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도 비슷할지 모르겠는데, 나는 늘 이런 식이었던 것 같다. 사실 갈리는 건 몸이나 마음이나 다 같은데 몸이 죽겠다고 해도 스스로의 마음이 야! 괜찮아! 그러면서 계속 몸을 갈아대는 거다. 그러다가 완전히 망가져서 한동안 옴팡지게 고생하고.
덕분에 2년 전에 눈이 심하게 안 보여서 안과를 갔더니 안구 건조증이 심해지다 못해 각막이 긁혀버리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고(모니터를 지나치게 오래 봤다면서 개발자세요?라고 묻더라.) 작년과 올해는 팔꿈치와 팔목에 생긴 염증 때문에 꽤나 오래도록 고생했다. (이 정도로 염증이 생기는 거면... 마트에서 일하세요?라고 묻더라. 이 씨...)
아침에 지각했다. 대략 한 4분? 분명히 알람을 듣기도 했고 전날 평소 대비 엄청 일찍 잠자리에 누운 건데도 몸은 내가 인지하지 못하게 많이 지쳐있던 것도 같다. 아니면 나는 괜찮다! 괜찮아!라고 스스로에게 말하지만 실상 전혀 괜찮지 않아서 안에서부터 곪아 바깥으로 퍼져나가듯 그렇게 아픈 건가 보다,라고 남 이야기하듯 말하고 있다. 핫핫.
빵을 분명 계량해서 만드는데 하다 보면 또 뿅! 하고 두 배 정도 늘어나 있다. 틀에 내가 소심한 양을 넣어 굽는 건지 어쩐 건지....
이미 노무사와 이야기를 끝내고 더 이상 우울해야 할 이유, 그러니까 어떤 형태로든 내가 손해 보고 그만둬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납득하고) 나서도 우울한 마음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아 전날 꽤 오래 미뤄뒀던 황치즈 마들렌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초콜릿을 입히는 걸 매번 제일 어려워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온 집안 창문을 다 열고 마지막에 초콜릿을 입히려다 보니 그 짧은 순간에도 초콜릿이 살짝 굳어 줄이 가는 불상사가 생기긴 했지만 뭐.. 이 정도면 괜찮은 맛으로 탄생하긴 했다. 전에 만들어 본 적이 없는 빵이다 보니, 맛을 보고 나서야 아- 이 맛의 빵이구나, 를 알 수 있었다.
비가 몹시 세차게 내리는데, 청소를 호로록 끝내고 나서 나는 주머니에 포장한 빵봉투 몇 개를 쑤셔 넣고 집 앞 과일가게로 갔다. 과일 가게에는 정말 예쁜 여사장님이 계신다.
과일을 막 그렇게 미친 듯이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가끔 먹을 때가 있다. 밥을 먹기엔 좀 부피가 큰 듯도 하고, 간단히 차고 달콤하고 채워지는 듯한 느낌을 주니까.
또 쿠키나 디저트, 빵을 만들기는 해도 그렇게 자주 많이 먹지 않다 보니 우연히 과일가게 사장님과 나눠 먹게 되었다. 부끄럽게도 그냥 블로그나 유튜브에 적힌 레시피를 참고해서 내 멋대로 설탕도 반 줄이고 아몬드 가루와 박력분을 섞고 하는, 정말 야매 베이킹에 가까운데도 늘 맛있다고 해주시는 바람에 고마움과 멋쩍음 반반이다.
거기다 안 그래도 요즘 금값인 과일을 자꾸 디스카운트해 주셔서 도망치곤 했는데....
이젠 요령껏 과일을 고르고 계산을 하고 그다음에 빵을 내려놓건만, 이미 그 정도 꼼수는 머릿속에 있으시다는 듯, 계산에 할인을 포함시켜 놓으시니... 영 미안한 마음이다. 그걸 바라고 빵을 나누는 게 아닌데.
여하튼 어제는 비가 꽤 오던 클로징 시간이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마감 직전에 같이 하게 되었다.
그리고 찬란하고 치열하게 산 사장님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부부로 알았던 분과의 관계는 동업관계. 또 하나의 남자분은 그냥 그 동업하는 남자 사장님의 후배. 그러니까 내가 그동안 완전 잘못짚어왔던 것이다. ㅎ
그리고 이어지는 그 과일가게를 하게 된 배경에 대해 쭉-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원하지 않는 순간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원하지 않았던,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결정을 떠밀리듯 하게 되었고 그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일에 대해, 그리고 홍보나 기타 등등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그냥 평범한 주부에서 이젠 내 가게 사장님이 되어버린 이 현실에 최선을 위해 달렸고 그래서 그 과일가게에는 커뮤니티와 동네에서 꽤나 맛있는 과일을 믿고 살 수 있는 가게가 되었다.
하다 보니 이렇게 하게 된 거고, 지금도 계속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싶어.라고 말씀하시는, 아직은 너무도 젊어 보이는 그 사장님에게 나는 다시 한번 대단하신 거다 말씀드렸다. 그분은 오히려 지금 내 나이에 용감하게도 아닌 것 같아서 그 자리에서 박차고 나오게 된 걸 대단하다 말씀하시지만, 내 보기에는 사장님도 마찬가지로 그 순간에 이런 선택과 선택들이 모여 여기까지 끌고 오신 건 정말 대단한 거라고 말씀드렸다.
이야기가 꽤 길어졌고, 생각에 더 있다가는 마감도 못 하시겠다 싶어서 서둘러 인사를 하고 나왔다.
이미 내 손에는 반이나 디스카운트된 달콤한 캔디하트 포도 한 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냥 안면을 튼 집 앞 과일가게 여사장님이 아닌, 또 한 사람의 찬란하고 치열한 삶의 이야기까지 그 봉투 안에 담겨 있었다.
어쩌다 보니 '직장갑질 119'라는 걸 알게 되었고 오픈 채팅방에 들어가 있다. 물론 내가 궁금한 건 오히려 상담 시간을 기다리는 것보다 노무사와 상의하는 게 훨씬 빠르고 정확해서 굳이 그 방에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어쩌다 보니 그냥 계속 있게 되었다.
거기 있다 보면 정말 별 스토리가 다 올라오는데, 입틀막할 법한 경악스러운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는 끊기지도 않고 올라온다.
인간이 어떻게 다른 인간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지, 지(!)가 상급자면 상급자고 대표면 대표지.. 남의 집 귀한 자식에게 어떻게 저렇게까지 분풀이를 할 수가 있으며 화풀이로 삼는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자신의 무지를 여과없이 드러내며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지.
절대적인 비중으로 높은 게 바로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것에 대해 너무 마음이 아프고 속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꽤나 여러 가지 일들을 겪어오면서 (어머니 표현으로는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어왔기에 지금의 일들이 또 시간이 흐르고 나면 나에게 남아 찬란히 빛나는 이야기가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것까지 가는 건, 그러니까 나이가 든다고 해서 덜 아프거나 덜 힘든 것도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는 요즘인 듯도 하다.