘에서는 그랬다.

그리고 나는 내가 이 회사에 다니면서 참 존경했던 인사팀장님을 잃은 기분이 든다. 여러모로 나와는 다르게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코너에 몰리고 또 몰리니 오히려 나보다 더 감정적으로 나오는 걸 보면서 좋은 스승을 잃은 마음이 든다.


내일이면 또 그 지긋지긋한 상황에 다시 던져져야 한다.

그래도 노무사와 아침 일찍 상의를 거쳐 가이드를 정했다.




Q. 연차 사용을 계속 강요한다.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고 출근하면 되냐?

A. 응.


Q. 출근해도 일을 주지 않겠다고 한다. 어떻게 하냐?

A. 알겠다고 해라. 대신 녹취는 알지? ( ㅇ ㅇ )


Q. 만약 출근하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하냐.

A. 녹취로 남기고 출근하지 마라. 혹은 이게 대표의 생각이냐. 나중에 딴 소리 하면 어떻게 하냐. 대표와 확인하겠다 해라.


Q. 컴퓨터나 기타 등등을 뺴앗는 행위가 있으면 어떻게 하냐.

A. 인권 침해라고 해라. 할 게 없어서 휴대폰을 보고 있을 때, 휴대폰 보지 말라고 하면 역시 마찬가지로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다. 사내 괴롭힘이다라고 항의해라.



뭐 이 정도의 가이드이다.

와... 나는 이런 마음을 먹고도 이주 견디는 것도 죽을 맛인데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은 한 달도, 반 년도 더 길게 1년도 버티는 걸까. 진짜 대단한 사람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을. 진심을 다 해 축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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